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선교사이자 의사이자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그가 미개한 토인들과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섬김의 사역’을 하고자 당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며 적극 만류합니다. 그때 청년
리빙스턴은 자기의 각오와 사명을 이렇게 피력합니다.
“나는 이 아프리카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토인들은 병이 들어도 의사가 없어서 그대로 죽어갑니다. 상처를 입어도 치료를 할 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비참한 것은 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나쁜 환경과 습관을 바로 잡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또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사명)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혼자서라도 오지로 가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고자 합니다.”
그런 리빙스턴은 과연 그 후 34년 동안 아프리카 미개한 토인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그들을 온몸으로 섬기는 헌신의 삶을 살다가 그 역시 풍토병 질환에 걸려 1873년 5월 아프리카 현지에서 사망, 6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영국은 리빙스턴의 ‘하나님의 뜻’ 그 소명에 순종해서 그의 ‘의무를 완수한 생애’ 곧 ‘사명을 완수한 생애’를 크게 평가해서 시신을 본국으로 운송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했습니다.
그런 리빙스턴이 밀림 속에 사는 토인들을 찾아다니며 병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치료하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길목에서, 어느 날 사자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외마디 포효와 함께 순간 리빙스턴을 덮친 사자는 그의 어깨를 물었습니다. 그대로 까무러진 리빙스턴은 그러나 죽지 않고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립니다. 차라리 이상한 기적입니다. 그때의 피격으로 어깨뼈가 부러져 이후 종신토록 왼손을 어깨 위로 올릴 수 없게 되었지만, 다른 이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그의 일기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 사명을 다하는 날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내용의 유명한 고백을 남깁니다.
사람이 맹수에게 크게 당하면 그곳이 두려워질 법도 합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그 후로도 토인들이 달려와 도움을 청하면 한밤중에도 으레 밀림을 헤치고 왕진길에 나섭니다. 일행이 맹수들의 습격이 두렵다며 만류하자 그때 리빙스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병이란 때를 놓치면 고치기 어려운 법이오. 옳은 일을 할 때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십시다. 아무 일 없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옳은 일’을 할 때는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리빙스턴이 ‘사명을 완수한 생애’를 살다갈 수 있었던 그의 체험적인 삶의 고백이자 ‘큰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지요.
-스스로의 사명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기 가치를 알고 있으며,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스위스의 교육자 칼 힐스도 이런 말을 했더군요.
-생애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날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자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물론 각 사람이 종사하는 직업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가정을 가진 주부 내지 어버이는 가정을 잘 지키며,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르고 선하게’ 잘 키우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을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맡기실 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이자 사명을 다시 들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고-(개정개역, 창세기2:15)
‘개역성경’에는 저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고”라는 사명 부여가 “다스리고 지키게 하시고”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저 ‘다스리다’라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지배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경작하고’라고 개정했겠지만, 동사 ‘아바드’의 의미는 ‘일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경배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부연하자면, 인간 우리에게 오늘 맡겨진 직업 내지 현장이 ‘에덴 동산’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청와대든 여의도 국회이든, 지금 그대로의 모습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일하고(경작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청지기’ 내지 ‘종’의 자세로 하나님과 이웃을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 그것이 주어진 ‘사명’인 것입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재벌도 사장도 말단도 미화원도 주부도 다 맡은 바 그 자리에서 그런 중심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열심히 “경배하며, 일하며, 지키라”는 것.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주어진 계시의 말씀에 순종하기는커녕 되레 불순종하며 스스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교만과 사탄의 미혹에 빠져, 겸손하게 섬기며 “경작하고 지키기”는커녕 되레 한술 더 떠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유일한 금기의 말씀 곧 ‘선악과’까지 따먹어버립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 내지 하나님의 말씀이자 권위를 무시하고 따먹어버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본주의(神本主義)를 ‘따먹고’ 자기중심의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빠지는 모든 오만한 행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화론’이라는 과학도, 이웃을 이기적인 탐욕과 정욕으로 해치는 살인도 미움도 증오도 성적 타락이나 부도덕도 다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행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그 아버지(*아담)에 그 아들’ 같은 우리의 모든 타락 행위가 오늘의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행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효자식’ 곧 ‘죄인’이 된 인간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뢰 내지 신앙의 관계가 단절되어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채 불행한 실존의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 가는, 허무한 나그네 인생이 되고만 것입니다.
