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심청전'에 나타난 '자기 십자가'와 '부활 사상'

이형선 2016. 10. 24. 10:45



우리 민족의 전래적 사상이나 민속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고전 심청전은 주지하다시피

저자도 연대도 미상인 조선시대 소설입니다.

유교의 효(), 불교의 예불(禮佛), ‘옥황상제

용궁같은 도교 및 무속신앙까지 혼합시켜,

현실세계와 환상세계, 죽음과 재생 내지 부활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엮어서 민초들의 설화적이자 전설적인

희망과 미덕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각각의 종교에는 고유의 특성이나 법리가 있기 마련인데

저런 혼합신앙적 세계가 무리 없이 읽혀지는 것은

그것이 소설이라는 문학의 효용성 때문이겠지만,

고려, 조선 등 각 왕조시대와 부침(浮沈)을 함께 했던

종교들에 의해 형성된 그런 혼합적이자 다원적인

종교성이나 사고방식이 우리 민족의 저변에

알게 모르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각설하고,

저는 저 심청전의 저자가 성경의 비밀이나

핵심을 또한 이미 알고 있었던 분 같다(?) 싶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통해 저 심청전을 일별해보고 싶습니다.

심청전에 나오는 심봉사는 질병을 앓은 후 시력을 잃은 후천적 시각장애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험한 세상살이에서 시력을 잃었다는 것은 치명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신체적 맹인이 자주 등장합니다만, 그런 표현은 또한 인생 우리는 죄다 타락한 조상에게서 혈통적으로 이어받은 태생적인 원죄나 후천적인 자기 죄악과 허물 등으로 인해 소통의 관계가 막혀있어서 영적 세계 곧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현존을 볼 수 없는 영적 맹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한마디로 맹인은 곧 죄인이라는 의미의 은유적이자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우리 모두의 정체성 역시 심봉사인 것입니다. 그런 심봉사구원의 과정을 계속해서 살펴봅시다.

 


공양미 삼백 석을 불전에 시주하면 눈을 떠서 보리라몽운사 화주승의 말을 믿고, 효녀 심청이는 자기 몸을 뱃사람들이 구하는 공양미 삼백 석인당수 제물로 팝니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한 대속(代贖)의 값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진 경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련한 공양미 삼백 석몽운사로 보낸 후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집니다. ‘공양미 삼백 석이라는 혹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일만 달란트라는 인간 우리 각자 내지 저 봉사심학규의 대속(代贖)의 값을 마련하고자 효녀 심청이는 그렇게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희생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자 그 효심을 아주 가상하게 여기신 옥황상제께서

사해 용왕에게 이렇게 하교하십니다.

효녀 심낭자를 옥정 연화 꽃봉오리 속에,

 아무쪼록 고이 모셔 오던 길 인당수로 도로 내보내어라.”

 


비교적으로, 성경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경우인데,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사명을 주십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그러니까 악독을 회개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럴 것이 저 동쪽 큰 성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입니다. 어서 망하기를 고대하고 있는 판국인데, 원수 같은 저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라니? 편협한 선민의식이나 속 좁은 애국심같은 국수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요나는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히 외면하고 서쪽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배삯을 주고 배에 오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지중해 그 바다에서 큰 파도를 일으켜 그 배가 파선 지경에 이르도록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집요한 간섭인 것을 이내 알아차린 선지자 요나는 뱃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청해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요나1:12)       

 


그렇게 스스로 제물이 되어 바다에 던져진 선지자 요나는 그러나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 a great fish)를 예비하사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던요나는 절망의 처소일 수 있는 그 '무덤'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큰 물고기에게 요나를 도로 토해내라고 하교하십니다. 고통과 절망의 처소가 되레 요나를 거듭나게 한 '자궁'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요나2:10)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온 요나아니 심청이, 황후가 죽은 후 수심이 깊은 왕 곧 대국의 천자앞에 황후의 기상으로 현신합니다. 그렇게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청이는 황후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이 되지만 거기 안주하지 않습니다. ‘불쌍하신 우리 아버지를 오매불망 그리다가 마침내 천자께 미천한 자기의 기구한 사연을 사실대로 아뢰며 간구합니다.

천지 인간 병신 중 소경이 제일 불쌍하오니,

 통촉하시고 천하에 영을 내리시어 맹인들을 불러올려

 음식을 내리시면 소첩의 천륜을 찾을 수 있을까 하나이다.”           

 


그래서 대대적인 맹인연회(盲人宴會)’가 열립니다. ‘영의 눈이 어두운 모든 맹인들을 부르는 천국의 큰 잔치이자 부활잔치일 수 있다 싶습니다.

이때 심학규는 몽운사 부처가 영험이 없었는지, 딸 잃고 쌀 잃고 눈도 뜨지 못해 지금껏 심봉사는 봉사 그대로 지냈었다.’

그런 심학규는 부활한 심청을 만난 자리에서, 15년 만의 해후인 잔치자리에서 비로소 눈을 뜹니다.

아버지, 제가 물에 빠진 심청이옵니다. 심청이 살았으니 어서 급히 눈을 드시고 딸의 얼굴을 보옵소서.”

