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세상’이라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구시대 사람들보다 되레 더 바쁘게 살아갑니다.
아장아장 걸을 수만 있으면 유아원부터 ‘출퇴근’하기
시작해서 20대까지 ‘공부, 공부’와 씨름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돈, 돈’을 벌고, ‘좋은 남자,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사고,
자녀들을 또한 그렇게 키우며,
남보다 더 잘 먹고 잘사는 ‘우리 집,
우리 가족’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인생의 지상 목적과 절대가치가 한마디로,
세상에서 남보다 더 성공 및 출세해서 ‘나와 내 가족’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사는 삶 그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누구도 탓할 자격은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정당하게 성공
및 출세도 하고 그래서 잘사는 삶은 누구나 소원 및
선망하는 바이고, 모든 어버이들이 그 자녀들에게
바라는 솔직한 희망사항이자 기대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사회적으로 남다른 성공과 출세를 이루었다 해도 그 자체로 인간이 진실로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더라는 그것입니다. 재벌 집안의 부자간이나 친형제 간에도 돈 문제나 경영권 문제 등으로 법정다툼까지 일삼고, 권력자들 역시 ‘비하인드 스토리’가 그렇듯이 살벌한 암투와 견제를 일삼으며 정치적 내지 형사적으로 서로 죽고 죽이고, 그런 정치인이나 부자들의 ‘집사’ 내지 ‘하수인’ 노릇하며 돈다발에 팔려 합법적(?)으로 비리 내지 부정부패를 일삼는 ‘머리 좋다는 법조인’들의 철저하게 이기적인 행태 등이 그 생생한 반증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성공 및 출세했다는 저들이지만 ‘엘리트’라는 저들이 되레 당사자는 물론이고 나아가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고, 흑암과 혼란에 빠뜨리는 사건들을 우리는 일상사처럼 목격하며 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했지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실(誠實)입니다.-
부연하자면, 그것은 인간 ‘내가 원하는 성공’과 ‘하나님이 원하는 성공’은 다르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인간 내 뜻, 내 소원’과 ‘(하나님)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소원’은 다르다는 것. 세상이 기뻐하는 ‘성공’이라는 가치와 하나님 기뻐하시는 ‘성공’의 가치는 다르다는 것.
그런 ‘말씀’에 대한 극적이자 극명한 현장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적 내지 세상적으로 보자면 치욕이자 실패이자 몰락이자 끝장인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드리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다시 들어봅시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그렇습니다.
되레 ‘참 복’이자 ‘영원한 복’이 있는 인생 내지 신앙의 참 목적과 절대가치는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사는 삶, 거기에 있습니다. ‘내 뜻, 내 중심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뜻, 하나님 중심의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삶’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았던 19세기 유명한 전도자 D. L. 무디 선생의 모습에서 그 일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되레 기뻐하며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죽음은 영광스럽다!
이 세상은 물러가고 천국이 열리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인생을 결산하는 임종의 자리에서 되레 기뻐하며 저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하늘의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우여곡절 내지 파란곡절이 있기 마련인 인생여정이지만, 그러나 임종의 자리에선 그 인생이 추구해온 목적이나 가치의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표출 및 증명되기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임종의 자리에서 인생의 허무함과 허망함을 한탄하지도 않고,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 잡혀가는 듯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음조차도 되레 감사하며 새 집으로 이사 가듯 떠날 수 있는 사람은 평소에도 ‘깨어있는 삶’, 죽음 혹은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생애’를 살다간 무디 선생의 신앙과 삶의 목적과 절대가치는 그렇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천국’ 중심으로 살았고,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은 ‘현재적 천국’과 ‘종말적 천국’으로 대별됩니다. 종말적이자 내세적 천국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현재적이자 금세적 천국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 수 있는 세계이자 살아야만 하는 세계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4:17)
그렇게 선포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왕중왕’ 곧 ‘천국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친히 증언하신 ‘현재적 천국’의 실재(實在)에 관한 말씀을 들어봅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
그렇습니다.
인생살이 최고의 축복이자 영원한 생명이자 행복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는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세계가 아닙니다. “너희 안에” 곧 ‘우리의 심령(心靈) 안에’ 있는 나라입니다. 당신과 나의 심령 안에 여의도보다 더 크고, 한반도보다 더 크고, 지구촌보다 더 크고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모든 사도들도, 역사상 모든 순교자들이나 신앙위인들도 죄다 저 ‘하나님의 나라’, 저 ‘천국’을 소유했고 그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심령의 부자’ 내지 ‘마음의 부자’가 되어, 세상이나 육신의 가난이나 병이나 실패나 핍박이나 환란조차도 되레 감사하며 기뻐하며, 능히 이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처참하게 순교당하는 죽음 앞에서조차도 기뻐하며 의연하게 죽어갔습니다. 세상이나 육신의 저 모든 것들은 상대가치였기 때문입니다. 절대가치인 ‘현재적 천국’을 준비 내지 소유한 자의 영안(靈眼)에는 또한 ‘종말적 천국’의 열림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그가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토로한 고백을 통해 ‘종말적 천국’의 열림을 또한 확인해봅시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人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사도행전7:55-56)
우리는 과연 저 스데반처럼
저 무디 선생처럼,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천국’
중심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천국’을 인생의 목적과 절대가치로 소유한 사람들일까요?
