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마지막으로 대답하였다.
“앞으로 나는 순종하는 것만이 최선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그의 면전(面前)에 있는 것처럼 걷고,
언제나 그의 섭리를 지키며,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항상 선으로 악을 이기고, 적은 일로서 큰일을 성취하고,
약하게 보이는 것으로써 세상의 강한 것을 물리치고,
소박한 유순(柔順)함으로 세속적인 지혜를 무너뜨리고,
또한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견디는 일이 최고의 승리로
가는 용기이며,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죽음이 생명으로
통하는 문임을 배우고자 합니다.
나는 나의 구속자로 믿는, 영원한 축복을 받은
성자(聖子)의 모범을 통하여 이것을 배웠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천사도 역시 마지막으로 대답하였다.
“이것을 배운 그대는 이제 최고의 지혜를 터득하였다.
더 이상 높은 것을 바라지 마라.
그대가 비록 모든 별들의 이름을 다 알고,
모든 천사들과 온갖 영원한 비밀과 온갖 자연 현상,
다시 말하면 하늘과 공중과 땅과 바다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알고, 이 세상의 모든 부와
모든 지배권 즉 대제국을 수중에 넣는다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대의 지혜에
부합하는 행위를 더하며, 믿음을 더하며 미덕과 인내와
절제를 더하며, 그 위에 자비의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일의 영혼이 되는 사랑을 더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이 낙원에서 떠나기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낙원을,
훨씬 더 행복한 낙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에서-
주지하다시피 〈실낙원(失樂園)〉은 17세기
영국 시인 존 밀턴이 저술한 대서사시입니다.
거기서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2:17)는 창조주 하나님의 금기 내지 계시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리라”(창세기3:4)는 악령 곧 ‘교활한 뱀’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되레 불행해집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되레 사탄 곧 ‘교활한 뱀’ 같은 형상이자 인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동산’이자 품인 ‘낙원’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실낙원’한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탕자(蕩子)’처럼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에 대한 거역 내지 불순종을 자행하다가 스스로 가출해버리고만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 곧 ‘행복한 낙원’에서 가출한 이후 탕자 내지 아담은 결코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했습니다. 되레 ‘돼지’인 짐승 내지 가축의 신세보다 더 불행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선악(善惡)’ 곧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을 알게 하는 절대 중심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 곧 악령 내지 귀신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 아담이나 우리 자신의 머리나 이성이나 지혜에 있는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가출한 이후,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허무하도록 곤고한 삶의 여정을 통해 그것을 절감하고 통감한 아담은 저 ‘마지막 대답’이자 고백처럼, ‘나의 구속자로 믿는 성자(聖子)의 모범을 통하여’ 곧 인간 아담의 불순종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순종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헌신과 희생의 삶, 그 ‘모범을 통하여’ 구원의 삶을 회복합니다. ‘행복한 낙원’의 삶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또한 천사의 ‘마지막 대답’이자 화답처럼 인생 ‘최고의 지혜’입니다. 인생을 ‘행복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참 선악의 생명이나 가치를 분별하는 ‘최고의 지혜’는 ‘이 세상의 모든 부(富)나 모든 지배권’ 그 소유나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저 ‘아버지께로 올 자’는 곧 ‘행복한 낙원으로 올 자’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돈이나 권력 같은 소유나 부귀영화에서 행복이나 낙원을 찾습니다만, 거기 참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참 안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적 의미로, ‘선악과를 따먹어버린다’는 불순종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먹어버린다’는 불순종의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세상에 오신 '생명나무'이자 '영적 생명(*조에)'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따먹어버리면’, 자기나 자기 가족이나 그 사회가 되레 죽는다는 것입니다. ‘실낙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신론이나 유물론 등을 ‘신봉하는’ 세상 지식인들이나 ‘안티 세력들’의 유혹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임의대로 ‘따먹어버려도’ 당장 죽지는 않습니다. 아담 역시 그랬던 것처럼 나름대로 '생물학적 생명' 내지 수명은 다 삽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동물 곧 ‘경제 동물’이나 ‘정치 동물’이나 ‘그들의 가축’이 되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사는 삶이 인생의 진정한 ‘길도 진리도 생명’도 아니고, 가치도 푯대도 아니고, 서로 행복한 삶에의 지혜도 능력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수 유대인 석학’이자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체험적인 그의 삶이자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miraculous signs)을 구하고,
헬라인은 (선비(scholar)나 변론가(philosopher)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린도전서1:22~24)
아울러 우리가 명심해 둘 것은,
위대한 사도이자 성자이자 학자인 저 바울조차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온전한(fully) 것이 아니고 부분적(in part)인 것이라”(고린도전서13:12)고 고백했다는 그것입니다. 참으로 큰 세계에 열린, 겸손한 신앙인격이자 중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와 허물도 많은 인간 우리가 '신앙'이나 '신학'이란 이름으로, 유식하다는 자기중심의 독선이나 독단이나 교만에 빠져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핵심을 놓치고 지엽적인 교파나 교리 등의 도그마에 빠져서도 안 되고,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값싼 복음’이나 ‘반쪽 복음’만 선포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 군림하는 신(神)이나 교주(敎主) 행세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행복한 낙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핵심이자 본령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들어봅시다.
