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정승 허종의 삶과 사도 바울의 삶 사이

이형선 2016. 3. 21. 12:40

 

 

주지하다시피 조선 9대 임금 성종은

왕비 한 씨가 죽자, 총애하던 후궁 윤 씨를 왕비로 삼습니다.

왕자를 낳았지만 덕이 너무 없고 투기가 심했다던 윤 씨가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까지 내는 등 그 오만불손이 극에

이르자 격노한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왕에게 그런 윤 씨를

폐위시키도록 사주 및 독촉합니다. 그러자 마침내 성종도

윤 씨 폐위를 결정하기 위해 대신들을 소집합니다.

 

당시 청렴한 선비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정승 허종(許琮). 그는 세자의 생모인 윤 씨 폐위를 도모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일이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옳은 일이 아니다 싶어 영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평소부터 남다른 혜안과 통찰력을 지녔던 그의 누님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허종이 답답한 심사를 털어놓자 누님이 크게 염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종이 집주인의 영을 어기지 못해 주인의 부인을 쫓아내버리면 뒷날 그 종이 그 아들을 섬길 때 어찌 후환이 없겠는가!”

 

네 신분은 ‘정승’이 아니고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주인을 섬기는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질 때 되레 내일 및 내세를 보는 혜안과 통찰력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님은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말라고, 폐위 사건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고 직언합니다. 그러나 현직 정승인 그의 신분상 어전회의에 불참할 수도 없는 일. 그래서 고뇌하던 허종은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다리 곧 종침교(琮沈橋)에서 ‘일부러’ 떨어져버립니다. 다리를 건너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낙상을 당한 것. 핑계 내지 명분은 충분합니다. 그렇게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 당시 대신이었던 허종의 동생 허침(許琛)은 형님과 누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어전회의에 참석은 하지만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다가 좌천을 당합니다.

 

이윽고 장성한 세자 곧 연산군이 등극한 십여 년 후,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은 ‘폐비 윤씨 사건’의 책임을 묻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터지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다 처참하게 죽습니다. 그러나 허종과 허침 형제는 무사히 살아남습니다. 그래서 그 다리를 후세 백성들은 지혜롭게 처신한 형제의 이름을 각각 한 자씩 따서 ‘종침교(琮琛橋)’라고 명명했다고 전합니다. 정승 ‘허종이 떨어진 다리’라는 의미를 살려 ‘종침교(琮沈橋)’라고 했다는 일설도 있더군요.

 

여하간 말 위에서 그것도 다리 위에서 ‘일부러’ 떨어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낙마’나 ‘추락’ 그 자체는 뼈들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취학 취업 출세 성공 등의 ‘인생의 다리’나 ‘세상의 다리’에서 떨어지거나 ‘건강의 다리’에서 떨어져 우환질고(憂患疾苦)을 당하게 되는 그 자체 역시 큰 불운이자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동양 고사의 의미가 그렇듯이 긴 안목에 열리면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 내지 다행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성공이나 배부름이나 그 자리에서의 안주가 되레 내일에의 화근이나 독이나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때론 저 정승처럼 ‘종침교’라는 ‘세상의 다리’ 내지 ‘인생의 다리’에서 ‘일부러’ 떨어질 줄 아는 지혜나 결단도 필요하고, 그래야만 되레 내일의 고통이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에게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일 및 내세까지

미리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은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태복음5: 29-30)

 

‘마태복음’에 저 말씀이 두 차례(*5장, 18장)나 반복, 강조되어 있습니다. 대내적(對內的) ‘자기결단’을 요구하는, 추상 같은 말씀입니다. 섬뜩하리만큼 무서운 말씀입니다. 단호한 ‘천국과 지옥’에의 가치관이자 그 선택입니다. 적당주의나 합리주의나 ‘미지근주의’가 전혀 아닙니다. 흑백(黑白)이나 좌우(左右) 이념적 선택보다 더 철저하고 치열해야만 하는, 생사(生死)의 선택 그 자체인 것입니다.

물론 문자적인 ‘눈’이나 ‘손’ 그 자체를 “빼어 내버리고”, “찍어 내버리라”는 말씀은 전혀 아닙니다. 오해나 곡해를 하진 맙시다. ‘눈’이나 ‘손’ 자체는 죄가 없습니다. 다만 ‘도구’일뿐입니다. 그 ‘도구’를 “실족하게 하는” 곧 “죄짓게 하는” 탐욕이나 정욕 등 그 죄악의 원인이나 동기를 단호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제거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실인즉 내 ‘백체’ 중 ‘오른손’이 ‘암’에 걸렸으면 수술대 오르는 것이 무섭고 고통스러워도 ‘오른손’을 ‘일부러’ 잘라버려야만 내가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이 전이되어 내 ‘백체’가 다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지체인 내 ‘오른손’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암’을 제거하기 위해 ‘오른손’을 절단하는 단호한 그리고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자 ‘푯대’이자 그 선택 및 지향의 진면목은 그렇게 치열하고 철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남보다 더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더 성공해서, 남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삶, 그런 이기적 내지 가족이기주의적인 ‘기복주의 신앙’ 차원에서 안주하는 그런 가치관이나 목적이나 푯대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질문에 스스로 답변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성황당에 가서 복채를 주고 성황신에게 복을 빌거나 칠성신에게 정성을 드려 복을 비는 ‘자기 소원 성취형’의 무속(巫俗)신앙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정성을 드려 복을 비는 ‘자기 소원 성취형’의 기복신앙과 서로 다른 것이 과연 무엇인가?

