영성 편지

'인재를 모셔오는 비법'

이형선 2016. 4. 11. 10:14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때.

인접한 제나라를 공격했다가 연나라가 패한 시국에,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은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국력이 쇠락하는 시기에 즉위한 소왕은 패전의 수치를

씻기 위해서는 먼저 인재들을 구해 나라를 부강하게

세워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자 곽외(郭隗)라는 인물을 불러

그 방도를 묻자 곽외의 개구일성인즉 이렇습니다.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며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왕에게

 훌륭한 신하가 있는 법입니다.”

 

먼저 소통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상대방과 대등하게 행동하면 자신과 비슷한 인간들밖에 모여들지 않습니다. 걸상에 걸터앉아 봉을 쥐고 곁눈질로 지휘하면 소인배들밖에 모여들지 않습니다. 무조건 호통치고 호되게 꾸짖으면 하인들밖에 모여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재를 부르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곽외가 개진하는

‘인재를 모셔오는 비법’인즉 이렇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 왕이 천금이라는 거액을 내걸고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준마를 직접 구해오겠다고 나서는 신하에게 그 일을 맡깁니다.

3개월 후. 그 신하는 준마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지로 찾아갔으나 준마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 신하는 그 말의 뼈를 오백 금에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왕이 버럭 화를 내며 호통을 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살아있는 말이다! 죽은 말을 오백 금이나 주고 사오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그때 그 신하가 이렇게 받습니다.

‘죽은 준마이기 때문에 오백 금을 주고산 것입니다. 살아있는 준마라면 비싼 값에 사겠다고 소문을 냈으니까 이제 준마가 모여들 것입니다.’

그 후, 과연 1년이 채 못 되어 천하의 준마가 세 마리가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하의 ‘바보짓’이

외려 왕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가 되어

‘준마’ 내지 ‘인재’가 모이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준마’라면 그 뼈조차도 우대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

‘훌륭한 준마’를 ‘세 마리’나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배부른 시대’가 되어가면서

침체기를 지나 ‘쇠락기’에 접어들었다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다시 하나님과 사람을 ‘모셔오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대형’의 돈이나 건물이나 정치권력 및 종교권력을 탐하며 세상의 그것들을 통해 세력과시를 추구하는 성향이나 성적 및 도덕적 타락이나 부패 사건들 등으로 인해 “너무 세속화되었다”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을 ‘모셔오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나아가 역시 ‘스스로 배가 부를수록’ 되레 비인간적인 ‘갑질’이나 성적 외도 내지 타락이나 아동 학대 등이 성행하며 날로 인간성이나 공동체성이 파괴되고, 빈부 양극화 현상 등 암울한 풍속도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다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다운 인간성을 ‘모셔오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한마디로, “죽은 준마를 오백 금에 사오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의 이기적 내지 집단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과거의 타락이나 죄악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지극히 작은 자’의 가치를 ‘오백 금’ 아니 ‘천금’에 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바보짓’입니다. 부자나 권력자를 ‘모셔오는’ 것에 힘쓰며 그것을 교회의 자랑으로 전도(?)하는 천민자본주의 시국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 소왕처럼 버럭 화를 내며 호통을 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적 부류의 ‘왕’들과는 가치관이나 인간관이나 우주관이 전혀 다른, 영적 비밀 내지 섬김의 비밀을 아는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께선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25:40)

 

그렇습니다.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 되고 그래서 ‘작은 자’를 ‘모셔오는’ 그것이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오는 비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그 ‘영적 관계의 비밀’을 설파하십니다. ‘작은 자’의 가치를 영적 통찰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이해 및 역설하신 것입니다. ‘작은 자’의 가치를 ‘준마(駿馬)’ 이상의 가치로 평가하신 것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태복음18:10)

 

진실로 그렇습니다.

