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권위에 대한 복종은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겸손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우리에게 교만보다 더 밉살스러운 것은 없으며, 겸손보다 더 온당하고 매력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본질적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려는 자발적인 자세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것을 믿고 순종하기 위해 그분의 발 앞에서 겸손하고 조용하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앉아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마음대로 그분을 불신하거나 불순종할 자유가 없다.
우리와 교회 전체 앞에 놓인 궁극적인 이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과연 주(主)님이신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가르치고 교회에 명령을 내리는- 교회의 주인이신가, 아니면 교회가 -그 분의 가르침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그리스도의 주인이신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권위의 위기와 교회 내에서의 권위의 상실 속에서, 나는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겸손히 순종하며, 또한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사랑과 사명과 가르침에서 겸손하게 성경에 순종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겸손하게 순종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할 것을 호소한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올바른 ‘겸손의 본질적 요소’와 모범이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겸손하게 순종한’
거기서 비롯된 것처럼, 우리도 현재적으로 그렇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그리스도인 개개인도, 교회도,
사회도 진실로 복되게 사는 생명의 길이자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신앙공동체의 특정 목사나 “신령하다”는 영적 지도자의 ‘말씀’이나 가르침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가르침보다 더 강조되는 교회나 집단일수록 스스로 잘 믿는 것 같아도, 이미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복음’이 되고 ‘다른 말씀’으로 변질된 그것이 되레 자승자박의 밧줄이나 덫이나 미혹이 되어 그 열매나 결국은 죄다 허무한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차라리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 대대로의 증언이자 교훈입니다.
성경의 말씀만으로는 뭐가 부족한 것처럼, 거기 유식하다는 혹은 신령하다는 ‘자기 말씀’ 내지 ‘사람의 계명’ 중심으로 가감(加減)하거나 임의로 편집해서, 재물이나 권력에의 탐욕과 육체적 정욕 등을 입맛에 맞도록 ‘성공’이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세속화 내지 정당화시키면서 되레 합리적으로 타락하여, 이른바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된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말씀만으로는 뭐가 부족한 것처럼, 거기 여타 종교의 득도의 길이나 방법론을 혼합 및 짜깁기하거나 가감해서 얻는 다원주의적 내지 주관적 깨달음이나 인간 자기중심의 ‘신령하고’ 유별난 수행이나 신비주의 등에 치우쳐도, 그런 신앙이나 가르침의 결국 역시 한 시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허무하고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것 역시 역사 대대로의 증언이자 교훈입니다.
가깝게는 한국현대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태선의 전도관’이나 ‘문선명의 통일교’의 경우가 그렇고, 이른바 ‘휴거론자들 집단’이나 ‘시한부종말론자들 집단’이나 금욕주의적 내지 신비주의적 신앙운동 집단 등의 경우 역시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질타 및 경고하신 것이겠지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는도다.-(마가복음7:8-9)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그 말씀 그 계시적 비밀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할 절대 필요성이 거기 있습니다. 겸손하게 알고, 겸손하게 믿어야 할 절대 필요성이 거기 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해서는 안 되고, 독선이 독선을 인도해서는 안 되고, 교만이 교만을 인도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늘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는 데로 가고 멎는 데서 멎어야” 할 필연성도 거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올바른 겸손’도 그것을 본받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겸손’도 오직 “(성경)말씀이 가는 데로 가고 멎는 데서 멎는”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 어느 교회나 집단에서든 ‘사람의 계명’이나 ‘사람의 전통’이 주인 내지 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면 참 주인이자 왕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는 거기 없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시소(See Saw)’라는 상하(上下)놀이이자 운동의 법칙이 그런 것처럼, 특정 목사나 교주가 신격화 및 우상화 되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상대적으로 그만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낮아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내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상대적으로 그만큼 이웃은 낮아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럼 그런 개인이나 교회나 집단의 열매나 그 결국이 과연 좋은가? 전혀 아닙니다. 쓴 열매 내지 허무한 열매만 즐비할 뿐입니다. ‘소유’만 있을 뿐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건물’만 있을 뿐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과 공존하지 못하는 시쳇말로 ‘갑질’이라는 사회적 못된 근성이나 타성도 그렇고, 나는 너희들보다 더 거룩하고 의롭다는 식의 상대적인 영적 교만이나 집단의 착각도 다 그렇게 허무한 열매이자 그 결국일 수 있으니까요.
저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보다 특정인간이 더 커지고 더 신격화된 곧 신처럼 우상화된 ‘시소의 법칙’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나 그런 집단이나 그런 사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리가 없지요. 제발 하나님이 떠나버린, 그리스도가 이미 떠나버린 그래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 같은 그런 인격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집단이나 사회가 되지 않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5:13)
‘짠맛 잃은 소금’이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지기만 하면 차라리 괜찮을 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사람의 발에 밟힌다는 것입니다. 세상 및 시대의 발에 되레 밟힌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도 비참한 모습 아닙니까.
‘소금’의 진정한 역할이 뭡니까?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은, 교회나 공동체 속에 들어간 소금은, ‘자기(自己)’라는 모습이나 형체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를 통째로 부인하고 온전하게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16: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저 말씀에서 ‘부인하다’ 곧 헬라어 ‘아팔네오마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비난하다, 포기하다’는 의미까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비난하고, 포기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통째로 사라진 그래서 되레 그 고유의 맛이 음식 전체에 골고루 그리고 평등하게 퍼져있는 ‘섬김의 상태’,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곧 ‘소금’의 진정한 모습이자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겸손’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죄인의 괴수”라는 고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시소(See Saw)의 자리 곧 ‘십자가’라는 순종과 섬김과 헌신적 사랑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고 높고 대단하다는 사람의 내로라하는 지혜도 능력도 은사도 깨달음도 다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피조물 인생이 한계를 살다갈 뿐인 일개 ‘티끌’ 같은 자기분수를 망각하고,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기를 과장 내지 미화하며 축복 타령을 해봤자 그 결국은 대단했던 솔로몬 왕의 탄식이 그랬던 것처럼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라는 ‘허사가’로 마침표로 찍기 마련입니다.
또한 저도 젊은 시절엔 나름대로 불교서적을 즐겨 탐독했습니다만, 이른바 출가하여 독신구도자로 ‘삼천 배 수행’ 등 금욕적 내지 초인적 극기 수행과 용맹 정진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어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당대가 평가했던, 현대 실천불교의 전형적이자 대표적 선승이었던 성철(性徹) 스님.
대단했던 그분도 그러나 임종 즈음에는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罪業)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열반송 ‧ 抄)라는 장탄식을 토로하며 천추의 한을 안은 채 허무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저 역시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 세상 살다간다는 인생의 의미와 함께 깨달음의 세계가 깊었던 저런 현자들의 종말적 탄식이나 토로에 더욱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그럴수록 역사적으로 수천 년에 걸쳐 이미 검증된 성경의 말씀을 늘 겸손하게 묵상하며 좌우(?)로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구교적 내지 전통적 근본주의나 진보적 내지 철학적 자유주의나 세속적 번영주의 등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나만 잘 믿고 나만 선하고 의롭다는 식의 유치한 독선(獨善)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오직 성경의 “말씀이 가는 데로 가고 멎는 데서 멎는” 복음주의신앙이 진정으로 하늘의 복이 있는 올바른 신앙이라는 것을 체험적이자 실존적으로 거듭거듭 절감 및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의인 되어 교만한 것보다 죄인 되어 겸손한 것이 낫다”는 성 어거스틴의 심오한 고백과 같은 맥락의 고백이자 토로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계시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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