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삼국 중 가장 약한 신라였지만,
외교술이 뛰어났던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신라 장군 김유신.
21세기의 김춘추와 김유신이 어서 나와,
‘남북통일’이 평화롭게 이루어지고,
그래서 열차를 타고 저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와 유럽
등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김유신 장군. 그는 뛰어난 무술도 무술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혜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가야 곧 금관국의 왕손이긴 했지만 신라에 의해 망한 지 이미 오래된 가야인지라 늘 홀대를 받는 일개 화랑출신일 뿐이었습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당시 신라 사회에서 귀족계급 곧 성골과 진골이 아니면 높은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니까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등에 ‘일곱별 무늬’를 가지고 태어난, 그래서인지 ‘삼국통일’이라는 남다른 꿈과 희망과 포부를 품고 살았던 김유신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진골(眞骨) 신분인 김춘추와 한 집안이 되고자 하는 계획을 품고, 정월 대보름날 김춘추를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김유신은 넓은 마당에서 축국(蹴鞠)놀이 곧 공차기를 즐기다가 마침내 실수한 척하며 김춘추의 당의(唐衣)를 발로 힘껏 밟습니다. 그러자 김춘추의 옷이 찢어지고 맙니다.
옷차림새가 풀어져 난처하게 된 김춘추. 김유신은 미안한 마음을 토로하며 김춘추를 짐짓 집안으로 인도해서 여동생인 보희를 방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찢어진 옷을 좀 꿰매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때 수줍은 성격이자 부덕(婦德)을 중히 여겨 외간 남자와의 접촉을 피한 보희는 그런 이유를 들어 오빠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김유신은 보희의 동생인 문희를 대신 방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오빠의 부탁을 받은 문희는 대범하고 적극적인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남달리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선지 쾌히 응하며 김춘추의 옷을 정성껏 꿰매줍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김춘추와 문희는 당시 사회신분상 서로 혼인하기 어려운 사이였지만 임신까지 하게 되고, 그래서 얽힌 위험과 사회적 제약을 마침내 다 이기고 선덕여왕의 배려에 의해 정식으로 혼인한 부부까지 됩니다.
그 후 계승할 왕자를 두지 못한 채 선덕여왕 후임인 진덕여왕 역시 승하하자, 진골인 김춘추는 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이 되고 그 후 8년 동안 치리하며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초석을 이루고 59세에 승하합니다. 물론 덩달아 왕비가 된 문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훗날의 문무왕 곧 태자 법민(法敏)을 위시해서 다복한 자녀까지 슬하에 둡니다.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저 ‘왕비 자리’의 원래 주인은 언니 보희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어느 날 밤중에 보희가 꿈을 꿉니다. 보희가 경주 남산에서 오줌을 누자 경주 고을 전체가 오줌으로 뒤덮여 바다처럼 되어버리는 꿈이었습니다. 부덕을 중히 여긴 보희로선 여자의 몸으로 남산에서 ‘오줌 누는 꿈’이 적잖이 야릇하고 망측한 꿈이다 싶었겠지요. ‘좋지 않은 꿈’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한 보희는 그 꿈 얘기를 동생 문희에게 들려줍니다.
이방나라 애급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 애급에서 권력서열 이인자인 실세 총리까지 되었던 ‘성경 속의 인물, 요셉’처럼 꿈을 해석하는 남다른 지혜(창세기40:8)가 문희에게도 있었던 것일까요. 문희는 그것이 경주와 나라를 바다처럼 태평케 하는 길몽임을 금세 알아채고 ‘좋은 꿈’이라고 언니에게 말해줍니다만, 부정적 사고에 사로잡힌 언니는 허황한(?) 아우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문희는 이렇게 요구합니다.
“언니, 그 꿈을 나에게 파시오.”
“무엇으로 내 꿈을 사겠느냐?”
“제 비단치마를 드리겠어요.”
그렇게 보희는 별 미련도 생각도 없이 자기 꿈 내지 복(福)을 팔아버리고, 내일 내지 ‘꿈의 계시’를 미리 읽는 지혜가 있었던 문희는 곧 자기 치마 앞자락을 벌려 언니의 꿈을 삽니다. 그 후, 김춘추의 아내가 되고 왕비가 된 것입니다.
