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로 통하는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망신’을 시킨다 싶은 그의 끊이지 않는
막말과 성적 스캔들로 인해 최근엔 대중적
인기나 선호도가 연일 추락하고 있더군요.
주지하다시피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미국 내 보수파나
기독교 복음주의계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입니다.
그런데도 정치인도 아닌 호텔 골프장 카지노 등을 운영하는
‘부동산 재벌’이라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까지 된 데는,
일자리와 관련된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불만이 많은 국민들
심중에서 꿈틀대고 있던 ‘미국우선주의’를 거침없는 ‘막말’로
표출한 그것이 한편으론 되레 먹혀들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더군요.
저런 정치현상은 ‘심령의 등불’ 내지 ‘교회의 등불’이 어두워지면 결국엔 대중적 국민 개개인의 가치관도, 국가의 가치관도, ‘미국우선주의’ 같은 ‘자기중심주의’ 내지 ‘집단이기주의’에 빠지고 만다는 반증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우드브리지(John D. Woodbridge)는 일찍이 단편적인 글에서 위험한 수준에 다다른 ‘미국의 자기중심주의’를 우려하며 아래와 같이 갈파했었으니까요.
-오늘의 사회에서는 날로 개인의 권리만이 주장되고 있다. ···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모든 물건들은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웃은 자기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관념은 미국 문화의 심장부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 불꽃은 진로에 방해가 되는 것이면 모조리 삼켜버린다.
··· 자아 성취라는 복음이 미국사회를 홍수처럼 뒤덮고 있다.
··· 오늘날 미국에 자기중심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자기의 삶만을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며 이웃의 고통과 결핍에 대해서 망각할 우려가 있다. 또한 은혜라는 미명 하에 교만과 성적 불결과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을 과소평가할 우려가 있다.
자아 성취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본뜬 번지르르한 위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겐 무의식적으로 거짓복음의 가치를 과대평가할 우려가 있다.-
실로 그렇습니다.
막바지에 다다른 이번 미국 대선 레이스를 통해 외국인인 우리도 미 국민들의 그런 성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문화의 심장부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고’, ‘미국사회를 홍수처럼 뒤덮고 있는’ 관념이나 가치관의 적나라한 표출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발등의 불’ 문제는 저 미국의 문제가 아닌, 저 미국의 ‘자기중심주의’나 ‘자아 성취 복음’이라는 ‘거짓복음’이 또한 우리 한국교회 및 사회의 현상으로 이미 문제화되어있다는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교회도 한국교회도 갈수록 ‘바르고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되레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은 국력이나 청교도 조상들에 의해 전승된 복음주의적 신앙양심세력의 뿌리나 저력이 깊어서 아직은 잘 굴러갑니다. 상대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에 낀, 기초체력도 국력도 저력도 약한 우리 한국이나 신앙의 뿌리도 약한 한국교회는 그래서 더더욱 생존 자체의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명언처럼 영혼이 없는 민족, 심령이 죽은 민족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 대한 해법을 ‘자아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서 찾은 저 신학자 존 우드브리지의 이어지는 지론을 함께 숙고해봅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위해 희생하고자 노력한다. 온갖 사사로운 변덕을 충족시키는 데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데서 자기실현을 구한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해법은 거창하고 어려운 이론이나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나 재물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번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성경 말씀 그대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삶, 그것을 위한 노력에 있습니다.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동료나 가난한 자나 병든 자 등 그 모든 ‘이웃’이 곧 오늘 우리가 섬겨야할 ‘그리스도’이니까요. 사도 바울도 그래서 모든 이웃을 대할 때 “주님께 하듯이 하라”고 누차 당부했던 것입니다.
참 인간애(人間愛)나 참 민족애(民族愛)는 과연 그런 구현을 통해 비로소 형성됩니다. 따라서 ‘자아 성취’와 ‘하나님의 뜻(God’s will)의 성취’는 밝히 구별되고 분별되어야 합니다. 세상 내 야망이나 내 욕심의 성취가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내 뜻, 내 일’의 성공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의 성공은 분명히 그 ‘열매’ 또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God’s will)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저 ‘분별하다’는 헬라어 ‘도키마조’는 ‘시험하다, 증명하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본래적 의미가 ‘순금이냐 가짜 금이냐, 순은이냐 가짜 은이냐’ 그것을 시험하고 분별하고 증명할 수 있어야한다는 데서 유래된 언어입니다. 그런데도 육신을 가진 우리는 늘 ‘세속화’에 더 익숙합니다. 저 존 우드브리지가 갈파한 그대로 ‘위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겐 무의식적으로 거짓복음의 가치를 과대평가할 우려가 있습니다.’
