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엮어진 책인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저 분은
거기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갖는데,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만이
남을 용서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자주 부딪치기 마련인 ‘용서’라는 화두 앞에서, 그것을 늘 남에게 베푸는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부”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스캔들”이라는 속언처럼, 내가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네가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의당 비난과 질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나 우리 가족, 우리 편’이 저지른 ‘들보’ 같은 죄나 허물이나 비리에는 늘 관대하지만, 남이 저지른 ‘티’ 같은 그것들에는 늘 예민하게 반응하며 비판이나 비난을 퍼부어댑니다.
물론 일방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이나 시기 등 비판을 위한 비판과 사회공동체의 정의나 선이나 유익의 구현을 위한 건설적 비판은 다른 것이고, ‘하나님의 공의’ 및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건설적 비판이나 공권력에 의한 응분의 심판이나 형벌은 필요합니다. 다수의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 내지 양들을 지키기 위해 때론 맹수 같은 권력의 독재나 횡포, 재벌의 탐욕이나 독식 등을 견제하는 언론이나 교회의 기능도 필요합니다.
실인즉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로 그렇게 주어진 한 시대를 ‘의인’이자 ‘선한 목자’로 살다 가신 분입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저 분 정도의 삶이라면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부”해도 괜찮을 법한 ‘거룩한 의인’이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인격을 우리가 오늘도 ‘큰 인물’로 존경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늘 먼저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거기서 비롯됩니다. 말을 바꾸자면, 그의 ‘겸허한 신앙인격’ 내지 ‘신앙양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민주화 내지 사회정의를 위한 비판과 투쟁을 해도 늘 그 시작이 그런 신앙양심에서 비롯되었고, 끝나고 돌아간 자리 역시 그런 신앙인격이자 양심의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의 말씀이자 고백을 통해 그런 신앙인격이자 신앙양심의 자리를 확인해봅시다. 먼저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라는, 곧 태생적 내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 이해에 관한 말씀을 다시 확인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사도 바울은 저 김수환 추기경 이상으로 주어진 한 생애를 헌신적인 ‘주의 종’으로 살다가 순교까지 하신, ‘위대한 의인’이자 ‘성인’이었으니까요. 그가 ‘깨달은’ 심오한 인간 한계의 비밀이자 정체성의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인즉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
우리는 과연 저 “한 법을 깨달은” 사람들일까요? ‘사망의 몸’이라는 모순적이고 절망적인 실존적 인생 자체의 화두인 저 ‘한 법’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들일까요? 키엘케골의 또 다른 표현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존재라는 것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들일까요?
진실로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구하는 가치관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먼저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몸’ 내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재물? 권력? 명예? 주색? 성공? 출세?
사도 바울은 구원에의 길이자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을, 체험적으로 만나고 찾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또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주(*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7:)
우리 역시 진실로 저 “한 법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또한 진실로 자기는 물론이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신앙인격이자 양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를 많아 받아야 할 ‘사망의 몸’ 곧 죄인이자 사형수의 몸이라는 인간 자기 정체성을 통감한 사람이, 그런 큰 용서를 체험적으로 받아본 사람이 또한 이웃에게 큰 용서를 베풀 수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럴 것이 내가 말과 혀와 흉기로 남을 예사로 죽이던 흉악한 사형수의 몸으로 ‘자기’ 및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세상’이라는 ‘감옥’에 친히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입고 그 ‘큰 죄’이자 ‘일만 달란트’라는 ‘큰 빚’을 죄다 용서 내지 탕감 받고 ‘자유의 몸’이 되어 출옥한 사람이라면, 이후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만난 절도범이나 폭력범 같은 사소한(?) 잡범들을 내가 함부로 비판하고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인격이나 양심 차원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선 내 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우리에게 이런 당부의 말씀을 또한 주셨으니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34-35)
내 마음 내 배짱에 맞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방인’도, ‘동물가족’도, 조직폭력배도 그런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나 ‘별 볼 일 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큰 인격 큰 양심이 필요합니다. 먼저 내가 큰 용서를 받았고 큰 은혜와 큰 긍휼을 입었다는, 인격적이자 심령적으로 ‘거듭나는’ 큰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웃에 대한 포용력도 나오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죄인의 괴수’이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자기 정체성 이해에서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실인즉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진정한 ‘의인’이자 ‘큰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를 죽인 ‘원수’조차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인격이나 신앙얌심은 너무 이기적인 쪽은 아닐까요? 차라리 옹졸하고 인색하고 치사한 쪽은 아닐까요?
