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진시황의 길과 다윗 왕의 길

이형선 2016. 7. 25. 11:14

 

 

춘추,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시황(秦始皇).

그의 나이 39세에 중원 천하를 평정했으니

과연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느 날, 위업을 성취한 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는 이미 통일되었는데 이 크나큰 업적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제왕이라는 호칭부터

 바꿔야겠소. 그대들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신하들이 의견을 개진합니다. 그 결과, ‘천황, 지황, 태황 중 가장 존엄한 태황’에서 ‘황(皇)’ 자를 따고, 공적을 기리는 오제(五帝)에서 ‘제’ 자를 따서 ‘황제(皇帝)’라고 칭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짐(朕)’이라고 칭하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나’ 곧 ‘내로다’라고 칭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지상 최고의 보좌이자 신분임을 선포한 황제는 제국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한 술 더 뜹니다.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르기로 한다.

 짐의 뒤에는 차례대로 2세, 3세라고 칭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나가도록 하라.”

 

그러나 천하통일 이후 일인자 자기중심의 절대권력을 위해 사상을 통제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정책과 국법의 엄격한 집행이라는 법치(法治)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그에 맞서 인의(仁義)를 강조하며 당시 비판적 언론 역할을 했던 다수의 유학자들을 생매장해서 죽이고 아울러 법가, 농사, 천문학 등 실용서적을 제외한 그 모든 인문학서적들을 죄다 불태워버린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을 자행하고, 만리장성이나 화려한 아방궁 등을 축조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세계와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고 찾고 그래서 먹고 마시며 영원히 살 것처럼 ‘교만(驕慢)의 길’을 가던 진시황은 지방 순시중 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기원전 210년, 그의 나이 50세였습니다.

 

일기 50세는 결코 장생도 장수도 아닙니다. 차라리 단명일 수 있습니다. 과연 장생이나 장수는 절대권력이나 화려한 재물이나 호화판 왕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불로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하나님)을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언10:27-28)

 

그래서일까요.

“천만세까지 이어나가도록 하라”는 진시황의 ‘소망’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럴 것이 그 후 시황제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인 호해가 2세로 등극하지만 권력다툼을 일삼던 신하들로 인해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면서 각지에서 반란세력들이 들고일어납니다.

그런 반진(反秦)세력 중 두각을 나타내던 초의 귀족출신 항우(項羽)와 평민출신 유방(劉邦)의 싸움에서 대세가 유방 쪽으로 기울면서, 그 와중에 황제 2세도 일찍 죽임을 당함으로써 진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저 ‘위대한 왕조’의 역사가 불과 15년 만에 끝장나고 만 것입니다.

 

한편,

일개 목동(牧童) 출신으로

이스라엘 12지파 통일왕국의 왕이 되고,

그 후 근동에서 막강한 왕국을 건설했던 다윗 왕.

기원전 900년대를 살았던 그는 그가 성취한

모든 위업에 대한 영광과 ‘승전가’를 저 진시황처럼

‘내로다’를 구가하며 인간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그 실재와 현존을

익히 알았고 믿었던 그는 그래서 모든 영광을 이렇게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립니다.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仁慈)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사무엘하22:)

 

막강한 왕국의 권좌에 앉았지만,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던 자기의 그 모든 인생여정에 ‘함께 하시어’ 인도해주신, ‘왕중왕’ 곧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열린 ‘영의 눈(靈眼)’으로, 때론 “원수들에게서 이끌어내시고” 때론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 인간 개인의 운명이나 그 역사는 물론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 곧 이방국가들이라는 국가 간의 운명이나 그 역사까지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익히 보았고 익히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 왕에게 오늘의 성공이나 왕좌는 오직 하나님의 ‘큰 구원’이자 ‘인자(仁慈)를 베푸심’이자 ‘지켜주시는 보존’의 결과였을 뿐입니다. 그런 신앙인격과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겸손의 길’이 곧 그의 인생관이자 가치관이자 역사관이자 세계관이자 우주관이었던 것입니다.

 

저 ‘인자(仁慈)’ 곧 구약성경 히브리어 ‘헤세드’는 ‘사랑, 긍휼, 자비, 은혜’ 등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와 가장 근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저 모든 다윗의 감사와 찬양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신약시대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린도전서15:10)라고 집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나 왕 된 것’도, ‘나의 나 신하 된 것’도, ‘나의 나 사도이자 종 된 것’도, ‘나의 나 그리스도인 된 것’도, ‘나의 나 오늘 살아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이자 자비이자 긍휼 때문입니다.

