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과연 지진의
안전지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지진에 대한 위험이나 두려움을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 ‘천년고도’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을 통해 ‘재앙의 세력’이 우리나라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 및 절감해야 했습니다.
‘관측 이후 최대 규모 지진’이라는 5·8 규모의 지진이라고 했는데, 문화재 파손 등 도시가 입은 피해도 피해이지만 그쪽 부근에 다수 위치한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에도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싶어 더욱 염려가 됩니다.
또한 최근에 북한에선 공교롭게도 핵실험을 자행했던 바로 그 ‘함경북도’ 지방에서, 북쪽 표현 그대로 ‘해방 후 처음 있는 대재앙’인 ‘최악의 홍수’가 발생했더군요. 마을 전체가 잠기면서 500명 이상이 실종 및 사망하고, 피해주민이 무려 14만 명에 이른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국제사회를 향해 공식적인 구호요청을 했더군요. 심지어 적대관계 내지 긴장관계에 있는 미국에게까지 도움의 손을 벌렸더군요. 설마 그렇게 해서 들어온 구호물품까지 빼돌려 ‘핵무기’를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요?
남한과 북한의 정치권력체제를 막론하고, 기독교를 포함한 여타 종교 및 사회의 기득권 풍토를 막론하고, 소수 권력자나 지도자들의 완악한 자기 교만이나 집단 내지 무력 중심의 패역, 물신(物神) 중심으로 지나치게 세속화된 타락상 등의 ‘구조악’이나 ‘시대의 악’으로 인해 저 무고한 경주시민들이나 저 함경북도 주민들이 ‘희생양’처럼 애꿎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재앙’이라는 국가적 사건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이자 경고인즉 이랬으니까요.
-또 실로암에서 망대(tower)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13:4~5)
그렇습니다.
저 예언의 말씀이 또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이후 ‘회개’하기는커녕 되레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던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성은 AD. 70년 로마황제 디도(Titus) 장군의 발아래 짓밟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시 그것을 미리 보고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성을 보고 우시며’ 탄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애가이자 예언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은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이니라.-(누가복음19:42~44)
저 예루살렘성이나 성전은 로마에 의해 임명된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시 ‘46년’ 동안에 걸쳐 지은 건물로, 특히 성전(聖殿)은 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이 헤롯 치세 중 제일가는 업적으로 평가할 만큼 장엄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건물이나 문명이나 문화도 참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기에 곧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에 처참하게 짓밟혀 폐허가 되고만 것입니다.
오늘의 ‘평양성’이나 ‘서울성’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역사의 주인’이신 곧 구속사(救贖史) 중심으로 세속사(世俗史)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참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면, ‘평양성’이나 ‘서울성’의 미래 역시 저 ‘예루살렘성’처럼 폐허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 것입니다. 남과 북, 우리 모두가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보다 겸손한 자세로 ‘평화에 관한 일’을 모색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본주의 문명인 ‘바벨탑’도, ‘실로암 망대’나 ‘다보탑’ 같은 문화재도 인생들의 삶이자 역사인지라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때론 주먹 싸움이나 첨단과학인 핵무기나 미사일 혹은 ‘사드(THAAD)’ 등을 믿고 피차 적대 내지 공방하며 싸우는 설전이나 패권 싸움도 응당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 모든 것들도 천재지변(天災地變)이라는 ‘대재앙’ 앞에서는 죄다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생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세속사의 전쟁은 물론이고 자연의 천재지변 내지 대재앙조차도 때론 허락하시고 때론 잠재우시는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역시 인생인 특정 지도자나 ‘실로암 망대’나 ‘핵이나 미사일’ 같은 물질세계나 유물론(唯物論) 그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그 영적(靈的)세계의 실재와 현존을 체험적으로 익히 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래서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하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백성이나 인민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 역시 먼저 심령을 ‘회개’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다’는 헬라어 ‘메타노에오’는 ‘방향을 바꾸다’는 의미입니다. 마음도, 길도, 삶의 방향도, 체제나 민족 생존의 방향도 “바꾸라”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사람 중심의 삶에서, 권력이나 재물이나 탐욕 중심의 삶에서, 핵이나 미사일 같은 패권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물론 회개 여부는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의 소관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이 ‘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내가 망하고, 바로 당신이 망합니다. 남한이 망하고, 북한이 망합니다. 함께 다 망합니다. 남의 일이 결코 아닙니다.
교만해서는 안 될 필연성도 거기 있습니다. 남북은 물론이고 보수나 진보 등 남남 갈등의 주체들이 먼저 ‘우리의 죄, 우리의 허물’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 포용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들을 귀’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재삼 명심해둡시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따라서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발생한 ‘해방 후 처음 있는 대재앙’의 의미는 한마디로,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자 경고로 대변 및 집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몰랐던 그래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근대사의 학살자 히틀러나 스탈린 등은 그만큼 그 최후 또한 비참했습니다.
‘조폭(組暴)’의 정체성이 그런 것처럼 실인즉 ‘미련한’ 저 북의 ‘김씨왕조’ 역시 ‘회개하지 아니하면’ 머잖아 그와 같이 망할 것입니다. 숙제이자 고민은 ‘미련한 조폭’과 맞붙어 ‘미련하게’ 싸우다가는 남쪽 역시 함께 망할 수 있다는, 거기 있겠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fear)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1:7)
과연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또한 ‘생존의 근본’입니다. 개인적 생존의 근본이자 또한 국가적 생존의 근본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길도, 상생의 지혜와 지식도, ‘내 중심’이나 ‘네 중심’에서 산출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자 가치인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중심에서 산출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어느 한쪽이 인간 자기나 자기 패권을 ‘경외하는’ 제왕적 중심이나 정신병적 집착 내지 오판에 빠짐으로 인해 동족상잔의 핵전쟁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일선의 젊은 군인들은 물론이고 남녀노소 민간인들 역시 구별 없이 ‘평양성’이나 ‘서울성’ 전체가 통째로 떼죽음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에 관한 일’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한반도의 남과 북 우리 모두에게 ‘설마가 사람을 잡아버린’ 발등의 문제이자 응급실 중환자의 생존의 문제처럼 이미 부과되어 있습니다. ‘참 평화에 관한 일’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는 날‘이라는 그 비밀한 은혜에 열려, 그 섭리 그 간섭 그 도우심을 열심히 구하고 찾아야할 당위성이 거기 있습니다. 그것이 국가적 민족적 사명인 것처럼 열심히 기도해야할 필연성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언하신 바처럼, ‘참새 한 마리의 삶과 죽음’(마태복음10:29)조차도 창조주 하나님의 보살핌이나 허락 여부에 따라 좌우되고 결정되는, 비밀한 섭리 안에 있으니까요. 하물며 민족적 혹은 국가적 ‘대재앙’이나 ‘핵전쟁’ 등의 참상에 있어서랴! 전쟁 당시의 정황에서 성공률이 5000분의 1이었다는, 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의 '기적 같은' 성공이나 승리도 다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꾸준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보다 더 좋은 생각이자 더 좋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고, ‘평화에 관한 일’도 ‘크고 비밀한 일’도 능히 보여주신다고 곳곳에서 약속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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