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성탄의 '종소리'와 그 메시지

이형선 2016. 12. 19. 11:35



제 젊은 날의 추억도 몇 조각은 묻혀있는

종로 거리에서,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구세군의 종소리를 다시금 만나게 됩니다.

환경도 여건도 퍽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뜻있는 삶을 살고 싶었던 저에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저 구세군의 종소리는

그래서 성탄의 종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종소리는 때론 추억이나 향수를 일으키는

고향의 모음(母音)이 되기고 하고,

때론 메시지가 되어 깨달음을 주는 영혼의

모음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20세기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제하의 단상에서,

종소리에서 들은 깨달음을 이렇게 서술했더군요.

 


-모든 것은 지나가며 우리의 관심사들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종은 우리의 근심 걱정을 깨뜨리며 울린다. 그 소리는 각가지 의무와 덧없는 걱정거리 때문에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의 자유(自由)에 대해 얘기해주고,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종소리는 우리가 그분의 참된 성전(聖殿)임을 말해준다. 종소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분과 화해(和解)하라고 우리를 부른다. (···)

종은 말한다.

일상사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안에서 쉬며 기뻐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은 단지 다가올 세상의 상징이자 약속일뿐이며, 덧없는 것들에 초연한 이들만이 영원한 약속의 실체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덧없이지나갑니다.

오늘 대단한 세상 우리의 관심사들, 중요하다는 일상사들도, 우리의 청춘도 꿈도 야망도, 근심 걱정도, 고집이나 교만도, 성공이나 실패도 다 지나갑니다. 인간 자체조차도 허무하도록 덧없이 지나가고 사라집니다. ‘지나가는 것들은 결코 영원한 가치도, 영원한 세계도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세계를 사는 인간의 가치이자 그 한계일 뿐입니다.

그래서 ()의 울림속에서 영성(靈性)의 울림을 들은 저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그 심령의 화해(和解)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그 안식 그 자유, 하나님 안에서 쉬며 기뻐하며, 영원한 약속의 실체를 소유할 수 있는’, 그 영원의 세계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다 간 것이겠지요.

 


물론 그런 영성에의 열림은 저 수도사 토마스 머튼에게만 주어진 은혜나 몫은 아닙니다.

지혜의 사람솔로몬은 지나가는 것들의 세계와 그 가치에 대해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도서1:13~14)

 


정녕 그렇습니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은 차라리 허무하도록 다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오늘 돈이나 권력이나 성공을 위한 수고나 거기 목을 매는 우리의 세상 관심사 그것이 정작 중요한 일이 아니고, 가치도 생명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under the sun)’는 창조주 하나님이 없는 세상 내지 인간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해 위(over the sun)’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가 아닌, 시간의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를 산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의 사람이었지만 그가 그 지혜의 종소리를 듣고 종말론적으로 깨달은 진리는,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인생들의 관심사나 수고나 노력은 물론이고 그 화려한 성공조차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라는 고백 그것이었습니다.

철저한 허무주의입니다. 인간적인 자기 절망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래서 인간 자기를 부인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허무주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끝나서도 안 됩니다. ‘영원(永遠)’이라는 영성(靈性)의 세계에 열려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永遠)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영원은 영어로 ‘eternity’인데 주지하다시피 영원, 불멸, 내세를 의미합니다. 히브리 원어는 오람으로 되어있는데 역시 영생(永生), 영원무궁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조상의 피를 이어받아 태생적으로 죄인인 인생 우리 모두는 그래서 그 관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못하고, 그래서 결국이 허무한 인생 여정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구원에의 가능성이자 화해 및 화목에의 가능성입니다. 존재의 문제이자 본질의 문제이자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창세기1:27) 하나님의 형상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곧 영원이자 내세이자 영원한 생명(永生)이자 영원불별이자 영원무궁 그 자체이니까요.

 


솔로몬의 저 고백에서 우리는 또한 인생의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지혜로도 풀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는데’,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고 그 안식 그 행복을 소유하고자 하는 심령을 주셨는데, 그 회복의 방법론 내지 구원의 방법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유식한 현자 솔로몬이었지만 자기 지식이나 지혜로는 그 영성의 비밀을 측량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저 고백이자 말씀은 세상 통치자이자 권력자인 솔로몬 왕이 인생 자기의 실존적 한계를 절감하고, 그래서 참 구원자를 희구한 메시아 대망사상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모세나 이사야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희구와 예언이 강물처럼 줄기차게 흐르고 있습니다만, 저 현자 솔로몬이 측량할 수 없다고 고백했던 그 영성의 비밀이자 계시의 비밀에 열린 선지자 이사야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7:14)

