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스탈린의 위기 처방전', 두 통

이형선 2017. 1. 16. 11:22



미국우선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 정권이 출범하면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전쟁이나 패권 전쟁이 한층 더 고조될 것 같고,

고래싸움에 우리 한반도가 안보(安保) 문제를 위시해서

앓아야 할 고초나 진통도 한층 더 커질 것 같다 싶습니다.

국제적 정세의 불확실성은 높아 가는데,

국내적 정국은 여전히 혼란의 와중에 있습니다.

탄핵 정국의 당사자 내지 관련자들도 다 모르쇠

네 탓으로 일관하고 있고, 대선주자들도 다 네 탓이라고

주장하며 내로라식 집권야심만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매일 접하는 저런 모르쇠라는

거짓말이나 네 탓이라는 책임전가는 실인즉

비본래적(非本來的)인 곧 타락한 인간인 우리 모두의

정체성이나 성품 그 자체이자 그 공공연하고 적나라한

반증이자 확인일 수도 있다 싶습니다.

구소련 수상이자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스탈린과

포스트 스탈린이었던 흐루시초프와의 관계를 풍자하는

전래 일화를 통해, 정치권력 내지 섬김의 비밀한 능력을 모르는

지배권력 세계에서 더 공공연하고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마련인

타락한 인간의 정체성 그 실상의 의미를 좀 상고해봅시다.

 


스탈린 곧 강철의 사나이라는 뜻의 그 이름은 레닌이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동무는 강철처럼 의지가 굳은 사나이니까 스탈린이라는 이름이 어때?”

그래서 스탈린이라고 개명한 그는 이후 레닌주의를 실천하며,

이념과 권력을 위해 무자비한 대량학살도 강철(?)처럼 자행했습니다.

그런 스탈린 정권이 끝나갈 무렵, 스탈린은 측근인 흐루시초프를 자기 방으로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모로 고려한 끝에 동무를 후계자로 지명하기로 했소.

 정권을 잡으면 처음엔 모두 아부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백안시하고,

 뒤에서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는데 그런 경우에 대비하는 처방을 가르쳐주겠소.”

그리고 스탈인은 밀봉한 봉투 두 통을 주며,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씩 뜯어서 읽어보라고 당부합니다.

 


이윽고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잡은 수 년 후, 과연 정치적 위기가 닥칩니다. 간부들의 신뢰를 잃고 딜레마에 빠진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위기 처방전이 생각나서, 지하금고에 보관해둔 첫 번째 봉투를 뜯어봅니다.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내가 취해온 정책을 비판하시오. 나를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시오.

흐루시초프는 당장 스탈린 비판을 시작합니다. ‘전임자, 네 탓비난과 비방을 시작한 것입니다. 신통하게도(?) 그런 포퓰리즘은 먹혀들었고, 그렇게 1차 위기는 넘어갑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고 위기는 다시 찾아옵니다. 흐루시초프는 두 번째 봉투를 마저 뜯어봅니다.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동무도 두 통의 봉투를 작성하시오.

너도 그만 보따리를 싸라는 것.

 


인류의 조상 아담이 신본주의(神本主義)적 삶의 상징일 수 있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이 된 후 하나님 앞에서 맨 처음 저지른 죄악은 네 탓이었습니다. 아내 하와에게, 심지어 그녀를 아내로 준 하나님에게까지 그 책임을 전가한 것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세기3:12)    

 


하와 역시 네 탓을 하며, ‘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세기3:13) 

 


그것이 또한 아담의 후예인 우리 인간 내지 인류의 타락한심령의 정체성이자 그 실상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막론하고, 무신론적 인본주의(人本主義) 사회나 가정이나 인간관계에서 야기되는 모든 불행이나 위기에 대한 처방전은 한마디로 네 탓이라는 책임전가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한다는 것. 그것은 곧 경쟁사회 내지 동물사회의 약육강식(弱肉强食) 원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위 자아비판이라는 수단조차도 인권(人權) 위에 군림하는 공산당이라는 조직 내지 권력이 살기 위해 인민 내지 인간 네가 죽어야한다는 네 탓찾기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26:52)

 


네 탓이 언어화되면 원망이나 불평이나 비난이 되고, 폭력화 내지 무기화되면 주먹이 되고 칼이 됩니다. 따라서 을 가지는 자는 다 로 망하듯이, ‘네 탓을 하는 자는 다 네 탓으로 망하기 마련입니다. 저 흐루시초프도 그래서 보따리를 싸야만했던 것이겠지요.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비리나 오류는 물론이고 이웃과의 관계 악화나 사회라는 공동체의 비리나 오류조차도 그 요인을 먼저 내 탓에서 찾습니다.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역할을 하지 못한, 내가 그리스도의 관심과 사랑을 베풀지 못한 내 부덕의 소이에서 그 요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드리는 라틴어 기도문인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전통적 고백도 그렇고, 개신교에서 먼저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다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7:20~23)

