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시대적 문젯거리가 된 어떤 '여인'들

이형선 2016. 11. 28. 11:04



조선조 성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권경희(權景禧).

그는 훗날 관행상 문벌이 높은 출신이

도맡았던 수선관(修善官)에 발탁됩니다.

수선관이면 정3품이자 당상관급이니까,

시쳇말로 청와대 비서(?)’로 입성한 셈입니다.

 


국가고시에 합격했던 권경희와는 달리 그의 아내는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언론 곧 간관(諫官)들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미천한 출신의 아내를 가진 권경희는 도저히 나라의 요직인 수선관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그러자 간관들의 집요한 주장에 밀려 권경희가 수선관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접한 그의 부친이 아들을 불러, 장래를 생각해서 아내 김 씨를 버리고 문벌 좋은 집안으로 새 장가를 들도록 하라고 종용합니다. 효자로 이름난 권경희였지만 그러나 조강지처에 대한 태도만은 단호합니다.    

 


십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함께하면서 오늘이 있기를 고대했는데, 이제 겨우 그 뜻이 이루어졌다 해서 같이 고생한 아내를 버린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귀를 누리며 사람답지 못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귀를 버리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들의 결연한 소신과 진솔한 사랑 내지 인간애 앞에서 부친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맙니다. 나아가 성종도 그런 뜻을 전해 듣고 신하 권경희의 사람됨과 두터운 신의(信義) 및 그 삶의 가치관을 높이 평가하며,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어명을 내립니다.

권력도 부귀영화도 행세도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사람답게 사는 길을 택하겠다는 권경희. 그에게 복된 구원의 길이 되레 열린 것입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 천심(天心)은 살아있다는 반증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rubbish)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3:)

 


한편,

구약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도 그의 아내

문제로 인해 시대적 타락과 곤욕을 함께 치른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라.-(호세아1:2)

 


난감한 말씀이지만 그래도 신실한 호세아는 말씀대로 예컨대 유흥업(?)에 종사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해서 세 자녀까지 낳고 삽니다. 그런데도 아내 고멜은 그 가정의 삶에 자족 내지 만족하지 못하고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외간 남자들 곧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을 내게 준다’(호세아2:5)고 하는 자들,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라 가출해버린 것입니다.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세속의 남자들과 눈이 맞아 도망 가버린 것입니다.

물론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는 호세아의 저 아내 고멜영적 남편인 하나님과 그 계시 그 말씀 그 진리를 버려버리고, ‘금송아지, 바알 신, 아세라 목상, 일월성신, 복술이나 사술‘(열왕기하17:) 등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이방 신이자 혼합적이고 무속적인 우상들과 어울려 영적 음행을 자행하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영적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심령이 매춘부처럼 세상 욕구 중심으로 극도로 타락했던 당대의 이스라엘 민족 내지 국가 자체에 대한 인격적 은유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시대에도 대한민국과 결혼한 여자가 있는 것처럼, 저 선지자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결혼한 남자인 사례가 됩니다. 아울러 저 음란한 여인 최순실아니 고멜과 한통속이 되어 놀아난 남자들 중에는 시쳇말로 청와대 인사들이나 정계나 재계 인사들도 적잖이 있었을 법 합니다. 그럴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복되다는 생명의 비밀 내지 양심의 비밀을 잃어버리고 세상 재물이나 권력등을 더 사랑하며 그런 우상들과 은밀하게 음행을 일삼으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오늘 우리 시대 최순실 정국의 모습 역시 같은 경우이다 싶으니까요.

물론 원조인 최태민 유형의 목사들의 시대가 그런 것처럼 신앙 내지 종교의 탈을 쓰고 하나님보다 세상의 저런 우상들을 더 사랑하며 그것들과 한통속이 되어 행세하는 음행의 모범을 보여 왔다면, 그런 우리 한국교회나 기독교 신앙풍토의 과오나 책임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참 남편이신 하나님의 장탄식을 들어봅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세아4:6~7)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지식이 없으면 그 인생이나 그 사회 그 국가의 가치관이 우상적 내지 무속적 미혹이나 혼미에 빠져 망하게됩니다. 나라도 네 자녀들도 결국 부정부패나 비리나 사리사욕이나 탐욕이나 주색 등의 음행에 빠져 망하게됩니다. 오늘 권력을 장악하고 재물을 얻었다 해도, 번영이나 번성을 이루었다 해도, 저 호세아의 아내 이름 고멜의 의미처럼 그 , 종말이 불행하고 비참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시기때문입니다.