그래서 되레 이기심 내지 집단이기심, 도그마나 독선(獨善)에 사로잡혀 지역이나 계층 간, 이념이나 정파 간, 빈부나 노사 간, 심지어 종파 간, 서로에게 반목과 대립과 분쟁을 은근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사주 및 선동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높은 사람들 앞에선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알아서 기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 앞에선 ‘갑질’이나 하면서 ‘속물들의 유세’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금수저 신분’이나 스스로 성공했다며 그 이기적인 기득권으로 유세를 부리는 수전노나 철면피나 ‘악인의 형통’이나 그 소유를 너무 부러워하지도 맙시다. 물론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소유’는 의당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한세상 살다 가는데 수십 수백억의 떼돈이 필요한 것도 분명 아닙니다.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떼돈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러나 ‘불의하게 번 돈’은 그런 가치관이 되레 그 자녀들을 참 행복에의 길보다는 되레 부정부패나 주색 같은 타락과 방탕, 안일이나 오만 등 불행의 길로 인도하지 않던가요?
병이라도 들면 큰 돈이 필요하잖아? 그럴 때 돈이 없으면 죽잖아?
물론 그런 어려움이 없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크고 작은 범사 곧 생사화복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겼다면, 병도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고 손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자들 그래서 ‘천국’을 준비한 자나 ‘소명’을 완수한 자는 되레 ‘빨리 죽어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소원이자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원함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린도후서5:8-9)
독배를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도 사형선고가 확정되자 그 법정에서 되레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오.
나는 죽고 당신들은 살아있겠지.
하지만 우리 중 누구의 앞날이 더 행복할지,
그것은 오로지 신(神)만이 알고 있소이다.-
그렇습니다.
막말로, 어제 불행하게 죽은 누군가가 오늘 세상에 살아 있는 나보다 하늘나라에서 지금 더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거지 나사로’(누가복음16:)와 ‘회개하고 죽은 행악자’(누가복음23;43)의 죽음과 이후 ‘낙원’이라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그 단적 사례입니다.
실인즉 그런 가치관이나 우주관에 열려 죽음까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대단하고 화려하다는 세상의 부귀영화도, 죽음 그 자체조차도 다 별것 아닙니다. 그래서 처참한 순교 현장이나 법정에서 자기에게 ‘죽음의 독배’를 준 가해자들조차 되레 용서할 여유를 가지게 되고, 그들 앞에서 의연하게 ‘앞날의 행복’에 대해 ‘신의 이름’으로 설파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 금세와 내세 사이의 경계조차 뛰어넘는 차원에서 보면, 과연 “우리 중 누구의 앞날이 더 행복”할까요? 분명한 것은,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그 가치관부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스스로 ‘부자’나 ‘권력자’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실패자’나 ‘죄인’이 있을 수 있고, 심지어 ‘라오디게아교회’(요한계시록3:)처럼 스스로 ‘부자 목회’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실패자’나 ‘죄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스칼의 명언을 다시 들어봅시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사도 바울을 비롯한 역대 신앙위인들의 ‘천로역정’이 그랬던 것처럼, 태생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 자기의 성정 및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 많은 사람 곧 자기가 ‘사망의 몸’이자 ‘죄인의 괴수’임을 많이 아는 사람만이 과연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어 ‘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비밀과 그 용서를 통해 또한 용서할 줄 아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저 김수환 추기경처럼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만이 남을 (많이) 용서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것이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심오한 이해이자 영(靈)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입니다. 타락한 그래서 뒤틀린 영적 관계 그 회복의 비밀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하나님과는 물론이고,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녀간이나, 이웃 내지 인간들과의 뒤틀린 모든 증오와 원수의 관계 그 회복을 위한 참 관계학이자 참 인간학이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용서’하라.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너희가
서로 ‘용서’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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