친히 ‘한 계명’으로 요약하신 말씀이니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13:34~35)
진실로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과연 ‘믿음’도 좋고 ‘소망’도 좋지만, “그중의 제일은 사랑”(고린도전서13:13)입니다. 재물도 좋고 권력도 좋고 학문도 좋지만, “그 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기”(고린도전서13:2) 때문입니다. 태산 같은 권력이나 재물이나 학문이나 교회당 건물이 있을지라도, 이웃이나 국가나 국민을 섬기며 살리는 이타적 내지 헌신적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 타령’은 대중가요에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가득한 지천(至賤)의 타령입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자기 혈육 중심의 사랑인 ‘스톨게’나 남녀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 같은 그런 인간 중심의 사랑에서 진정한 ‘우리의 행복’이나 ‘우리의 낙원’이 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것의 정체성은 결국 이기적 내지 집단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독신으로 사신 분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무소유의 삶을 사신 곧 전적으로 이타적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께선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나같이 다 독신으로 살아라, 머리 둘 곳도 없이 살아라, 그런 식으로 그런 면모를 ‘새 계명’으로 새 율법화 내지 새 교리화 해서 강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나 은사도, 분량이나 분수도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배려’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절대 주목 및 명심해야 할 핵심 하나는 동일하고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삶!
오늘의 한국교회나 기독교가 사회의 비판과 비하의 대상이 되어있는 것도 그 요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올바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섬기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타적인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기보다는 성공철학이나 번영신학을 '본받아’ 권력도 재물도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식의 ‘값싼 은혜’나 ‘변질된 복음’을 설파하며, 대형교회 목사들부터가 그렇게 소유하고 누리는 ‘이기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물이나 권력이나 성적 외도를 밝히며 자기 탐심을 합리화시키는 그것은 되레 ‘세상 사람들’이 밝히는 그것보다 더 추악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은 오히려 남보다 더 자기를 부인하고, 더 자기를 비우고, 더 자기를 낮추는 데서 발현되는 ‘십자가의 후광’입니다. 그것이 참 실력이자 ‘거룩한 능력’입니다. 남보다 더 차지하는 능력이자 실력이자 야심은 세상 ‘이방인들’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빈손’ 고(故) 한경직 목사님이 당부하신, “목사님, 예수 잘 믿으세요!”, “목사님, 예수 바르게 믿으세요!”라는 명언은 기독교의 세속화가 심화될수록 그 역설의 의미와 강도가 높아진다 싶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우선의 책임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제는 대한민국의 지식수준도 배부름의 수준도 ‘눈높이’나 ‘귀높이’의 수준도 이미 높아졌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출세한다는 식의 이기적 내지 저질적 기복신앙이 쉽게 먹혀들지 않게 되었고, 돈이나 권력의 소유 등에서 참 행복의 삶이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내가 이러려고 부자가 되었나?“, ”내가 이러려고 출세했나?“, ”내 이러려고 유명 목사가 되었나?“, 그렇게 자탄하는 사람들은 분명 우리가 본받아야 할 행복한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 오백주년'인 새해를 맞이한 우리는 다른 그 어떤 작심보다도, 자기나 자기가족이나 교회나 직장은 물론이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오직 자기부인과 자기 비움과 자기 낮아짐이라는 ‘케노시스(kenosis)의 삶’을 통해서 비밀하게 발현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결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네가 나를’이 아닌, ‘내가 너를’, ‘너보다 내가 먼저’, 그렇게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리라 다짐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요청되는, '개혁' 내지 '회복'을 위한 핵심의 과제이자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혈육인 가족이나 남녀 이성간의 사랑을 포함해서 저 모든 ‘우리’라는 공존(共存)의 관계 및 공동체(共同體)를 살리는 참 구원과 참으로 ‘행복한 낙원’의 비밀은 오직 그렇게 ‘먼저 섬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해법이 창출되기 마련이니까요. 그 자체가 ‘최고의 지혜’이니까요.
세상에는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부귀영화도, 그것에의 탐욕도 남녀의 정욕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위한 삶의 제일의 목적이자 가치가 된 사람들은 죄다 되레 불행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그것들이 이웃을 섬기며 살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나 매체나 능력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선하고 복된 ‘사회적 가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우리 심령의 생각이나 중심이나 관심, 속사람의 인격 그 됨됨이나 진실 여부를 훤히 통찰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실인즉 ‘지극히 작은 이웃’, ‘지극히 미운 이웃’ 그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네만 생각하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철저하게 동물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인격인 우리 삶의 목적이나 가치나 관심은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리고 동일한 것은, “그 중의 제일은 (아가페)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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