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대정권 말기현상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 그랬듯이,
우리는 지금 ‘박근혜 정부’ 역시 ‘도덕의 권위’를
잃자 ‘권력의 권위’도 함께 잃어가는 모습을
‘촛불’처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병폐일 수도 있고,
공신(功臣)이나 측근들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권력
카르텔이나 그 시스템에서 오는 폐단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진리’는 탐심(貪心)이나 사심에 잡히면
비리나 부정부패의 늪에 빠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도덕성을 잃으면 일국의 대통령조차도
주어진 헌법적 통치력이나 지도력마저
잃어버리고 만다는 그것입니다.
각설하고,
박 대통령이 스스로 중도 퇴진 의향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지금, 중요한 후속조치는 차기정권 장악을 위한 정당 내지 정파적 손익계산에 의한 정쟁(政爭)보다는 시국의 안정을 회복하고자 서두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위정자들의 언필칭 그대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진실로 섬길 줄 아는 지도자가 나와서 선한 모범을 보여줄 수 있어야할 텐데 싶은 저의 뇌리에 문득 〈삼국지〉의 인물인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인상 깊은 인품이 다시 떠오릅니다.
주지하다시피, 촉나라 임금 유비는 병이 깊어져 퇴임의 때이자 죽음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자 신뢰하던 참모인 공명에게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일을 부탁’합니다. 나라와 백성 및 왕자인 ‘아두(阿斗)’를 부탁한 것입니다. 유비는 ‘내 아들’인 왕자 ‘아두’에 대한 일방적이자 이기적인 보좌나 추종만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고사로 회자되는 그 일화인즉 이렇습니다.
“만일 후계자인 아두(阿斗)가 보좌할만한 그릇이라면 제발 잘 돌보아 제 구실을 하게 해주오. 그러나 그럴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되면 그대가 대신 제위에 오르도록 하시오.”
그런 임금 유비의 말에 공명은 흐느껴 울며 이렇게 답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다만 가장 신뢰받는 신하로서 충절을 다하며, 목숨을 걸고 황태자 전하를 지켜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약조한 공명은 유비가 죽은 후에도 과연 즉위한 어린 황제 ‘유선(劉禪)’을 섬기며 충절을 다 바칩니다. 문무 대권을 장악한 그는 절대 실세였지만 그러나 ‘신하’라는 제자리를 지키는 겸손을 잃지 않았고, 삶 또한 검소했습니다. 끝까지 ‘도덕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내용의 상주문을 임금에게 올린 적이 있습니다.
-수도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와 메마른 땅 15경(頃)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족의 생활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따라서 저로서는 굳이 사재(私財)를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죽었을 때에 내외(內外)에 여분의 사재를 축적하여 폐하의 신뢰를 배신했다는 일이 저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제갈공명이 54세에 죽은 후, 조사해보니 과연 그대로였습니다. 뽕나무 8백 그루는 보잘 것 없는 것이고, 15경의 땅은 우리 식으로 4만 오천 평입니다만, 광대한 중국천하 그 농경지역에서 봉건시대를 산 당대의 관리들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한 사재입니다. 따라서 그의 ‘하늘의 지혜’나 ‘섬기는 지도자’로서의 인품은 권력이나 재물 자체에 대한 사심이나 욕심이 없는 깨끗(淸潔)한 마음과 검소한 삶 그 ‘도덕의 권위’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저 제갈공명도 사심이나 탐심을 부렸다면, 어린 왕을 ‘임금의 그릇’이 못 된다는 명분을 들어 제거해버리고 자신이 대신 왕좌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면 더 큰 가문의 부귀와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임종 무렵 주군 유비와의 약속 그대로 ‘섬기는 신하의 자리’를 시종여일하게 지킨 것은, 과연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고 그래서 그 마음 그 도덕성에 투영되는 ‘하늘의 지혜‘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풀어보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지혜’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이자 말씀과 통하기 마련이니까요.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5:8)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12:15)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권력의 생명도, 가정이나 사회의 생명도, 아울러 그 모든 행복도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상대적으로 더 가난한 사람이나 더 ‘작은 자’가 되레 더 가치 있는 ‘사람의 생명’일 수 있고, 마음이 더 깨끗한 그래서 더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으론, 우리 조선왕조시대의 수양대군도 저런 예수 그리스도와 제갈공명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서, 친조카이기도 했던 어린 단종을 끝까지 ‘섬기는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후세들에게 보여주었더라면, 백성들의 가치관이나 도덕성이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조선의 역사가 보다 복이 있는 방향으로 진척될 수도 있었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대통령’ 아니 ‘왕’이 되고자 하는 권력욕 내지 탐욕이 강했던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폐위시킨 후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끝내 죽이기까지 했으니까요.