 


그러니까 신약시대에 처녀동정녀 마리아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히리라는 말씀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해 위에계시던 창조주 하나님이 탕자탕녀처럼 이미 타락한 자녀들이자 인생들인 우리를 구원하고자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어 해 아래로 내려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곧 영원시간속으로 들어온 사건, ‘하나님의 형상이자 영원한 생명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 내지 한계를 사는 세상과 인간 속으로 들어온 사건이 곧 신비한 성육신(成肉身) 사건이자 성탄(聖誕) 사건입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온 인생들이 풀고 가야할 최고 숙제이자 절대 숙제의 문제 곧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문제이자 그 비밀한 영적 구원의 해법이 그렇게 성취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로새서1:15)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영원그 자체라는 증언입니다. 그렇게 인격으로 세상에 오신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곧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과 십자가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구원의 해법이 성취된 것입니다.

 


물론 진화론이나 유물론 등의 과학이나 자유주의신학의 역사비평적 방법론 등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스스로 유식해진 현대인들은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 운운합니다. 과연 동정녀성령(聖靈)으로 잉태할 수 있느냐?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느냐? 그렇게 회의도 하고 비아냥거리며 힐문 및 야유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코미디 소재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부른 투정이자 스스로 유식하다는 자기중심의 치기(稚氣) 혹은 사치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진면목이나 그 이해는 보다 체험적이고 실존적인데서 되레 토로됩니다. ‘초상집에 가보십시오. 거기서 저 유식했던 현자 솔로몬처럼 철저한 허무주의를 만날 때, 절로 토로되는 인생의 참 희구나 가치가 무엇이던가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암병동(癌病棟)’에 가보십시오. 거기서는 인간 자기의 대단한 돈도 권력도 신분도 학문도 현학적 유희나 변증도, 자존심이나 고집이나 교만도 다 헛것입니다. 거기서 절로 토로되는 외마디 간구는 무엇이던가요? “살려만 주신다면”, 그것 아니던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C. S. 루이스 교수의 변증처럼

사기꾼이든지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종교천재인 사기꾼이 스스로 저주받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을 수 있을까요? 또한 사도 및 제자들이 직접 목격하지도 않은 예수의 부활이나 부활 40일 후의 승천사건을 증언하다가 형틀에서 주님을 따라죄다 처참하게 순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되레 혈육 잉태가 아닌, ‘성령 잉태와 부활에의 역설적 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잉태도, 부활도, 제자들의 증언도, 순교도, 하나님의 영곧 성령(聖靈)에 의한 사건이자 그 행전이었다는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며 수많은 병자들과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의 시체를 살리고, 때론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음으로서 참 신성(神性)과 참 인성(人性)의 존재임을 스스로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자 그 초자연적 권능의 신비를 믿을 수 있다면, 성령으로 잉태되는 문제나 부활하는 문제는 결코 대수가 아닙니다. 정자+난자=잉태, 죽음+시체=무덤, 5+5=10, 그런 자연 내지 상식 세계 정도의 인간 예수라면 저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성현군자(聖賢君子)로 그 인격을 존경할 수는 있었겠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난다는 구원의 비밀이나 성령의 비밀이나 말씀의 비밀은 오직 그것을 체험한 자의 몫입니다. 그 구원이나 은혜나 신비나 기적, 그것을 체험한 자의 몫입니다. 이론이나 학문하는 자의 몫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자의 몫도 아닙니다. 심지어 목사나 신부나 랍비의 몫도 아닙니다.

말을 바꾸자면, 자기가 약하고 부족한 죄인임을 알고 스스로 겸비한 자 곧 만유의 주인이자 참 주인을 주인으로 믿고 의지하고 섬길 줄 아는 자의 몫이자 보는 눈, 들을 귀, 깨닫는 마음으로 그 영성의 비밀을 맛보아 아는 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보이고, 들리고, 깨달아지는성탄의 종소리나 그 의미는 다 다를 수 있고, 기도도 소망도 다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하고 분명한 구원의 종소리임마누엘살아계신 하나님이자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공존(共存)의 메시지이자 현존(現存)의 메시지, 그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성공해도 살고 실패해도 사는, 건강해도 살고 병들어도 사는, 잘나도 살고 못나도 사는, 유식해도 살고 무식해도 사는, '내 아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모습 이대로'에 감사하며 사는, 영원한 생명영원, 불멸, 내세그 구원의 존재이자 진리이자 가치이자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평안'과 안식(安息)우리와 함께 있다는 공존 및 현존의 신비, 그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