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이념'이나 '허무주의'를 넘어서

이형선 2016. 9. 5. 10:27



‘20세기 최고의 전쟁소설이라고 평가받는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냉혹한 살상이 자행되는 세계 일차대전. 그 전쟁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당한 미군장교 프레드릭를 찾아간 신부는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에게 이렇게 권유합니다.

하나님을 꼭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중위님이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무신론자일 수 있는 프레드릭이 이렇게 받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제까지도 늘 행복했고요.”

그것과는 다른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손에 넣어보지

 않으면 그 진가를 모릅니다.“ 

 


그런 신부에게 프레드릭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만일 내가 어떤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역시 그것과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무의미한 전쟁 내지 세상에서 구원과 행복에의 길은 아가페라고 말하는 신부에게 프레드릭은 에로스로 답하고 또한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프레드릭은 과연 병상에서 알게 된 영국군 간호사 케서린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전체주의 내지 제국주의의 산물인 전쟁이냐? 개인주의적 추구일 수 있는 사랑이냐? 프레드릭은 후자를 택합니다. 전선에서 탈영, 케서린과 스위스로 도피한 것. 부조리한 전쟁이나 명분이나 죽음 대신 현실적 구원을 택한 것입니다. 물론 그 구원은 캐서린과의 에로스’, 그 사랑의 행각이었고 적어도 그들은 스위스에서 행복했습니다. 기성세대가 일으킨 패권전쟁에 거역 내지 저항하는 잃어버린 세대이자 젊은 연인들의 이유 있는 항변 그 승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저 제목에 걸맞게 행복했던 4의 스위스 도피생활이자 밀월여행에서 작품을 끝냈으면 좋을 텐데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거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5‘, 산고(産苦)를 앓다가 운명하는 케서린의 죽음에서 허무하게 끝을 맺습니다. ’···(캐서린의 주검) 그것은 마치 조상(彫像)을 보고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하얀 석고상을 보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과 같은 절망적 허무함. 전쟁 중에 죽은 전우의 그것과 캐서린의 그것은 무엇이 다를까요? 후자에게서 느끼는 허무함이 되레 더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최고 작가 헤밍웨이의 '허무주의( Nihilism)'입니다. 그것이 또한 행동하라 그리고 나서 말하라던 당대 지성 헤밍웨이의 모든 작품에 흐르는 인간과 사랑 그리고 삶 곧 세상살이에 대한 이해의 끝입니다.

한마디로 솔로몬의 인생후기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 그런 허무주의와 같은 성격의 고백일 수 있습니다. 허무한 전쟁 내지 허무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해 캐서린과 치열하게 사랑도 행동도 했지만 그것조차도 끝이 허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레드릭은 아니 헤밍웨이는 인생후기에 의사이자 사냥을 좋아하는 등 와일드한 기질이었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음악을 좋아하며 신앙심이 좋았던 그의 어머니를 회상하며, 지난날 부상병으로 있던 병상에서 신부와 나눈 저 대화를 다시금 깊이 음미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꼭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중위님이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제까지도 늘 행복했고요.”

그것과는 다른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손에 넣어보지

 않으면 그 진가를 모릅니다.“ 

물론 헤밍웨이는 기질이나 취향이 아버지 쪽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20세기 최고작가라는 저명인사가 된 헤밍웨이는 그래서 되레 그것과는 다른 행복이자 참 행복을 끝내 소유하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한 채, 그의 나이 29살 때 권총 자살했던 그의 아버지처럼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62세였습니다. 혈통적 내지 운명적 사슬을 끊지 못하고, 거기서 거듭나지 못하고 비극적인 종언을 고한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할수록, 영성(靈性)의 비밀에 열려질수록, 혈통적 내지 가계적(家系的)으로 불행한 사람일수록 그 운명적 사슬 내지 부정적 사슬 내지 악순환의 사슬을 끓고 거듭나야 할필연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저도 중학교 일학년 때 일시에 부모님을 여읜 사람입니다만, 청소년기에 입은 허무한 그 트라우마가 운명적 사슬 같은 잠재의식이 되어 저에게 알게 모르게 허무주의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익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범위를 넓히면 운명적 사슬은 인생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연좌성입니다. 태생적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 내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죄인이라는 정체성 자체부터가 그렇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인생 여정의 필연성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 인생 이해의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rest)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11:29~30)


