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적과 싸워 이기는
병법(兵法)의 고전이자 전문가이자 대가는
단연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입니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그의 저술서〈사기(史記)〉에서
대가인 저들의 명예나 신분이나 병법에 대한 유식한
앎보다는 삶 중심으로 곧 ‘행위와 시책’ 중심으로,
다만 이렇게 평가합니다.
-세상에 군사(軍事)를 말하는 자는 누구나 손자(孫子)나 오자(吳子)의 병법을 들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사기에서는 병법을 논하지 않고, 다만 이 두 사람의 행위와 시책에 대해서만 적었다.
손자는 확실히 계략이 뛰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는 것을 미리 방비하지 못했다. 오자는 무후(武候)에게 “산화의 형세도 임금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가 초나라에서 정치를 했을 때 각박하고 잔인하기가 그보다 더 할 수 없었다. 그는 제 명에 죽지도 못했다. 병법을 그처럼 잘 알았던 손자나 오자도 자기 일신상에 닥치는 일에 대해서는 그처럼 몰랐다.-
자타가 공인하는 병법의 대가로 적과 싸워 이기는 병법을 그처럼 잘 알고 잘 가르쳤던 손자나 오자는 왜 그토록 ‘자기 일신상에 닥치는 일’이나 불행 혹은 운명에는 무지했을까요?
오늘의 세상이라는 ‘전쟁터’에도 적이나 경쟁자를 이기는 각종 성공철학이나 처세술이나 경영학 등이 많이 있습니다. 성공한 전문가이자 대가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사회 모든 분야에서의 정당한 성공 자체나 그것을 위한 건전한 꿈이나 노력은 소중한 것입니다.
문제는 사회의 대표적 전문가 그룹으로 통하는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의사, 교수 등 특정 분야의 지도자나 대가가 되었다 쳐도 그 사람의 ‘행위와 시책’이 잘못되면 저 손자나 오자처럼 허무하고 무의미한 결국이나 역설적 운명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자기의 말과 행동, 앎과 삶이 일치하지 못하면 자기가 아는 것이나 말한 것이나 가르쳤던 것이 되레 자기를 비판 및 심판하는 부메랑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특정분야의 전문가나 대가가 아니다 쳐도, 세상 일반인들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더 높고 영원한 차원의 헌신적이자 도덕적인 바른 삶과 선한 삶의 세계를 선포하고 증언할 수 있어야만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런 결국에 대한 책임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 우리가 성경이나 신학에 대해 아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행위와 시책’이 일치하지 않으면 더 큰 현재적 및 종말적 비판과 심판의 부메랑에 맞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12:47-48)
우리는 재물을 위시해서 각종 복(福)을 많이 받고자 원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많이 받는 자’, ‘많이 맡은 자’, ‘많이 아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한 지식인이나 전문가나 지도자나 대가가 되길 원하고, 대형교회의 성공한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에게는 응분의 의무와 책임이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또한 명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많이 받고’,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고, ‘많이 달라’는 분이 또한 계시다는 것을 명심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사회가 아닙니다. 보다 높은 차원의 요구입니다. 사람이나 사회의 요구라면 차라리 무시하거나 소낙비 피하듯 잠시 그 여론의 땅에서 피하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하늘 아래입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시는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곧 ‘귀족 신분의 사회적 의무’의 의미가 그렇듯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신분이나 명예나 그 특권이나 기득권에는 또한 “많이 요구”하는 응분의 의무와 책임이 수반됩니다. 솔선수범해야하는 그것은 사회의 요구도 세상의 요구도 아닙니다. 그 이상의 차원인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것은 알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늘의 복이 있는 진정한 지혜이자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것은 로마에서 유래된 것도, 프랑스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성경의 말씀이자 진리에서 비롯된 격언이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왕자들은 물론이고 공주들조차 조국을 위해 전쟁일선에 참전하는 것이 예사이자 당연사인 영국왕실의 경우는 차지하더라고,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를 전혀 모르고 공맹의 유학(儒學) 혹은 도학(道學) 정도의 자연 이치나 유물론(唯物論)의 세계만 알았던 중국지도자 마오쩌둥도 친아들을 6·25 한국전쟁 일선으로 내보냈습니다. 