 


과연 그렇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우리 심령의 정체성입니다.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고’, 타성적이자 습관적으로 네 탓을 하게 만듭니다. ’내 속에서 나와서 네 탓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에 대한 탐욕도, 권력에 대한 탐욕도, 그 소유의 교만도, 시기나 질투나 비방도, ’모르쇠라는 속임도, 무책임한 책임전가도, 다 자기 속에서 나와서 자기를 더럽게 만듭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 우리 모두의 영적 정체성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어두운 것도, 사회가 부패하고 비인간화되어가는 것도 내 탓, 우리 탓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가진 것이나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기득권에 대한 의무나 책임도 큽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내 책임, 우리의 책임에 대한 성숙한 이해와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특검이나 청문회에 나오는, ‘권력을 남용한그래서 비리나 부정부패를 자행한 인물들이나 자기와 자기사단부귀나 영달만을 구하다가 나라를 비리와 혼란의 늪에 빠뜨린 인물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다 유식한 엘리트들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내로라 설쳐대던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저들 대다수가 암기실력 중심의 공부 천재가 되어 사법고시에 합격한 법조인 혹은 최고지식인이라는 교수 출신들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내지 정치적으로 남달리 성공한 부자나 법조인이나 교수나 명문 출신이라고 해서 그 인간성이나 그 인품 됨됨이가 남달리 훌륭한 것은 결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비선이나 실선 가리지 않고 출세 라인에 목을 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엘리트들이 애국이라는 독선의 이름으로 오히려 나라를 어둡고 더럽게 만들며 혼란에 빠뜨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세상의 대통령이나 정치권력보다 더 크고 높은 세계인,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나라의 실재를 알고 진심으로 경외할 줄 아는 자가 참 겸손의 의미를 알고 그래서 국가와 국민을 진실로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 정치풍토도, 또한 기독교 신앙풍토도, 전문가들이나 관련 학자나 학문이 부족해서 이렇게 어둡고 어지러운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타적 배려를 통해 섬기는 인격 내지 헌신적 인격이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그 진리를 배우지도, 암기하지도, ‘마음판에 새기지도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8;34~36)

 


정녕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온 천하를 얻은대통령이 되었다 쳐도 자기 목숨곧 자기 영적 생명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교훈을, 역사적 현실을 통해 절절하게 배우고 있습니다.

성경속의 초대교회는 물론이고, 한국초대교회를 연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신앙선배들의 삶은 저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헌신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런 하늘과 땅에 피차에게 참 복이 있는 구원이 왔습니다. 그것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진리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역시 그랬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요나1:12)    

 


이 큰 폭풍, 이 큰 소요, 이 큰 혼란이 다 내 탓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상호 감정의 관계에서든, 정치적 사회적 역학의 관계에서든, ‘우리의 평화우리의 화목을 이루는 공존의 해법은 결코 네 탓에서 창출되지는 않습니다. 저 요나는 그래서 바다에 던져졌지만 그래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여호와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하심으로써 되레 사흘 후 무덤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부활하도록 간섭 내지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구원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순교하신 저 모든 신앙위인들 역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예비하신낙원 내지 천국에서 안식하고 계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영적 생명은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하나로 통하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생명이니까요.

 


따라서 평범한 우리 개개인도 참 복이 있는저 말씀 저 삶을 본받아야겠지만, 대통령 탄핵 정국대선(大選)의 해를 함께 맞이한 오늘의 시국인 만큼 저 말씀 저 삶을 본받아 국가와 국민을 진실로 섬길 줄 아는 정치지도자가 나오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국민들의 사랑과 박수를 받으며 퇴임하는 저 오바마 미국 대통령처럼 혹은 독일 메르켈 수상처럼 권위적이기보다는 서민적이고, 계급적이기보다는 인간적이고, 배타적이기보다는 포용적인 열린 리더십내지 섬기는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우리 한국에서도 어서 나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은 서민들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금년엔 역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오늘의 역사적 교훈을 교훈으로 중심에 새기고 전임대통령들의 비리나 영욕을 거울삼아 그 사심이나 탐심, ‘정치 조폭집단같은 행세나 교만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을 보다 나은 대통령’, ‘네 탓이 아닌 내 탓을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보이고 들리고 깨달아지는 창의적인 하늘의 지혜와 비전을 가진 보다 나은 지도자가 선출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이상적인 최선의 인물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 가까운 차선의 인물이라도 있기를, 그래서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위한 희망과 평화의 메이커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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