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처칠의 친구'와 '하나님의 친구'

이형선 2016. 8. 22. 09:51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지만 보어 전쟁(Boer War)

곧 남아프리카 전쟁에 모닝포스트지 기자로

종군했다가 포로가 되었고, 거기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일약 유명해졌던 윈스턴 처칠.

 


그는 그 후 정치에 입문하지만 총선거에서 낙선합니다. 그런 2년 후이자 49세 때인 1924, 보수당 소속으로 나서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아울러 그 해 재무장관으로 입각하지만 정책집행과정에서 노동당의 극렬한 반대와 노동자 총동맹파업이라는 소요까지 초래하였던 그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즘에 대한 당시 영국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정책을 비판하면서 사직을 합니다. 사실상 정부로부터 파면을 당한 셈입니다.

당시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허무함이 그렇듯이 그동안 오가던 수많은 친구라는 위인들의 발길도 다 끊어지고 맙니다. 그는 그렇게 이후 십년 동안이나 일개 필부로 집필활동만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무렵, 해학과 독설로 유명했던 문호 버너드 쇼가 처칠에게 우편물을 한 통 보냅니다. 버너드 쇼의 최신작품 첫 공연에의 초대권 두 장과 간략한 서신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초대권 두 장을 보내드립니다. 한 장은 귀하를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장은 만일 아직도 귀하에게 친구가 있다면 그 분을 위해서입니다.

당시 동행할 친구가 없었던, ‘외로운 처칠은 역시 재치가 있어서 그 초대권을 정중하게 돌려보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귀하의 초연에는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다음 기회에 공연이 있다면 그때 다시 두 장의 초대권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처칠은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부의 부름을 받아 해군장관으로 나가고, 1940년 체임벌린이 사임 후 수상으로까지 올라 강력한 지도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재기해서 두 차례나 수상을 지냈던 정계의 실세인 처칠의 친구들은 다시 많아졌고, 그래서 모르긴 몰라도 저 버너드 쇼의 작품 공연도 누군가 친구와 함께 관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수많은 그 친구들이 과연 진정한 친구, 그것이겠지요?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계시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my friend) 아브라함의 자손아.-(이사야41;8)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을 나의 벗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저 히브리어 오하비나의 사랑하는 자, 연애하는 자, 사모하는 자라는 그 의미처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만, 그래서 나의 벗, 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저 수상 처칠의 친구가 아닙니다. ‘재벌의 친구명사의 친구도 아닙니다. 그 이상인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지극히 고상한 신분이자 영원한 친구의 신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신분은 세상의 권력자나 재벌이나 전문가 그룹의 지식인 등 소수만 누릴 수 있는 그런 귀족 신분이 아닙니다. 평범한 인생 우리 모두가, 되레 가난하고 비천한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신분입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되레 세상에서 실패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 등 죄인들의 친구이자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나의 친구론을 다시 들어봅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한복음15:12~14)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이자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길은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로 성공해서 내로라 군림하는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해박한 지식인이 되는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례 요한처럼 기이한 고행이나 수행을 하는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이나 부자가 되는 능력이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나 죽은 자를 살리는신령한 능력 그 자체에 성공의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 인격이나 성공의 목적은 오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내지 거룩한 사랑내지 섬기는 사랑의 관계에 있다는 것. 그럴 것이 저기서 언급된 사랑이라는 헬라어가 다 신적 사랑내지 거룩한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로 명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인즉 자기나 자기 가족이나, 자기 마음이나 배짱에 맞는 사람이나 이성(異性)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를 포함해서 누구나 다 할 줄 압니다. 처칠의 친구들도, 무신론이나 진화론의 친구들도, 돈이나 권력의 친구들도 다 할 줄 압니다. ‘세리이방인도 심지어 금수(禽獸)조차도 그런 사랑은 치열하게 되레 더 잘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5:46~47)

 


그렇습니다. 그것이 늘 부끄러운 우리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참 복이 있는’, ‘나와 우리라는 사회 내지 공동체를 위한 분명한 숙제는, ‘세리이방인보다 더하는 사랑’, ‘더 나은 배려가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적인 우리네 사랑이나 문안보다 더 나은’, 이타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이자 아버지(하나님)의 사랑에 다시금 주목해봅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누가복음6:35~36)

 


과연 그렇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심지어 원수에게까지도 햇빛과 비를 함께 내리시는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은혜이자 자비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심령적이자 인격적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한복음15:)는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또한 포도열매가 절로 맺히기 마련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라는 의미가 숙성되면 나는 사랑나무요라는 의미가 됩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사랑나무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그러면 또한 사랑의 열매가 절로 맺히기 마련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건 한마디로 병든 가지라는 반증이자 병든 그리스도인이라는 반증이 됩니다. 한 술 더 떠 되레 악한 열매를 맺었다면, 대로변에서 하늘을 향해 날마다 주여-, 주여-” 했더라도 그건 실인즉 참 그리스도의 가지가 아니었다는 정체성 및 진면목의 자기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7:20)

 


신앙의 나이테가 늘어갈수록 더해가는 저의 고민이자 우리의 고민이자 오늘 한국교회의 고민이 거기 있습니다. 또한 거기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것이 오늘의 기독교 신앙풍토의 열매를 보자면, ‘그리스도의 친구들보다는 각종 실속이나 이권을 탐하는 세상의 친구들이 더 많다 싶기 때문입니다.