 


과연 영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곧 스스로 도통 내지 신통했다는 특정 교주 중심의 사이비 신앙이나 이단적 신앙’, 또한 정통이라고 해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그릇번성이나 부귀영화가 담기면 그 결국이 되레 불행합니다.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되레 치욕이나 수치가 됩니다. 종말적으로,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는 역사의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행세하는 삶이 아니라 바르고 선하게 사는 삶입니다. 성경은 모든 남자도 여자도, 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곧 죄로나 우로나 치우쳐 미혹에 빠지지 아니하고 바르고 선하게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이 계시해주신 말씀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에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혈연이나 친지를 포함해서 대단하다는 세상 권력이나 재력이나 전관변호사같은 인간 그 누구를 믿어봤자 별 볼일 없습니다. ‘종말적으로 불행하고 비참할 뿐입니다. 그래서 허무할 뿐입니다.

‘4혹은 ‘5이라는 일국의 대통령의 생명이나 부귀영화도 영원한 생명이자 세상을 이기는 영원한 천국의 평안과 기쁨 앞에서는 별것 아닙니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라고 자탄할 만큼 죄다 허무한 것입니다.

 


해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불행도 허무도 이기는 해법입니다.

그 참 해법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통해 친히 말씀하신 바처럼,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서 집은 나간 후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거지신세 내지 죄인신세가 된 탕자이자 탕녀인 인생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참 아버지이자 남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오늘도 우리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낙원이라는 집 대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분’(누가복음15:)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진심으로 회개한 저 탕자(蕩子)’의 마음 자세이자 각오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누가복음15:18~19)

 


그렇습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겸허한 자세입니다.

회개(悔改)’ 곧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세상 내지 자기중심 곧 땅의 것중심으로 살아왔던 그 가치관을 하늘나라위의 것(meta)’ 중심으로 심령의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things above)을 생각하고

 땅의 것(earthly things)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3:1~2)     

 


메타노이아와 상반된 의미를 가진 파라노이아(paranoia)’ 피해의식은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실망 미움 원망 배신감 같은 자기감정이나 아집에 갇혀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기방어적 내지 자기중심적인 피해의식에 갇힐수록 우리는 속이 좁아져서 정의(正義)의식중심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나 자기신분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반() 팔자라지만, 그러나 임금도 부자도 왕자도 공주도 세상에 올 때는 빈손이었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이 (earth)’내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참 진리도, 참 정의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한계를 살다 빈손으로 가는 허무한 인생 나그네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회개한 신앙인격이나 지도자는 모든 인간관계의 악화나 실정(失政)이나 비리에 대한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자기는 피해자인 것처럼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내 죄와 허물이 있으면 응분의 벌을 받으리라, 응분의 감옥살이라도 하리라, 때론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4:16), 그런 각오와 자세로 자기 십자가를 메고 나갑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온 탕자를 결코 벌하지 않습니다. ‘품꾼으로 비하하거나 구박하지도 않습니다. 외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겨줍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을 위해 실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며 크게 즐거워합니다. ‘아들의 명예와 인격을 살려준 것입니다. 그렇게 탕자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과연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생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그래서 용서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충심으로 회개하고 돌아가면, 막장 같은 인생 탕자고멜곧 그 , 종말이 되레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고, “너희의 근심이 기쁨이될 수 있습니다. 영성(靈性)의 비밀이자 초월적인 소망과 기묘한 구원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멜곧 북왕국 이스라엘은 끝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들과 한통속이 되어 자기 및 자기이념을 고집하다가 마침내 아시리아제국에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이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기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호세아5:4)

 


과연 그렇습니다.

자기의 행위’, ‘자기의 죄’, 그것이 참 복이 있는 구원에의 길을 늘 가로막습니다. 그것이 늘 우리를 자기 고집과 교만과 패역과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죄악이 많은 사람일수록 되레 뻔뻔해지고 완악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심령이 사욕이나 탐욕의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런 악령의 시험이나 아집이나 감정에 잡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몫의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묵묵히 죽어야 오히려 삽니다.

 


제자도 추종자도 많았던 왕 중 왕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인간적인 자존심이나 체면이 없었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겠습니까? 주님께도 내 원, 내 뜻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를 부인하고 겸허하게 아버지의 원, 아버지의 뜻이라는 정의이자 대의(大義)를 따른 것입니다. ‘감옥살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저주받은 자의 십자가라는 조롱과 치욕과 죽음, 그 밑바닥까지 자기를 비우고 낮춘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현재적 자기 부인이자 자기 죽음이자 자기 심판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는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이 그의 것이 됩니다.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셋째 날에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때가 되면 도로 낫고다시 그의 앞에서 살리라는 예언이 또한 성취된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세상에서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고, 죽어도 다시 사는 초월적인 은혜의 길이자 비밀한 구원과 도움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고,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