그 후 참전한 그 아들은 전사했고 그 비보를 접한 마오쩌둥은 자국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행방이 묘연한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조차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 역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비록 적장(敵將)이지만, 저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대의멸친(大義滅親)의 구현은 높이 평가해줄 만한 ‘행위와 시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한국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애국심이나 민족애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귀족 신분’은 아니다 쳐도,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믿는다는 곧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오블리주’나 ‘이웃 사랑’이라는 공존적 인간애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저부터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을 다시금 음미하며 되씹어보게 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린도전서9:27)
그렇게 ‘올림픽’이라는 적(?)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저 ‘태릉선수촌’ 선수들처럼, 치열하게 자기와 싸우며 절제하며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
실인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원한 생명’ 그 ‘영원한 메달’의 세계에 열리면, 과연 진실로 복이 있는 자는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귀족이나 지식인이나 전문가나 대가 등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나 ‘내 아들, 내 자식, 내 편’이라는 관계나 그런 중심의 인사도 아닙니다. 그래서 비리나 부정부패조차도 너그럽게 봐주는 그런 특권이나 특혜관계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당사자인 자기 가족이나 자손은 물론이고, 공동체나 민족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가르쳐서도 안 되고 그런 모범을 보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되레 이렇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11:28)
그렇습니다.
혈육이나 ‘성모 마리아’나 특정인과의 정분이나 의리를 이기적 내지 타산적으로 지키는 자보다, 심지어 종교화 내지 의식화 내지 외식화 된 도그마나 교리를 지키는 자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학문 혹은 ‘말씀’ 열 줄 알고 한 줄 지키는 자보다, (어린아이처럼) 한 줄 알고 한 줄 지키는 자가 되레 더 복이 있습니다. 그럴 것이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는, 응분의 의무와 책임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더럽게하고 어지럽게하는 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니고, 스스로 많이 아는 유식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회에서 ‘귀족’ 내지 ‘어른’으로 성공할수록 자만이나 교만해서는 안 될 절대 필연성이기도 합니다.
‘등하불명(燈下不明)’ 곧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의 의미 역시 그렇습니다. 실인즉 ‘세상의 등(燈)’ 곧 ‘세상의 빛’이나 ‘세상의 귀족’으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남을 일방적으로 갑질하듯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나름대로 ‘글로벌’ 운운하며 밖의 세계는 밝히 그리고 멀리 잘 내다봅니다. 그런데 의외로 등잔 밑은 어둡습니다. 자기나 자기집안이나 자기집단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언처럼 비리나 부도덕한 행위까지도 너그럽게 봐주며 피차 어두워지기 십상입니다. 남과 싸워 이기는 일보다 자기와 싸워 이기는 일이 늘 더 어려운 인생 우리의 보편적 한계 때문이겠지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who controls his temper)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그것이 또한 사회적으로 성공할수록 자만 내지 교만해서는 안 될 이유이자 개연성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질이나 성질이나 감정이나 자기중심의 욕심이나 탐욕 등 이해타산을 다스리거나 이기지 못하면, 성공한 ‘귀족신분’이나 학문이 되레 자기를 보다 깊고 가혹한 종말적 심판의 음부로 인도하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는 데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처럼 “한손에 성경을, 한손에 신문을” 들고 보면, 현재적이자 실존적으로도 그것이 익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는 물론이고 자기 자녀들을 위한 참 자유의 삶이자 참 복이 있는 삶은, 때론 ‘산’처럼 크고 때론 ‘호리(毫釐)’처럼 작은 모든 범사에서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도, 혈육중심의 가족이기주의도, 실속중심의 집단이기주의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 중심으로 행하는 삶 그 자체라는 것을 재삼 확인하며 재삼 절감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12: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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