과연 개인도 교회도 사회도 배가 부를수록탐욕이나 정욕이나 야심은 되레 더 커집니다. 이 자본주의 내지 물질주의 시대에서 이나 이 되지 못하는 것들은 정녕 다 무가치한 것일까요? 그것은 경제동물 선언에 진배없는 것 아닌가요?

분명한 것은 그것이 참 구원의 세계도 참 행복의 사회도 아니고, 참 가치도 참 진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성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나 선한 양심이 날로 황폐해지는 시대의 비극 앞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역설적 의미가 되레 심오하게 들려지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역시 죄성(罪性)과 욕심을 가진 저를 포함한 인간 우리들의 사랑이나 인자자비나 그 열매, 하나님의 그것처럼 온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저런 하나님의 마음이자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사랑을 본받아 보다 큰 믿음, 보다 큰 사랑을 흉내라도 내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 그 자체를 하나님은 또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페어플레이상을 받은 여자 육상 선수들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육상 경기 도중 서로 뒤엉켜 넘어진 미국 여자 육상선수 애비 디아고스티노와 뉴질랜드의 니키 햄블린은 서로 숙명적으로 승리를 다퉈야하는 경쟁자였습니다. 그러나 넘어져 부상당한 선수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그 후 그들은 서로 도우면서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그래서 두 선수는 이제 서로 사랑하는 친구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금메달획득이라는 승부욕이나 소유욕을 버린, ‘마음이 가난한 자들만이 되레 가질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유형의 인간미이자 여유 아닐까요?

 


물론 스포츠 마당에서 금메달이라는 피와 땀의 열매를 거둔 선수들의 보람은 응당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세상의 금메달이라는 소유나 명예보다 선수 자기는 물론이고 지구촌이라는 인류를 더 복되게 살리는 생명이자 가치는 실인즉 선한 마음이자 선한 인간미입니다. 영원한 심령의 금메달을 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가페의 금메달을 따라고 역설하시는 것도, 리우 올림픽이 저들에게 금메달보다 더 값진 페어플레이상을 수여한 것도 다 그런 이유이자 필연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저 역시 세상 내지 인생을 살아볼수록 과연 거룩한 용서거룩한 섬김거룩한 사랑이 있는 심령의 상태(狀態) 내지 장소(場所) 그 자체가 바로 현재적 천국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진실로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고한 관계의 명제이자 절대 명제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친구이자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회복의 문제이자 신앙인격관계의 문제 그것이 세상에 온 인간이 진실로 풀고 돌아가야 할, ‘본향(本鄕)’종말적 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 최고의 숙제이자 학문이자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지식이자 참 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연 누구의 친구들일까요? ‘처칠의 친구’? ‘재벌의 친구’? ‘검사장의 친구‘? ’니체의 친구’? ‘찰스 다윈의 친구’? ‘개똥이의 친구

아니면, ‘친구가 아예 없는 가난하고 고독한 신세라고요? 그래도 비관하거나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친구나 사람을 의지하면 의지하는 그만큼 언젠가는 무너짐의 고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도 크게 당하기 마련입니다. 멀어지거나 헤어지지 않을 인생도 없고, 허무하게 죽지 않을 인생도 친구도 부모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저 자신부터가 태생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이기적인 동물이자 간사한 동물이자 죽어야할 운명이라는 실존적 한계와 모순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신을 당했어도,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어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대범함도 필요합니다. ‘원수악한 놈이니 배은망덕한 놈이니 운운하며 침 뱉기보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처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으려니 하는 그리스도의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는 어차피 태생적으로 나도 너도 죄인이고 원수배은망덕한 놈이기 때문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offense)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언19:11)    


한편으론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의 시류나 감정을 따라 요동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처럼 의연하게 살다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허무한 풍향이나 한계나 이해타산에 따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친구를 사귀어야만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해도 실패해도, 부해도 가난해도, 건강해도 병들고 노쇠해도 변하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영원한 친구이자 영원한 동행을 사귀어야만합니다. 오늘도 살아계신하나님의 친구이자 부활해서 살아계신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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