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하늘을 향해 날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이형선 2016. 8. 8. 09:47



-독수리 새끼가 날 수 있을 만큼 깃털이 자랐지만 아직도 그 푹신푹신한 둥지에서 늑장부리기 좋아할 때, 어미는 그 둥지를 어지럽힌다. ‘독수리가 그 둥지를 어지럽게 하며’(신명기32:11), 그래서 독수리는 새끼에게 날기를 가르친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성숙시키기 위하여 지었던 둥지를 어떻게 뜯어내는지에 주목하라. 어미는 그 새끼가 둥지를 떠나서 햇빛이 비치는 드높은 창공을 날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둥지의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뜯어낸다. 만약 그래도 새끼가 둥지를 떠나지 못하면 그 둥지를 아주 허물어지게 한다. 그러면 새끼들은 날든지 그렇지 않으면 떨어지든지 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도 우리를 다루신다.

하나님은 이 땅을 쉴 곳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성향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믿음의 날개로 하늘을 향해 날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위로를 좋아하고, 거기에 어리석게 매달리는 것을 보실 때마다 이 땅의 위로를 거듭 제거하신다.-

 

                                                 

                                                                                            -브록크- 

 

 

 


과연 진정한 지도자의 마음은, 한마디로 어버이의 마음이자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미독수리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이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지도자이자 선지자인 모세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막말로, 우선 먹고살기는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면서 그대로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출애굽 한다고 해서, 내일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집도 없고, 가꿀 수 있는 내 땅한 평도 없습니다. 이성적 내지 1+1=2라는 산술적 차원에서 내일을 보면,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전망뿐입니다. 따라서 이나 흙수저라는 팔자나 운명 타령을 하면서 애굽 땅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것이 차라리 편하게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는 길일 수 있습니다.

 


실인즉 그런 미련 때문에,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갈라지는 초월적 기적의 체험이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한 한달 후 황무지인 신 광야에 이르러 애굽에서 가지고 왔던 양식이 다 떨어지자 이렇게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하나님)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16:3)

 


인간적 내지 산술적으로 보면, 과연 그런 원망과 불평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러나 산 속에 있을 때는 그 누구도 산 전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산을 넘은 후 먼눈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하늘 아래 있는 산 전체가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그렇듯 인생의 광야 여정이나 그 하나님의 섭리도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합니다. 때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먼눈(遠視) 내지 영안(靈眼)을 가진 이 후에는알게 됩니다. 또한 이 후에는알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13:7)

 


자기와 자기 후손들을 위한 삶의 길 그 선택에 있어서,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그대로 종살이하면서 고기와 떡을 얻어먹고 사는 삶이 더 좋았을까요? 아니면 광야에서 방황을 하더라도, 어버이세대의 희생이나 죽음조차도 감수하며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훈련과 연단을 받더라도, 출애굽 한 삶이 더 좋았을까요? 그 답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이 후에는 알리라.”

 


그런 우리 인생 여정에서,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보금자리를 아주 허물어트리는 절망적 사건들은 무엇일까요? 떡이나 고기? 취업실패? 사업실패? 질병 등의 우환? 이혼?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의 사별?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남모를 사연과 아픔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신앙사관에 열리면 저 모든 고난과 고통의 문제들은, 하나님의 종브록크의 표현처럼 우리들에게 믿음의 날개로 하늘을 향해 날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시는어미독수리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이자 그 섭리인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생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간결하고 적확한 해답이자 참 지혜입니다.

 


그 단적 사례로, 우리는 러시아 문호 솔제니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소련 시대 포병장교로 근무하던 27살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무심코 썼던 독재자 스탈린에 대한 사소한 비판의 글이 화근이 되어 체포당한 솔제니친. 그 후 그는 8년 동안이나 강제수용소에서 모진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스탈린이 죽은 후 수용소에서 석방은 되지만 그러나 다시 3년 동안이나 외지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11년 동안이나 체제악(體制惡) 내지 구조악(構造惡)에 의해 자기의 둥지가 철저하게 유린당해서 철저하게 허물어져버린 강제수용소의 생활이었지만 그는 그 절망의 세월 속에서, 사망의 골짜기같은 밑바닥에서 되레 거듭납니다. 기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체험과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믿음의 날개로 하늘을 향해 나는세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후 교사이자 작가가 된 그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수용소군도등 주목할 만한 명작을 발표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지만 그러나 반역죄를 저지른 반체제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합니다. 미국에서 20년 동안이나 망명생활을 하다가 구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 의해 복권되어 노년에 조국으로 돌아간 그는 조국 땅에서 200810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만, 그런 그가 강제수용소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또한 그래서 자유로웠다.”

 


자유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발에 차꼬가 채인 채 빌립보의 깊은 감옥’(사도행전16:)에 갇힌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그 감옥에서 되레 기도하고 찬양했던’, 그리고 모든 순교자들이 감옥에서 되레 기도하며 감사했던, 그런 속사람의 자유이자 진리가 주는 자유이자 그리스도의 자유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여정의 모든 사건 속에는 잃은 것이 있으면 또한 얻은 것이 있고, ‘얻은 것이 있으면 또한 잃은 것이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재산을 잃어도, 심지어 건강을 잃어도 얻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의 의미가 그런 것처럼 오늘 무엇을 얻었다고 해서 너무 우쭐하거나 교만할 것도 없고, 무엇을 잃었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거나 비관 내지 절망할 것도 없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이성이나 상식이나 산술에 의하면, 목전의 이익이자 행복인 오늘의 보금자리를 잘 지켜주는 그 섭리가 이자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한 복이자 사랑일까요? 그 답 역시 불문가지입니다. “이 후에는 네가 알리라.”