 

타의(他意)에 의해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그 ‘타의의 주인(*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이 부르시면 오늘 당장이라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은” 인생, 차라리 ‘벌레’ 같고 흙이나 티끌 같은 인생 내가 잘난 때문도 아니고, 내 머리, 내 손의 대단한 능력이나 수고나 노력 때문도 아니고, 내 의로움, 내 선행, 내 수행, 내 공적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의 그런 인생관 내지 가치관 내지 역사관 곧 ‘신앙사관(信仰史觀)’에서 다윗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나아가 후손 내지 후학들에게도 진실로 복이 있는 ‘참 겸손의 삶’이 나왔고, 백성 내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섬기는 ‘참 섬김의 삶’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앎과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겸손한 삶이 아울러 이웃 내지 백성과 그 은혜를 함께 나누는 앎과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겸손한 삶을 낳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은혜가 더 큰 은혜를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5:5)

 

예나 지금이나 ‘이른 비, 늦은 비’라는 ‘은혜’는 다 하늘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으려면 ‘자기’라는 심령의 그릇을 부인하고 비워야만합니다. 자기를 고집하는, 실인즉 별것도 아닌 자기의 영적교만이나 지적교만이나 신분이나 물질 같은 소유적 교만이 담긴 그릇에는 그 담긴 ‘교만의 분량’ 만큼 분명히 은혜의 비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성령의 단비’는 여일하게 내리지만 ‘자기(自己)’라는 교만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비우고 낮아질수록 ‘은혜의 분량’은 되레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하늘에서 ‘이른 비, 늦은 비’라는 ‘단비’가 내리는 이유가 인간 우리가 의롭게 살고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까? 우리의 공로나 공적 때문입니까? 저 ‘히말라야의 수행자’처럼 기이한 금욕 고행을 했기 때문입니까? 물론 다 아닙니다. 햇빛도 비도, 의로운 자나 악한 자 위에 다 공평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곧 ‘사랑이자 긍휼이자 자비이자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보는 눈과 들을 귀’ 곧 ‘영의 눈(靈眼)’과 ‘영의 귀(靈耳)’가 열려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저 모든 은혜를 은혜로 알고 받으며 “살아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자기가 진 신세를 부인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하고,

 그 신세를 감추는 사람도 배은망덕하며,

 그 신세를 잊어버린 사람은 더욱 배은망덕하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진 신세’ 내지 ‘받은바 은혜’를 은혜로 알지도 못하고 숫제 잊어버린 사람이 실인즉 가장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런 사업일수록, 그런 제국일수록 다 끝이 안 좋더라고요. 저 진시황이나 진나라의 운명이나 그 ‘교만의 길’의 끝이 불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끝까지 간직한 다윗 왕은 70세에 죽었지만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왕국은, 물론 피차 죄와 허물들이 있기 마련인 인간들의 세계인지라 파란곡절이 많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거세고 험한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살아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민족’이지만 그 이름도, 구속사(救贖史)라는 그 민족 내지 왕국의 역사도 건재합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 스스로 선포하는 전적 증언이자 명백한 증명이기도 합니다.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 그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 중심까지도 훤히 통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교만한 자’인지 진정으로 ‘겸손한 자’인지 훤히 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겸손’을 노래하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다고 해서 과연 다 진실한 겸손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도자이자 ‘경건한 신앙인’ 신분이었던 ‘바리새인들의 교만’이 그랬던 것처럼 정작 무서운 것은 내적 교만 곧 영적(靈的) 교만이나 지적(知的) 교만이나 신분적 교만입니다.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이웃 내지 인간과의 모든 관계를 서로 섬기게 하기는커녕 되레 양극화시키고 차별화시키고 적대화시킵니다. 그래서 인간 개개인도 백성도 국가조차도 갈등과 분쟁과 파멸의 길 내지 소용돌이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인’ 곧 신앙인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일수록 더욱더 저 ’교만의 길‘ 내지 세상의 길과 그 허무한 결말에서 보다 겸손하게, 보다 큰 교훈과 책임을 반면교사로 배우고 느껴야할 이유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plunder)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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