서로 다른 것이 없다면, 구별 내지 분별되는 삶의 가치관이나 목적이나 푯대가 없다면, 우리는 “가슴을 찢고” 충심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빌3:14)을 살았던 사도 바울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mature)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이제부터 우리가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4:13-15)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목적이자 푯대는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삶”, 오직 그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한(mature), 성화(聖化)된 신앙인격이 되는 그것입니다.

지금은 ‘고난주간’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처형’의 땅이기도 한, 저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올라가야 할 때입니다. 따라서 대내적으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절제하는 삶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 눈을 빼어 내버리고, 한 손을 찍어 내버리는”, 그런 영육(靈肉)간의 결단과 노력과 훈련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일부러’라도 바보처럼 혹은 어리석은 사람처럼 ‘섬기는 삶’을 살고자 더욱 힘써야 할 때입니다. 그럴 것이 우리가 본받으며 따라가야 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선 또한 대외적(對外的) 관계의 삶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5:38-42)

 

주님께선 저기서 ‘악한 자’에게 네 생명을 내주고, ‘너를 고발하는 자’에게 네 집문서를 내주고, ‘억지로’ 요구하는 뻔뻔한 자에게 삼천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뺨 맞는 일’이나 ‘속옷이나 겉옷’이나 ‘오 리나 십 리’ 등 사소한(?) 자존심이나 감정이나 이해타산에 연연해서 거기 사로잡히지 말고, 차라리 사소한 것에 손해를 보면서 양보를 하면서 살라는 말씀이 됩니다. 피해를 ‘일부러’ 감수하면서 보다 ‘큰믿음 큰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 됩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태생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저렇게 사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분명히 ‘바보’이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다 먼 내일에 열리고, 영원한 내세에 열린 사람들은 또한 분명히 압니다. 상대가 ‘악한’ 이웃이든, ‘지극히 작은 이웃’이든 그 모든 이웃들에게 행하는 크고 작은 모든 삶의 행위가 실인즉 자기에게 그대로 돌아오는 ‘영생(永生)의 복’(마태25:40)이 될 수도 있고, ‘영벌(永罰)의 화’(마태25:45)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또한 우리가 거듭 명심해둘 것은,

저 ‘영원한 생명’이자 ‘부활의 비밀’이자 ‘천국의 비밀’을 온전하게 알고 확신했던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이나 역대의 성인성녀들은 저런 선행적 차원의 삶에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는 그것입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제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 헌신과 희생의 삶을 “항상 기뻐하고”, 순교자의 삶 그 ‘십자가의 길’을 ‘일부러’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

 

내일의 세상을 미리 바라보는 안목에 열린 저 정승 허종은 그래서 ‘종침교’에서 ‘일부러’ 떨어질 줄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되레 내일의 심판과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영원한 내세까지 바라보는 안목을 참으로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겸손하게 ‘일부러’ 물러날 줄도 알고, 낮은 자리에 처할 줄도 알고, 알면서도 손해를 보거나 실패할 줄도 알고, 먼저 용서나 양보나 봉사할 줄도 알고, 더 나아가 헌신 및 희생할 줄도 아는 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2:20)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저 성숙한 심령의 인격이자 저 성화된 ‘그리스도 인격’이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의 진정한 삶의 목적이자 푯대입니다.

그래서 저도 늘 부러워하며 본받고 싶은, 진실로 본받고 싶은 ‘지고(至高)한 신앙인격’입니다. 결론적이자 궁극적인 인격 그 ‘완덕(完德)의 경지’입니다. 참 성공이자 영원한 성공입니다.

재물을 위시한 다른 모든 것은 세상에 버려두고 갈 부산물이자 배설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육신조차도 버려두고 갈 흙이자 티끌일 뿐입니다. 아직 살아있을 때, 아직 건강할 때, ‘불의한’ 우리의 재물이나 우리의 육신으로 선(善) 내지 사랑을 베풀며 심령의 친구를 사귀고, 이웃과의 관계를 살려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죽음의 때가 누구에게나 반드시 오듯이, 내일 및 내세에 “심은 대로 거두는” 심판의 때 역시 반드시 오기 마련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일부러 ‘가난한 자’가 되어, 그것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또한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6: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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