 


따라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이자 우리 개개인의 인생 역사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라는 호불호(好不好)의 차원을 떠나서, 우리의 인생선배들이자 신앙선배들인 저들의 산 경험을 때론 정면교사로 때론 반면교사로 삼아 참 지혜와 참 진리를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복 있는 심령에의 열림이 그래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출애굽해서 사십년 광야생활을 거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과정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특정 선민이나 외국인의 인생 여정만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우리 모두의 인생 여정입니다. 이중적(二重的)으로 언급된 고도의 계시적 내지 문학적 메타포와 상징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홍해에서 물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금세 거룩한 신앙인격,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광야의 훈련과 연단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고린도후서4:16), 연단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후, ‘행인과 나그네인 우리의 속사람요단강이라는 죽음의 세계를 건너 가나안 땅이라는 본향이자 영원한 하늘나라(天國)로 날아가게 됩니다.



물론 금세와 내세를 포함한, 그런 이중적 구원의 인생 여정을 알고 믿는다는 저를 포함한 우리 역시 현실적으로 크게 어렵고 괴로운 고난의 문제에 잡히거나 한계상황에 이르면, 때론 회의도 낙심도 하고 때론 원망과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주목할 것은, 원망 불평을 하거나 낙심하거나 겁을 먹거나 게을러서 불순종한 세월이 길수록 광야에서의 고달픈 훈련과 연단의 세월도 비례해서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사랑의 하나님이자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은, “(원망하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는(민수기14:28)” 분이기 때문입니다.

 


비밀을 아는 어미독수리는 그래서 오늘 다그치듯 사랑하는 새끼들에게 양자택일을 차라리 강요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날든지 그렇지 않으면 떨어지든지 할 수밖에 없는양자택일의 길.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좁은 문큰 문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이자 길일 수도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태복음7:13~14)

 


물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험한 세상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새끼의 염려이자 불안일 뿐입니다. 아직 미약해서 하늘을 날지 못하고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조차 어미독수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떨어지는 새끼를 아래서 구원하고자(understand)’ 이미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일개 날짐승인 어미독수리에게조차 그런 마음과 지혜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그것이야 오죽이나 더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10:13)     

 


그렇습니다. 시험이나 고난이 없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시험이 없으면 바퀴벌레나 닭처럼 날개가 있어도 날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땅이라는 세상에 안주해서 백년을 살다 허무하게 죽을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처럼 33년을 살다죽더라도 하늘 내지 천국을 나는 삶과 그 가치를 택할 것이냐?

선택의 문제(to be or not to be)’는 물론 인생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인생 우리의 길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참 사랑을 위해 매를 들 수도 있고, 시험 당함을 허락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되고’, ‘하늘의 복이 있는영원한 구원에의 길이 된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는 혹은 자랑하며안주하는, 세상 내지 땅의 각종 소유이자 탐욕일 수 있는 내 둥지내 아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러나 만고의 비밀이자 진리는 뼛속까지 비운 가볍고 단순한 몸일수록 더 높은 하늘을 더 자유롭게 날 수 있다는 그것입니다.

현재적으로 그 비밀을 알고 높은 하늘(sky)’을 나는 성숙한 독수리도, 진리를 알고 높은 천국(heaven)’을 나는 성숙한 인생도, 참 복이자 하늘의 복이 있는 피조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사람도 독수리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삶의 여정은 분명히 같으니까요. ‘빈손의 여정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10:58)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노숙자로 살라는 말씀일까요? 집도 없이 가난하게 살라는 가르침 그 자체의 강조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집 없는 설움’, 얼마나 크던가요? 주님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왜 둥지를 아주 허물어지게하실까요? 스스로 해체하신 것일까요?

인생이 진실로 집착해야 할 곳이나 것은 내 둥지내 굴이나 내 집이라는 세상 소유 그것이 아니고, ‘심령의 날개믿음의 날개로 하늘(天國)을 향해 나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친히 보여주신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말씀 이상의 말씀이자 행위적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작 소중한 우선의 순위이자 영원한 가치이자 절대재산이자 보물(寶物)인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집착하고 그것을 먼저 소유하라는 것. 실로 하늘을 나는 성숙한 독수리양식이나 이 없어서 죽는 일은 없었습니다.



'날개를 가진' 독수리의 눈에는 물론이고 참새의 눈에조차도,  땅 위의 사자나 호랑이나 대형고릴라나 대형건물 등은 다 별것 아닙니다. 가치관이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선망 내지 앙망하며 희구하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영장'이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날개를 달고 있으면서도,  땅의 일에만 연연하는 자나 자기네 둥지에 집착하는 자는 그래서 과연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자기나 자기 집안이나 자기 집단이 되레 불행해집니다

그럴 것이 하늘나라(天國)’라는 보물은 그것을 보물로 그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자들에게 비로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참 복이 될 수 있으니까요. ‘고려청자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들은 한낱 안방의 요강으로 사용할 뿐이고, ‘진주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한낱 골목의 구슬로 사용할 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정도인.

 


그럼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날아야 할 하늘이자 푯대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 내지 말씀의 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과연 생명 그 자체이자 생존 그 자체일까요? 아니면 한낱 땅 내지 세상의 직업이나 학문이나 철학이나 윤리도덕, 내 소원 성취나  정서적 위안을 얻기위한 수단 정도일 뿐일까요? 후자라면, 오늘의 푹신푹신한 둥지를 '축복'이라고 고집하며 거기 집착하는 저 유치한 새끼독수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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