‘작은 자’나 ‘작은 이웃’을 배려하는 수준 그 만큼이 그 교회의 신앙인격 수준이고, 그 집안이나 그 사회 및 그 국가의 인격 수준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성에 대한 이해 그 자기 수준이자 사회 및 국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개나 돼지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개나 돼지로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러신 것처럼 작은 자나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거나 착취하는 ‘부자’나 ‘큰 자’들에 대해선 외려 건강한 비판도 질타도 가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공동체를 위해 건강한 견제세력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 같은 ‘작은 자’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업신여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작은 자’나 ‘노약자’나 ‘사회적 약자’가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영성 내지 영적 관계의 비밀에 열리면, 이른바 ‘잘나고 못난’ 인간 우리 모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되레 언행을 더 조심하며 섬기면서 살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열 자녀 중 ‘잘난 자녀’가 ‘못난 자녀’를 외면하거나 멸시하고 구박하면 그런 작태는 세상의 그들 육신의 아버지나 어머니 앞에서도 큰 불효 아닙니까? 형제자매 앞에서 스스로 유세를 부리는 그런 교만한 ‘부자’나 그런 ‘권력자’나 그런 ‘지식인’이나 그런 ‘바리새인’은 되레 ‘못난 자녀’보다 더 ‘못된 놈’이자 더 큰 ‘불효자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듯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행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태가 되어 실인즉 자기의 ‘영벌(永罰)’ 쌓는 어리석고 미련한 작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 ‘영적 관계의 비밀’에 열린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그 ‘비밀’을 굳게 믿는 자가 진실로 하늘의 복이 있고, 하늘의 지혜가 있는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내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이나 신학이나 비교종교학 등을 포함해서 학문적으로 유식하고 대단한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으로 실행하는, 되레 ‘바보’처럼 ‘단순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며 지배하기보다는 남을 섬기기가 더 어려운 공부이자 과제입니다. 그렇듯 유식해지고 복잡해지기보다는 자기를 부인하며 바보처럼 단순해지기가 더 어려운 공부이자 과제이고, 행세하는 부자나 권력자가 되기보다는 ‘심령이 가난한 자’ 되기가 더 어려운 공부이자 과제입니다.

 

-(*예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12:48-50)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 내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계시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성경의 말씀’은 동서양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나 어떤 고등학문처럼 어렵거나 현학적이지 않습니다. 뜬구름잡기 식의 언어유희나 난해한 말장난도 아닙니다. 당시 평범한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쓰던 ‘아람어’를 사용하여 대다수가 불학무식했던 그 민중들을 상대로 섬기고 가르치고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케리그마’는 모든 표현이 쉽고 간결합니다.

성경은 초등학생도 성자성녀도 다 함께 읽을 수 있는 평범한 문장이자 심오한 문장입니다. 좋은 시(詩)이자 심오한 시일수록 쉬운 말로 써진 것이고, 쉬운 언어로 글쓰기가 실상인즉 더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그래서 베드로처럼 ‘불학무식한’ 어부 출신의 사람도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수제자까지도 될 수 있는 ‘기묘한 말씀의 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늘의 복’이 있는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가 된다는 것은, 내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선민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되는 그 자체도 아닙니다. 외려 이방인 취급을 받던 ‘선한 사마리아인’(누가10:33)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작은 자’나 시대의 무자비한 폭력이나 전쟁이라는 ‘강도’ 및 시대의 정경(政經)유착이라는 불법적 혹은 합법적 부패사슬이라는 ‘강도’를 만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푼 자가 또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형제이자 자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국가에 참된 ‘하늘의 복(福)’ 곧 ‘하나님의 긍휼’을 ‘모셔오는 비법’이 거기 있고, 그렇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오는 비법’ 역시 분명히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7)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꽃잎이 날리는 건   (0) 2016.04.25
'사명을 완수한 생애'  (0) 2016.04.18
하얀 나비   (0) 2016.04.04
'내가 살고 싶은 생명'  (0) 2016.03.28
정승 허종의 삶과 사도 바울의 삶 사이   (0) 201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