순간 심봉사의 두 눈이 번쩍 뜨여 ··· 천지가 환하게 밝아졌다.’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심봉사공양미 삼백 석이라는 거액의 몸값이자 제물을 몽운사에 시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는 대목입니다. 거액의 시주헌금도 좋다지만, 그 자체로 인해 자만할 것도 교만할 것도 없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자체에서 참 구원이자 영원한 구원이 오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되레 외동딸마저 잃은 한()을 안고 살았던 심봉사의 구원은 부활한 심청이와의 만남 곧 인간관계의 회복을 통해서 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애증이나 이해타산에 얽힌 모든 인간 내지 이웃과의 관계의 구원도 과연 그렇듯 거듭난 인격과의 만남 그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 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 필요하다는 그것입니다. ‘옥황상제께서 자기 십자가를 진 심청이의 그 효심을 아주 기특하게 여기사 용왕에게 하교하여부활을 허락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심청이는 황후로 성공한 이후에도 불쌍한 아버지나 소외된 지극히 작은 자들 곧 맹인들에 대한 그 효심 그 관심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으로, 죄악으로 가득차서 사십 일이 지나면멸망할 운명에 처한 큰 성 니느웨성의 구원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뇌물에서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큰 물고기 뱃속그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요나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역시 회개한, ‘니느웨 백성이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베옷을 입고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는 회개의 삶에서 왔습니다. 그렇게 거듭난 인격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데서 부활같은 구원이 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연계시차원의 지혜인 저 소설 심청전이나 특별계시차원의 지혜인 저 요나서등에 나타난 저 모든 자기 십자가부활 사상에 관한 비유나 상징이나 계시의 궁극적 성취와 실현은, 역사적으로 온전하게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한 역사에 의해 사흘 만에 부활하였고, 그 후 사십일 동안이나 세상에 계시며 제자들이 그 부활을 보고 만지며체험적으로 확신할 수 있도록 증명하시다가 승천(昇天)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늘나라(天國)와 세상이 하나로 열린 것입니다. 내세와 금세가 하나로 통하는 참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로 통하는 참 구원의 길이 역사적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충만했던 사도 바울의 통찰력 깊은 계시 내지 역사 이해를 그대로 빌리자면, 유태민족이 그동안 구약시대의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아래 살면서 참 구원자인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처럼, 우리 민족도 그동안 유교나 불교나 도교나 무속종교나 조선시대의 심청전이라는 몽학선생아래 살면서 부활을 온전하게 성취한 참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 역사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적으로 법치(法治) 아래서 강조되는 '대한민국의 실정법' 역시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형법이나 민법 등의 실정법으로 거듭난 인격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한 인간성이나 민족성, 인간애나 민족애가 성숙 및 고양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을 위해서도 공동체나 국가를 위해서도 그 이상의 가치와 비전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참 구원과 참 공의와 참 사랑을 위한 하나님의 진리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啓示)된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초등교사, schoolmaster)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3:23~24)

 


구약성경의 율법이나 저 심청전이나 동서양 각종 종교의 교리가 서로 다른 언어나 표현 등을 통해 지향 및 희구하고 대망하던 그 구원자 그리스도가 이천년 전에 마침내 세상의 중앙(배꼽)’인 저 이스라엘 땅에 왔습니다. 우리 조선 땅에는 공식적으로 이백여 년 전에 왔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큰 잔치’(누가복음14:16)는 이미 벌어진 바, ‘인간 내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이자 인격적으로 제대로 만난 심봉사라면 이제 두 눈을 번쩍뜰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가 환하게 밝아질것입니다. 천지도 자기도 이웃도 만물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새롭게 다시 보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구원 사역이자 천국의 큰 잔치이자 사랑의 큰 잔치는 여타 종교의 도그나마 상상력도 아니고, 허구인 소설도 아니고, 막연한 희구도 아닌,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실현된 대속(代贖)의 사건이자 죽음조차도 이긴 부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lt is finished)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19:30)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 테테레스타이의 원형동사 텔레오바치다, 마치다, 완성하다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다 바치고, 다 마치고, 다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운명인 인간 우리들의 죗값을, ‘심봉사인 인간 우리들의 죗값을 대신 다 치루고,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응답하신 사흘 후의 부활이 그 절대적 증명이자 역사적 증명입니다.

굳게 닫힌 문이라는 세상 상식이나 이성이나 논리의 한계조차 초월한 채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현현에 대한 많은 증언들 중 한 구절을 다시금 음미해봅시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있는)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한복음20:19~20)

 


한편,

예나 지금이나 어떤 목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만을 강조하며, 우리는 이제 믿고 복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기복(祈福) 위주의 값싼 은혜, 값싼 복음'만을 설파하던데 그것은 이기심이나 욕심을 고양시키는 위험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속화라는 오늘 한국교회의 만성병폐질환도 거기서 유래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계에는 이단(異端) 논쟁이 늘 많은데, 물론 건전한 교리도 중요하니까 성경 말씀에서 빗나간 이단은 의당 분별해야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정작 경계해야 할 교묘한 그래서 되레 무서운 이단은 제도권 내지 기득권 안에서 양의 탈을 쓰고 자행하는사리사욕이나 성적 타락 등의 죄악과 그것을 태연하게 합리화시키는 뻔뻔함이나 무례함, 그것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십자가가 없는 세상중심적인 삶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선 친히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은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38~39)

 


과연 그렇습니다.

서양의 명언처럼 “No Cross No Crown”입니다.

십자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에콰도르 선교사 짐 엘리엇이 남긴 고백처럼,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사는 법 또한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사도 바울은,

순교 당하는 죽음을 앞에 둔 사역 말년에 제자이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I have finished)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4:7~8)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말씀 중 마쳤다는 헬라원어 역시 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기록인 텔레오와 같은 동사입니다. ‘자기 몫의 십자가그 소명 내지 사역을 위해 다 바치고, 다 마치고, 다 이루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고백이자 담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런 사도 바울을 본받아,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와 복된 부활 사상의 인과를 굳게 믿고,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신앙양심이자 신앙인격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