‘말씀’보다는 현실의 ‘떡’이나 ‘번영’이나 ‘대형건물’이나 과시적인 ‘성취’나 ‘성공’이 늘 더 가깝고 부럽기 때문이겠지요. 심령의 축복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 축복이, 천국 내지 내세의 축복보다는 금세의 축복이 늘 더 가깝고 부럽기 때문이겠지요.
또한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모범을 통해 ‘분별하다’의 진면목을 다시금 확인해봅시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죽음의 잔’을 목전에 두고 드리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그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의 득실(得失) 정도의 문제도, 진학이나 취업이나 연애나 결혼이나 사업이나 승진이나 목회의 성패(成敗) 정도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게 무위로 끝장나는, 생사(生死) 자체 문제에서의 ‘분별’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but as you will).-(마태복음26:39)
저 기도, 저 선택, 저 삶이 과연 ‘순금’의 가치이자 진정한 복음(福音)이자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우리의 부활도, 가정이나 공동체나 국가를 포함해서 그 후손이나 후대를 위한 진정한 축복도 오직 저기서 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늘 직면하기 마련인 시험의 현장에서, 선택의 현장에서,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내 뜻’을 ‘아버지의 뜻’인 양 왜곡하고 ‘십자가(고난) 없는 복음’을 선포하는 영적 지도자나 목자는 ‘거짓목자’이거나 ‘삯꾼목자’이거나 ‘이단 교주’입니다. 그 자체가 미혹이자 교만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자하는 자에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뜻있게 살고자 하는 자에겐, 고난이나 고독 같은 ‘자기 십자가’가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당이나 야당, 보수파나 진보파를 막론하고, 정치 내지 사회지도자들 역시 자기 뜻이나 이론이나 학문이나 이념을 절대가치이자 절대진리인 양 주장하고 선포한다면 그들 역시 ‘거짓지도자’이자 ‘삯군지도자’들입니다. 그 자체가 미혹이자 교만입니다. 오늘 옳다는 ‘내 뜻’이나 ‘네 뜻’은 내일이면 틀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대단했던 학자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공산주의 이론’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박물관’으로 가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날 번창을 구가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었던’ 유럽 대다수의 교회 건물 역시 오늘날엔 ‘박물관’이 되어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청교도들의 후예’라는 복음의 뿌리가 아직 살아있는 미국은 제국주의적 타락과 온갖 성적 스캔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건재합니다. 그런 현상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이자 섭리이자 간섭의 결과라고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 저 ‘복 있는 믿음의 조상들’ 덕분이자, 성적 타락 등 온갖 죄악으로 만연했던 ‘소돔성’조차 거기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내가 (그) 열 명을 위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창세기18:32)라고 천명하셨던 하나님의 말씀 그 계시의 현재적 증명이자 증언이 되니까요.
따라서 당대의 자기는 물론이고 후대의 자손이나 백성들을 위해, 예나 지금이나 역사 속에서 성령(聖靈)을 통해 계시(啓示)하시는 하나님, 성경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대의(大義)를 먼저 구하고 찾는 고민이 있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한편,
삼십여 년 전 일입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견학과 구도(求道)차 강원도 태백 산골에 소재한 ‘예수원(Jesus Abbey)’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원 설립자이신 고(故) 토리(Torrey) 성공회 신부님께서 함께 대화를 나누던 좌중에게 했던 말씀 중, 왠지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말씀 한 마디가 있습니다.
당시 토리 신부님은 ‘예수원 증축(?) 문제’로 관할관청에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당직원과 문제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고, 그것이 부당하다 싶어 결국엔 노기를 띠고 언쟁까지 벌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문제는 ‘내 뜻대로’ 잘 해결되었는데 그러나 보다 큰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영 마음이 언짢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하셨는데, 당시의 심경을 그분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내 일은 잘되었는데, 하나님의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자아 성취‘ 곧 자기중심주의적인 ‘내 일’이 잘되어도, ‘하나님의 일’이 잘못되면 결국엔 실패가 됩니다. 오늘 ‘성공’ 내지 ‘번영’해도 긴 안목으로 보면 되레 그것이 슬픈 일, 불행한 일이 됩니다. 크고 작은 범사에서 오늘 내가 손해를 보고, 오늘 내가 오해를 받고, 오늘 내가 고통을 당하더라도, ‘내 뜻, 내 일’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을 먼저 구하고 찾아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르고 선한 일‘, ’섬기는 일‘에 힘쓰며 살아야 할 필연성도 과연 거기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축복도 행복도 때가 되면, 오래 참으면, ’이른 비 늦은 비‘라는 단비의 은혜나 계시가 그런 것처럼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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