안식이 바로 신부가 프레드릭 중위에게 권했던 그것과는 다른 행복이자 그것과는 다른 안식입니다. 안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있는 아울러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righteousness)와 평강(peace)과 희락(joy)’(로마서14:17)’이자 자유(free)’(요한복음8:32)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허무주의도 이기는,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이자 복된 소식(福音)’ 그 자체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 안식 저 행복은 인간 자기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 등 세상 소유가 많을수록 되레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낙타바늘귀로 들어가고자 애써도 그것이 어렵듯이,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구원의 문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할 수도 없고 구원의 길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궁에서 빈손으로 나오고, 죽어서 하늘나라 갈 때 역시 빈손으로 가는 것도 같은 이치이지요. 가진 '내 것'이 많을수록 자궁에서 나오기 어렵습니다. 되레 '산모'까지 죽게 만듭니다.

 


물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믿지 않아도, 저 프레드릭 중위나 저 헤밍웨이처럼 한세상 살다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 캐서린의 삶이나 죽음도, 헤밍웨이의 대단한 삶이나 죽음도, ‘마치 조상(彫像)을 보고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허무한 것이었다는 그 종말적 진실 자체는 인생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인생의 체험적 세상 현실 앞에서, 잘나가던 한때 세속적으로 타락하기도 했고 그래서 인생후기에 극심한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지혜자솔로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문호헤밍웨이와는 달리 후대 인생들을 위해 짐짓 이런 체험적 고백이자 말씀을 남겼습니다. 어느 쪽이 진정으로 복이 있는 지혜일까요?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랑이자 이웃 사랑이라는 참 인간애에 가까운 삶의 모습이자 가치일까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하나님)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12:1~2)

 


그렇습니다.

청년의 때에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같은 이념이나 학문이나 유토피아, 진보나 보수, 전쟁이나 사랑을 논하는 것도 좋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는 것도 좋습니다. 보수주의에도 진보주의에도, 여당에도 야당에도, 나에게도 너에게도, 다 나름대로의 의()나 선()은 있고 그래서 명분이나 이론도 있습니다. 자유나 시장경제나 성장을 주장하는 자본주의나 보수진영에도, 평등이나 분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진보진영에도, 심지어 허무주의에도 다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언하신 바처럼 최고선(最高善)이자 절대선(絶對善)이자 최고의(最高義)이자 절대의(絶對義)오직 하나님 한 분’(누가복음18:19)이라는 데 있습니다.

보수도 진보도, 나도 너도, 서로 옳고 서로 선하다고 치고 받으며 싸우다가도 어둡기 전에’, ‘비구름이 다시 일기 전에’, 참 의(righteousness)이자 참 선(good)오직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하고, 겸허하게 회개하고 기도하며 서로 심령의 지평을 넓혀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도, ‘전무후무한 지혜자솔로몬도 그래서 기도하며 그렇게 겸허하게 살았는데, 오늘 우리의 삶이 미천한 자기 세계만 고집 내지 주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유치한 교만이자 유치한 독선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이 신실하다고 해서 곤고한 날이 이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돈독했던 사도들을 위시한 모든 신앙위인들은 곤고한 날로 점철된 인생 여정을 살다갔습니다. 자원해서 형극의 길, 순교의 길을 가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당대의 이념이나 곤고한 날에 회의(懷疑)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아니하고, 포퓰리즘 같은 시대의 정치 논리나 경제 논리나 '부자 논리'에 휘둘리지도 아니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사도 바울처럼 그 모든 것의 주인이자 창조주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되레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데살로니가전서5:16~18), 험난한 삶의 여정을 여유 있게 살다갈 수 있었던 삶의 비결이자 인생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그 해답이자 비밀은 한마디로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해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처럼 믿고 내세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세(來世)를 준비하는 삶’, 실인즉 거기서 되레 보다 건전하고 보다 복이 있고 보다 가치 있는 내일(來日) 내지 금세(今世)의 소망이나 삶도 얻어집니다. 그 열매처럼 그 은총처럼 얻어집니다.

영성(靈性)의 비밀을 알았던 신앙위인들은 그래서 금세에서 살아도 기뻐하고, 죽어도 기뻐하고’, ‘살아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하는삶을,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역설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편으론 어리석은 사람의 길내지 바보의 길을 의연하게 간, 대표적 신앙위인인 사도 바울의 체험적 고백이자 확신을 다시 들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린도전서1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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