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희망 만들기, '하늘을 나는 말'

이형선 2016. 9. 12. 09:54



최근에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는,  

향후 5년 안에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의 발전으로 인해 선진경제국들에서 약 5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더군요.

산업혁명 때처럼 기술발전이 비즈니스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를 선포한 것입니다.

 


일자리가 사라질수록 실업자나 비정규직은 양산되고 그래서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라는 양극화의 골이나 갈등은 더욱 심화되겠지요. 하긴 청년들의 취업문제나 빈부 양극화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사회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이른바 삼포세대, 인간관계와 집에 대한 포기를 더해서 오포세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칠포세대니 하며 스스로 일컫는 자조적인 표현들이 그것을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꿈과 희망은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시대나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아니던가요? 625전쟁의 폐허와 굶주림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오늘의 한국을 일으키고,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낸 어버이 세대의 꿈과 희망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유태인의 고전에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민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의 대략인즉, 시쳇말로 괘씸죄(?)에 걸려 왕의 노여움을 크게 산 신하가 왕에게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렇게 위기이자 절망에 처한 신하는 그래도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끝나도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신하는 왕에게 엉뚱한 제의를 합니다. 나름대로의 꿈과 희망 만들기일 수 있습니다.

“1년 동안만 여유를 주시면 임금님께서 애지중지하시는 말이 하늘을 날도록 가르치겠습니다.

 ··· 일 년이 지나도 말이 하늘을 날지 않으면 그땐 사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황당한 제안이었지만 그 성사여부에 호기심이 동한 왕은 1년 후 말이 하늘을 날지 못하면 그때 죽이겠다며 그 신하를 살려줍니다. 당장의 죽음은 모면했다지만 기존 죄수들조차도 그 신하의 터무니없는 제의의 허황됨을 꾸짖습니다. 죄다 상식선에서 부정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말이 하늘을 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그들에게 그 신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 년 이내에 왕이 죽을지도 모르고,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또한 임금님의 말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일 년 안에 일어날 미래의 일을 누가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일 년이 지나면 말이 하늘을 날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6:34)

 


어떤 극한의 위기나 역경, 고난에 처해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유태인들, 나라도 없는 디아스포라(離散民) 신세로 이쳔 년 이상의 세월을 떠돌던 유태인들의 낙관적이자 긍정적인 저런 유형의 꿈과 희망 만들기는 주지하다시피 다 성경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럴 것이 조상들 곧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요단강을 두 쪽으로 갈라 길을 내시고, 황무지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때론 나병이나 죽은 자까지도 살리셨던 하나님. 그런 조물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역사와 섭리를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저 왕의 말이 선지자 엘리야가 임종(臨終)할 때 불수레와 불말들(horses of fire)’을 타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승천했다는 기록에 언급된 그런 말처럼 하늘을 나는 말이 되지 못하란 법도 없다 싶었을 터이니까요.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임금님의 말내 말네 말하늘을 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세상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만 임금님의 말도 내 말도 네 말도 하늘을 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참 희망이자 영원한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갑자기 나타난)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열왕기하2:11) 

 


그런 저런 성경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믿는 사람은 과연 그 어떤 위기나 곤경에서도 초자연적이자 초세상적인 꿈이나 희망,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인 또한 유태인들이 저 나치스 히틀러 치하의 홀로코스트그 참혹한 대학살현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여유이자 지혜이자 지식이자 자산일 것입니다.

 


따라서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며’, ‘홍해가 가로막혀 있다, ‘요단강이 가로막혀 있다, 보이는 건 죄다 광야뿐이다, 그렇게 낙망 내지 절망 일색에 빠져 삼포세대오포세대칠포세대니 하며 자조하는 것도 바람직한 지혜는 분명 아닙니다. ‘4차 산업혁명아니 ‘5차 산업혁명이 온다쳐도, ‘비움과 낮아짐의 자리섬기는 일자리는 늘 곁에 있고 도처에 있기 마련이니까요.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언22:13)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선

또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9)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자는 과연 복이 있습니다. 그렇듯 희망을 만드는 자(hopemaker)’ 역시 복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참 희망은 저 이 사내에게 허락한 ‘1이라는 한계나 고용인이 계약직 직원에게 허락한 ‘1이라는 기한 같은 그런 불안한 시힌부 희망과는 다를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달라야만 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왕 중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많으신 긍휼이라는 은혜(恩惠)로 허락하신 영원한 희망이 될 때, 비로소 인생의 모든 절망적 고난과 죽음조차도 능히 인내하며 이길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을 바꾸자면,

오직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임금님의 말내 말네 말하늘을 나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할그래서 하나님과 기도 내지 간구 내지 대화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할 영적 관계성 그 회복의 절대 필요성이 거기 있습니다. 그것을 산 소망내지 산 희망이라고 표현했던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in his great mercy)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living hope)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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