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위하여

이형선 2016. 6. 13. 10:14

 

 

동양의 고전,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천지(天地)의 기운이 따뜻하면

 만물이 자라나고, 추우면 죽는다.

 그러므로 성질이 차가운 사람은

 누릴 복도 참으로 박하다.

 오직 화기(和氣) 있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야 받아서 누릴

 복 또한 두텁고 오래오래 간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천지 만물과 ‘천지의 기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이자 마음이자 메시지입니다.

‘자연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연의 섭리 안에서 살고 있고 그런 섭리를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내지 성질이 다 다릅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도 있고 ‘차가운 사람’도 있고 ,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쪽일까요? 실인즉 그 자체가 자기에게 ‘두텁고 오래 가는 복’이자 ‘참 복’일 수 있는, ‘화기(和氣) 있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까요?

 

물론 오늘의 시대는 타고난 외모(外貌)조차도 성형수술해서 바꾸거나 미인이 되면 소위 ‘사주팔자’ 곧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하는 ‘인본주의시대’입니다. 그러나 선인들의 경험과 지혜에 ‘미인박복(美人薄福)’ 내지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도 있듯이, ‘미인의 몸’이 자기를 되레 교만 및 불행으로 인도하는 유인이나 사례가 된 경우는 허다하도록 많습니다.

그것이 ‘몸의 성형수술’보다 ‘마음의 성형수술’이 먼저 필요하고, 보다 중요한 절대 이유일 것입니다. ‘몸의 관계’는 한순간이자 한철이지만, ‘마음의 관계’는 ‘오래오래’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인즉 ‘연예인 누구처럼’ 미인 되어 오만한 것보다 보편적으로 좀 못나더라도 성질이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레 더 복이 있고, ‘출세한 누구처럼’ 능력 있어 성질이 차갑고 오만한 것보다 평범하더라도 성질이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레 더 ‘하늘의 복’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모의 연예인들’이나 사회 각 분야의 ‘잘 나가는 스타들’일수록 이혼 수치가 높은 것이 그 단적인 사례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들이라고 이혼하고 싶어서, 이혼 그 자체가 좋아서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보통사람들 그 누구도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나 괴로움이나 외로움 등을 이기기 위해, 처음부터 중독성이 있는 술이나 약물에 취해서 살고 싶었던 사람들 역시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 우리 모두의 문제는,

먼저 마음을 성형 수술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심령이 거듭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복이 있는 ‘따뜻한 마음’이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지만,

‘선한 마음’을 가지는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실인즉 자기 감정 내지 성질이나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이해타산을 ‘부인(否認)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호락호락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또한 인간이 태생적으로 ‘비본래적 상태’ 곧 ‘타락한 상태’에 있는 실존적 반증이자 ‘거듭나야만 할 존재’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것을 ‘죄인(罪人)의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과연 인간 우리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굶주릴 때와 배부를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배만 부르면 금세 ‘내 성깔’, ‘내 주먹’, ‘내 야욕’이 나옵니다. ‘내 배짱’에 안 맞으면 금세 변합니다. 천사 같다가도 악마처럼 금세 변합니다. 차라리 ‘간사한’ 인간 우리의 성정, “내 마음, 나도 몰라”, “내 본색, 나도 몰라”가 됩니다.

 

그럼 이런 ‘내 문제’, ‘우리의 문제’,

운명 내지 숙명이라는 ‘내 짐’,

‘우리의 짐’을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구원의 해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나’로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 각오, 내 능력, 내 노력’만으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 이유’ 곧 하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환언하자면, 역사적으로 검증된 ‘바른 신앙’의 절대의미와 절대필요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세상에 오신 ‘구원자’ 곧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gentle and humble)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안식)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11:28-30)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한마디로 ‘온유한 마음’이자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섬기기 위해 스스로 낮아진 ‘비천한(humble) 마음’이고, ‘온유(溫柔)한 마음’은 국어사전 해설 그대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원문을 찾아보니, 저 ‘온유한’이 ‘프라우스’로 되어있더군요. ‘온유한, 온화한, 친절한’, 그런 마음입니다. 저 〈채근담〉의 표현 그대로 ‘오직 화기(和氣)가 있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 그런 마음이자 그런 사람의 전형이자 모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및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참 ‘온유한 마음’과 참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보다 ‘내 감정’이나 ‘내 사욕’이 더 커져버리면, 그래서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나는 천사에서 금세 악마로 다시 돌변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금식(禁食)이라도 하면서 늘 먼저 깨어 기도하며 겸손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할 ‘바른 신앙’에의 절대필요성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늘 먼저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늘 먼저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의 지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정녕 그렇습니다.

‘먼저 지킬 것’도, ‘더욱 지킬 것’도,

‘네 마음’이자 ‘내 마음’입니다.

‘생명의 근원’도, ‘참 복의 근원’도,

오직 거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