한편,
성경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을 때, 쌍둥이이자 사냥꾼인 형 에서가 ‘심히 피곤한’ 몸으로 들에서 돌아옵니다. 너무 배가 고팠던 형이 그 팥죽을 요구하자 그때 야곱이 형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birthright)을 오늘 내게 팔라.-
그러자 형 에서는 ‘한 끼의 별식’인 ‘떡과 팥죽’을 얻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산 자’이자 ‘믿음의 조상’이자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과 이삭’ 집안의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립니다. 육신의 순간적 욕망 내지 욕구를 위해, 돈 몇 푼을 위해, 세상 재물이나 권력 몇 근을 위해, ‘하나님의 자녀’ 내지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듭난’ 신분이자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영혼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세기15:32-34)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난 집안의 ‘장자의 명분’이라는 영혼의 가치, 진리의 가치를 여타 범사에서 늘 그렇게 ‘가볍게 여기고’ 팔아버린, 현실주의 내지 실속주의자(?)인 에서는 그래서 되레 그 자신도 그 후손들도 역시 실패한 인생들이 되고 맙니다. 그 후예들이 ‘에돔’이라는 민족을 형성하지만 야곱의 후예들이 이룬 ‘이스라엘’과는 달리 저 에돔은 오래가지 못하고 인류 역사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영(靈)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天國)의 말씀 그 진리성 내지 계시성의 절대가치를 알지 못하고 가볍게 팔아버리면, 죽은 후 지옥에 가니까 불행한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 ‘지금 여기서’부터, 육신 ‘지금 여기서’부터 불행해지니까 역사적 불행이자 절대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 인생 우리가 우선 먹기는, 별미인 ‘팥죽’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도, 심지어 세상의 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실리(實利)보다 명분(名分)입니다. 눈앞의 실리보다 명분의 생명이 늘 더 길기 때문입니다. ‘뇌물’이나 ‘성상납’이나 ‘비리’보다 ‘길이요 진리’라는 ‘정의의 명분’ 그 생명이 늘 더 긴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 진가(眞價)를 진가로 알아보지 못하고 형 에서가 헤프게 팔아버린 저 ‘장자의 명분’은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현실의 삶 사이, 하나님과 재물 사이, ‘말씀’과 ‘떡’ 사이 등에서의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탐욕이나 정욕이라는 각종 ‘떡’이나 재물이나 이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그 진리 그 정의 그 가치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얼마나 헤프게 팔아버렸을까요? 그리고 팔아먹고 있는 중일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국은 우리가 선택하고 심은 그대로 거둔다는 그것이겠지요. 금세에서든 내세에서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선택하고 심은 그대로 거둔다는 그것!
따라서 이웃을 살리고 민족을 살린 저 문희와 저 야곱이 각각 ‘먼저’ 선택하고 심은 ‘오줌 누는 꿈’이나 ‘장자의 명분’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온 누리에 복이 있는 꿈이자 명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숙제로 남는 것은, 인생인 나도 너도 고달픈 세상 현실 내지 감정 내지 사욕에 사로잡혀 심령의 눈이 어두워지면, 한 끼 ‘팥죽’이나 한 자락 ‘비단치마’에도 ‘참 복의 비밀’ 그 자체인 ‘명분’이나 ‘꿈’을 팔아버릴 수 있다는 거기 있겠지요. 저 장녀 보희나 저 장자 에서는 ‘장녀’ 혹은 ‘장자’라는 세상 신분이나 기득권에 안주했기에 그것이 안이하고 미련한 ’교만’이 되어, 주어진 자기의 ‘참 복’조차 되레 ‘가볍게 여기고 팔아버린’ 어리석음을 자행했던 것은 아닐까요?
여하간 세상살이에서 시험은 오늘도 내일도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생 우리가 돌아서서 한탄하며 가슴을 칠 때는 늘 이미 늦은 시간이자 공간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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