교회의 지상 과제도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개교회를 위한 개교회’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복음이자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냐?
혹자는 그렇게 묻을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는 ‘살아계신 하나님’ 곧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청와대’나 ‘백악관’이 아닌, ‘하늘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구약과 신약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각론에 들어가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헌법’ 한 권으로 다 해설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신학적 내지 학문적 접근에 따라 그 해설이 다양해집니다만 신학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유식한 학문이나 그 현학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 가 살아계신 자기 부모님을 신뢰하는 것 같은 그런 순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그 자체가 은혜이자 은사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경의 말씀 그대로 언급하자면 한마디로,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자 ‘안식(安息)’의 나라이자 ‘세상을 이기는 평안의 나라’(요한복음16:33)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고린도전서13:13)의 나라이자, ‘성령(聖靈)의 열매’가 그런 것처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goodness)과 충성(faithfulness)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5:22)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들을 요약해서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righteousness)와
평강(peace)과 희락(joy)이라.-(로마서14:17)
그럼 여기서 ‘말씀의 화신(化身)’ 곧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역설하신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righteousness)를 구하라.
그리하면 (*세상살이에 필요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인생이 먼저 구해야 할 우선의 가치이자 ‘절대가치’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참 복’이 있고 ‘영원한 복’이 있는 삶이자, 가장 가치 있는 인생에의 길(道)이라는 것입니다.
저나 오늘의 한국교회를 포함한 우리는 정녕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이나 그 가치관이 다만 세상에서 남보다 더 성공 및 출세하는,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살며 행세하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복(祈福) 내지 소원성취의 ‘수단’이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대형 목회’조차도 이기적인 ‘나의 욕망’과 사회적 ‘나의 야망’의 성취를 위한 수단이자 상대가치로 전락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목적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 그 절대가치의 목적은, 세상에서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곧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라, 바르고 선하게 곧 가치 있게 살아라, 너는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항상 ‘믿음 소망 사랑’을 주는 말을 하고 그런 삶을 살아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간곡한 당부에 다름 아닙니다.
말을 바꾸자면 공존적 사회의식 내지 시대의식과 종말론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타락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구원 및 변화시켜나가라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상명령'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나 명사로 성공 및 출세하라는 것도, 세상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산신령이나 거목이나 기암괴석 같은 ‘천연기념물’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를 인생의 절대목적이자 절대가치처럼 가르쳐서도 결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이런 말을 했지요.
-희생이 없는 종교는 사회에 해악을 끼칠 뿐이다.-
그렇습니다. ‘희생이 없는’, 이기적인 모든 여타 종교나 그 신도들은 대단한 성공 및 출세를 이루었다 해도 결국엔 그 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나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질타 당하는 이른바 ‘직업이 되어버린 성직’이라면 그 병증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상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또한 주님의 공생애 사역 제 일성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 이제는 왠지 역설적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너희에게서 떠나가고 있느니라’라는 말씀으로 들려지는 이유이자,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18:8)”고 하셨던 그리스도의 탄식이 더 가깝게 들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작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진정한 성직자나 신앙위인들은 죄다 자기를 부인하고 ‘부자’의 자리에서 가난한 자리로, ‘귀족’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되레 내려왔습니다.
‘천국’이라는 절대가치를 위해 세상의 각종 소유라는 상대가치를 사도 바울의 표현이 그렇듯 ‘배설물’처럼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 스스로 '케노시스(비움‧낮춤)의 자리'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사람의 절대가치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소유’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밤, 하나님이 내 영혼을 부르시면” 우리는 재물도 신분도 권력도 지식도 다 ‘배설물처럼’ 버려두고 ‘오늘 밤’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중세 수도사들의 일상의 인사가 그랬듯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곧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실존적 명제 앞에 서면, 우리네 인생의 참 목적이자 가장 중요하고 고상한 ‘절대가치’는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잘나도 못나도, 건강해도 병들어도, 가난해도 부유해도, 성공해도 실패해도, 그런 것들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죄다 ‘상대가치’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열리면, ‘잠깐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버이의 안목이나 마음에도 "성공(成功)했다"는 ‘한양의 권세이자 부자’인 장남이나 ‘미국의 교수’인 차남, 상대적으로 "실패했다"는 ‘농부’인 삼남이나 ‘맹인 거지’인 막내나 다 똑같은 ‘내 자식들’ 아닙니까? 그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 막내 곧 ‘맹인 거지’에게 관심이 더 많은 게 ‘어버이의 마음’ 아닙니까? 어버이가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효자’는 못나서(?) 되레 고향을 지키며 늘 성실(誠實)하게 어버이를 모시고 함께 사는 ‘농부’인 삼남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대 사도 바울은 신비체험을 통해 ‘셋째 하늘(the third heaven)’(고린도후서12:2)에까지 이끌려 올라가서, ‘말(*이성)로 표현할 수 없는 낙원’ 내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의 실재를 친히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는 그래서 인생의 참 목적과 절대가치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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