따라서 대대로 대물림되어 흐르는 우리의 모든 조상과 우리의 죄악 그 원죄와 자범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통해 용서받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설령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여느 동물들과는 다른 ‘인간의 사명’이라는 뜻있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자연인이라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저 사명의 말씀을 우리 각자에게 현재적으로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락원’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자 하늘의 복이 있는 삶이자 ‘최고의 지혜’ 그 자체이니까요.
한마디로,
맡겨진 오늘의 자리에서 늘 겸손하게 “경배하며, 일하며, 지키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청지기의 삶’이자 ‘사명을 수행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권력이나 재력이나 학문이나 재주가 있다고 해도, ‘사탄’ 및 주변 ‘지당대신들’의 아첨이나 박수에 미혹되어 교만해져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하거나 스스로 신(神)처럼 행세하면, 자기중심(人本主義)의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가 되어 결국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계시 및 경고의 말씀을 늘 명심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혹자는 저에게 이렇게 물을 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그럼 너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냐?”
저는 그에 대한 답변을 제가 본받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20:24)
실로 사도 바울은 저 리빙스턴의 대선배입니다.
‘사명을 완수한 생애’를 살았던 인생 내지 신앙 대선배라는 것입니다. 지난날 저도 이성(理性)이나 자의식이 제법 강한 쪽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내지 신앙을 심령의 위안이나 의지, 윤리 도덕이나 양심을 위한 세계 정도로 이해했을 뿐, 객관적 내지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현존(現存) 자체의 신앙에는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러던 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우주관이 확 뒤집어진 것은, 제가 상경했던 그 해 곧 1987년 봄 ‘삼각산’에서 두어 달 기도 생활을 하던 중 희한한 ‘성령체험’을 하면서부터입니다. 제가 자원해서 그곳에 간 것도 아닙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서울에 낯선 저는 삼각산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지조차도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저를 “목사로 키우고자” 기도해주던 감사한 어른이신 임ㅇㅇ 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승용차를 타고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분은 ‘무식한 신비주의자’도 아닙니다. 서울대 출신의 인사입니다.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렇듯 사람들을 통해 기묘하게 앞서 인도 및 역사하시더라고요.
아무튼 그렇게 삼각산에서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저는 그 후 주신 그 사명에 순종해서 잘하든 못하든,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 모습 이대로’ 문서선교 일선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힘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젠 저도 60대 중턱을 이미 넘어선 나이입니다. 이 나이에 별다른 사심이나 욕심은 없습니다. 다만 ‘받은’ 사명을 잘 수행하고, ‘받은’ 사명을 잘 완수한 생애를 살다간 분들의 삶이 진실로 부러울 뿐입니다. 그럴 것이 오늘까지 제가 살아있다는 것, 이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큰 은혜이자 ‘일만 달란트’라는 ‘큰 빚(debts)’이라는 것을 저 역시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저는 어떤 형태로든 진작 죽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저는 이른바 ‘불운했던’ 청년시절부터 자살을 포함해서 운명적인 죽음의 그늘이나 그림자를 자주 경험했던 사람이니까요. 따라서 “나의 나 (그리스도인)된 것”은 물론이고, 오늘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큰 은혜이자 큰 긍휼이라는 것을 저는 감히 고백 및 증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듭 거듭 ‘증언’하고 싶어서 이런 글도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럴 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성령 체험’을 통해 가치관이나 신앙관이 확 뒤집어진 사도 바울의 그 심경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싶고, 그 신앙의 공감대를 ‘증언’하는 동일한 사명이 또한 저에게도 주어지는 것을 지난날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크고 작은 모든 ‘주의 종들’에게 주어질 동일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명을 수행 및 완수한다는 것은 크고 거창한 일이나 위인들의 삶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천국 잔치’에는 물론 ‘열 달란트’ 내지 ‘다섯 달란트’를 받은 ‘금그릇’이자 ‘큰 그릇’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저처럼 평범한, 시쳇말로 ‘흙수저’ 같은 ‘질그릇’이나 ’작은 그릇’도 분명히 필요한 법입니다. 평범한 우리 모두가 ‘사명을 완수한 생애’를 살다간 저 인생선배들이자 신앙선배들의 삶을 본받아야 할 개연성이나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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