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우거지고, 하이네의 시구처럼 ‘모든 봉오리가 꽃으로 피는’ 싱싱한 5월은 과연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약동하는 녹음 곧 푸른 생명의 조화는 목하 대지라는 천하를 잠식 혹은 장악했지만 그러나 전혀 오만하지 않습니다. 군림하거나 호령하지도 않습니다.
세력이 커지고 짙어질수록 오히려 하찮은 푸성귀들을 포함해서 잘나고 못난 ‘모든 봉오리’를 아늑하게 품어주고 섬기고 살려주는 모성(母性)의 품이 됩니다. ‘공동선(共同善)’이라는 자연의 세계이자 공존의 세계를 이룹니다.
그것이 또한 세상의 대단한 모든 능력이나 권력에게 주어지는 본연의 덕성이자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모본이자 에센스 아니겠습니까.
대지처럼 크고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높은 자연의 품, 심령의 품.
거기서 우리는 늘 창조주 하나님의 영성(靈性)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사랑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에베소서3:18-)”의 그 비밀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라는 ‘봉오리’도, 어버이라는 ‘봉오리’도, 스승이라는 ‘봉오리’도, 장애인이라는 ‘봉오리’도 소외받지 않고 모두 꽃으로 피어나고, 모두 향기가 되어야 할 5월의 사회, ‘5월의 향기’.
꽃은 그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기를 포기한 동물에게는 아름다운 꽃이 아름다운 꽃으로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소 닭 보듯, 소나 닭이 꽃 보듯 살라고 각종 꽃들을 고유의 천연색으로 피어나게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꽃은 그것을 꽃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마음 내지 심령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창조된 아름다움이자 선(善)일 수 있습니다.
너도 사람은 물론이고 각종 생물을 포함한 모든 이웃과의 관계에서 ‘세상의 꽃’이 되고 ‘세상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자연계시’일 수 있다는 것.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의 역할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해서 그것은 ‘네 떡’만을 위해 너무 바쁘게 사느라고, 목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제 몫의 삶 자체로 조용히 피어있는 ‘꽃’들의 평화로운 외침이자 자연의 웅변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이자 그 사회적이자 공존적 의미와 여유를 위한 메타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떡’이 꽃이 아니듯 ‘꽃뱀’ 역시 꽃이 아닙니다. 그건 ‘뱀’일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정욕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꽃에는 악한 꽃이 없습니다. 못난 꽃도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모두가 아름다운 꽃이자 선한 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꽃’으로, ‘세상의 향기’로 피어있는 것일까요? 5월은 강물처럼 지나갑니다. ‘5월의 향기’도 덧없이 사라집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그랬지요?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 역시 길어봐야 ‘백일홍’입니다. 내일이면 늦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그의 시〈꽃〉을 통해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抄)는 소원을 토로했습니다만, 더 나아가 ‘잊혀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럴 것이 인생의 나이테가 늘어갈수록 진실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은 그래서 진실로 마음에 오래 남는 기억이자 영원한 생명이자 진리이자 그 향기는, 오직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은”(마태복음23:37) 모성애적(母性愛的) 사랑 곧 헌신적 사랑이자 희생적 사랑으로 대변되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 자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로스’라는 남녀 성적 사랑에서 나는 냄새도 아니고, 거창한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에서 나는 냄새도 아니고, 종교적 율법이나 전통이나 도그마나 수행 등에서 나는 냄새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15:18-20)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 ‘너희의 전통’이자 ‘사람의 계명’이 되어 있고, 현대의 유식한 지식과 의학이 되어 있는 ‘계명’(?)인,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각종 세균은 사람을 아프게 할 수는 있어도 더럽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정작 두려워할 것은,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몸이 병든 것보다 심령 곧 속사람이 병든 그것이 더 두려운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막말로, 내 몸이 병들면 나 혼자 죽으면 됩니다. 그러나 내 심령이 병들면 다른 사람이나 이웃 등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원망, 증오 내지 유린하며 죽이게 됩니다. 모든 인간 관계나 사회적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기는커녕 이기적으로 더럽고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정경유착이나 법조비리나 가진 자들의 갑질 등 저 모든 사회적 악들 역시 그렇게 심령이 병든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부정부패의 열매이자 악한 열매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몸, 우리 인격에선 어떤 냄새가 나고 있을까요?
‘내 돈’, ‘내 권력’, ‘내 지식’의 냄새?
‘내 탐욕’, ‘내 정욕’의 냄새?
‘내 교만’, ‘내 독선’의 냄새?
아니면 ‘화장품의 향기’?
아니면 영(靈)의 눈도 귀도,
코도 그 후각도 이미 마비된 쪽은 아닐까요?
아예 마비되어 차라리 뻔뻔하고 무례한 쪽은 아닐까요?
그래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도 ‘생명에 이르는 냄새’도 구별하지 못하고 숫제 관심도 없는 지경에 빠진 것은 아닐까요? 분명한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이자 가장 더러운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을 위시한 신앙은 물론이고 당대의 헬라나 로마 세계 등 ‘글로벌 학문’에도 해박했던 대단한 학자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비밀’을 직접 체험하고 거듭난 이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사도 바울.
그가 전도 및 증언했던 복음이자 말씀은 구약 ‘모세의 향기’도 아니고 ‘다윗의 향기’도 아니고 ‘솔로몬의 향기’도 아니었습니다. ‘성 베드로의 향기’도 아니고 ‘나 성 바울의 향기’도 아니고, 어떤 대단한 성자성녀나 성현군자의 향기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영원한 꽃인 ‘샤론의 꽃’이자 그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였습니다.
대속(代贖)의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어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그래서 되레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도 살아있는,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있는, 사도 바울 그의 고백이자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린도후서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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