오늘의 우리 한국 여야(與野) 정치 풍토가 권력욕이나 집권욕에 사로잡혀 서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정쟁(政爭)이나 막말을 일삼으며 ‘상대방 죽이기’를 예사로 자행하는 것도, 그 정치혈맥에 저런 조선조 이방원이나 수양대군의 ‘원죄적 피’나 ‘가학적 기질’이 강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물론 정치권력이나 공권력이나 종교권력 등 세상 각계의 권세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정당한 치안도 공익적 질서도 평화도 유지됩니다. 그러나 ‘군림하는 권세’와 ‘섬기는 권세’는 전혀 다릅니다. 전자의 권력은 타락한 세상 내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2~45)
당시까지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권’을 잡고 등극하면 그때 ‘주의 보좌 우편과 좌편’에 앉고자 서로 ‘화를 내며’ 다투던 ‘12제자들’ 곧 ‘최측근들’을 불러다가 이르셨던 저 말씀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도 ‘군림하는 권력’과 ‘섬기는 권력’에 대한 분별 내지 성별을 확실하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군림하는 권력이나 제왕적 세상 권력이 될 때, 거기서 교만과 부정부패와 비리가 양산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결국엔 자기도 백성들도 다 불행해지기 마련이니까요.
‘하나님의 권력’이자 ‘인자(그리스도)의 권력’은 진실로 ‘섬기는 권력’이자 ‘은혜를 모르는 자나 악한 자에게도 햇빛과 비를 함께 주시며’ 공존(共存)을 도모하는 ‘인자하신 권력’입니다.
한편 ‘돈’ 내지 ‘재물’ 역시 인생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번 돈은 자기 몫의 보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한 삶’과 ‘돈을 사랑하는 삶’은 전혀 다릅니다. 후자는 물질인 ‘돈’이 ‘우상’이 되고 신격(神格)이 된 삶입니다. 탐욕에 빠져 인간성도 도덕성도 성결성도 이미 잃어버린 삶입니다. 그런 삶은 과연 지도력도 선한 영향력도 잃어버리고 결국엔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인생 대선배,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6:10)
‘자기를 찌르는 자’는 실인즉 미련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의 돈이나 자기의 권력이나 자기의 학문이나 자기의 신분으로 자기 욕심과 자기 아성을 쌓다가 ‘자기를 찌르는 자’는 크게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외람되지만(?), 저 말씀을 또한 이렇게 좀 풀어봅시다.
-‘권력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역대 정권 내내)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큰 혼란과 혼미를 앓고 있는 오늘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나 제갈공명의 저런 인품과 삶을 본받는 지도자들 곧 ‘섬기는 지도자’들이 각계에서 많이 나오길, 하나님의 지혜와 섬김의 능력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어서 나오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또한 신(神)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인간 자기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내지 '왕좌'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그런 사이비 교주나 목회자들이나 무속적 종교인들이 더 이상 설쳐대며 미혹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풍토 및 여타 종교풍토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간절합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예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누가복음22:27)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밑의 겨울나무 (0) | 2016.12.26 |
---|---|
성탄의 '종소리'와 그 메시지 (0) | 2016.12.19 |
시대적 문젯거리가 된 어떤 '여인'들 (0) | 2016.11.28 |
11월의 산에서 (0) | 2016.11.21 |
'국가 전체를 개조할 기회'로 삼기 위하여 (0) | 2016.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