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오랑캐(胡)'의 정체는?

이형선 2017. 1. 30. 11:11



진시황32.

불로장생(不老長生)을 희구하던 진시황을 위해

불로초를 구하고자 천하 산천을 누비고 다니던

신하 노생은 빈손으로 돌아와,

시황제에게 이런 내용의 진언을 합니다.

도참설에 이르기를,

진나라는 호() 때문에 망한다고 했습니다.”

 


’? ‘’? 진시황은 주술에라도 걸린 듯 그 ()’ 오랑캐의 정체를 북방의 흉노족이라고 줄곧 생각합니다. 그래서 30만 병력을 동원해서 북방의 오랑캐를 계속 공격합니다. 그리고 150만 인력을 동원해서 만리장성까지 쌓았습니다. 이제는 든든하다 싶었겠지요. 반석 위에 세운 영원한 제국이다 싶었겠지요. 그러나 그런 진시황은 지방 순행 중, 중한 병을 얻어 졸지에 죽고 맙니다. BC 210, 그의 나이 50세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당시 진시황을 수행했던 환관 조고(趙高)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음모를 획책합니다. 진시황의 유지를 숨긴 채 장남이자 태자인 부소 대신 후궁 소생이자 18남인 호해(胡亥)를 후계 황제로 세운 것입니다. 이후 승상이 된 조고의 권세와 교만은 날로 커져서 황제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지경이 됩니다.

어느 날, 그는 사슴을 끌고 와서 황제 호해 앞에 바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옵니다.” 황제 호해가 웃으며 받습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사슴 아니오.” 정답은 신하들의 몫이 됩니다. 말이냐? 사슴이냐? 실세인 조고냐? 허수아비 황제인 호해냐? 신하들의 대답 내지 견해도 줄서기에 따라 양분됩니다. 하긴 모르쇠라는 대답도 나왔을 법합니다.

여하간 '사이라고 진실을 말한 신하들은 그 후 조고에 의해 죄다 숙청 내지 죽임을 당했습니다. 부패한 권력의 일언지하에 의해 사슴조차 말이 되어버리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자 공작정치의 유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황제 호해 머리 위에 앉아 권력 실세 노릇을 하던 조고를 중심으로 비리와 탐심과 부정부패가 난무하면서 나라는 온통 혼란에 빠지고, 도처에서 반군세력들이 발호하는 파국의 지경에 이릅니다. 그 와중에 2세 황제 호해는 조고의 공작에 의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후 조고는 부소의 아들 자영을 3세 황제로 옹립하지만 그 자영에 의해 조고 역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진시황 사후 불과 3년 만에 꼭두각시 황제호해도, 권력과 탐욕을 구가하던 실세 조고도 다 죽고만 것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도 그렇게 붕괴되고만 것입니다. ‘영원한 제국을 꿈꾸던 진나라는 그 2년 뒤, 건국 15년 만에 마침내 멸망합니다.

따라서 진나라를 망하게 한 오랑캐()’의 정체는 외적(外敵)인 흉노족 같은 북방의 오랑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인물인 저 영세교 교주, 최태민 목사그의 딸 최순실같은(?), 궁중내시 조고(趙高)이자 그의 음모와 도모에 의해 황제자리에 올라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인물 호해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 지라.-(아가2:15`17)

 


오늘의 양떼인 교회는 물론이고, 제국이나 사회나 가정 등 포도원이라는 공동체에 이 피면 또한 그것을 허무는 여우, ‘오랑캐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 아가를 지었던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자솔로몬 왕의 경우도 그 여우내지 그 '오랑캐의 정체는 외부가 아닌, 바로 자기 안에 있었습니다.

어린 사슴처럼 순수하게 하나님과 그 말씀을 경외 및 사모했던 처음마음이자 처음사랑이자 처음행위를 버리고, 스스로 부유하고 막강해질수록 수많은 이방여인들을 처첩으로 맞아들이고 품안의 그녀들이 가져온 이방신들에 미혹되어 시쳇말로 종교다원주의 내지 혼합주의에 빠졌던 그의 심령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모든 여우오랑캐는 자기 안에 있습니다. ‘타락한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신앙 및 불순종하기 마련인 인간 자기 정체성,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곧 자기고집이자 교만입니다.

그래서 솔로몬보다 큰 자이자 솔로몬보다 큰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께선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8:34)

 


진실로 그렇습니다.

자기를 고집하면 고집할수록 자기 안에 갇혀 자기 이상의 지혜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합니다. ‘솔로몬보다 큰 자의 지혜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당부하신 것은 우리를 하수인으로 이용해먹으려는 것도 아니고, 착취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참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해서, 참 복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10:10)

 


선한 목자가 인도하는 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NIV)” 삶이 어떤 삶입니까?

번영신학에서는 그 의미를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부자 개념으로 설파하는 측면이 다분하던데, 예수 그리스도께선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마태복음19:23)고 또한 친히 역설하셨습니다. 실인즉 은혜로 받은자기의 소유나 능력을 어려운 이웃들, 작은 이웃들과 나누며 살고자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저 말씀은 부자 개념이 아니고, ‘부요 개념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생명 개념이자 존재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더 풍성히의 헬라원어는 페릿소스인데, ‘더 힘 있게, 더 넉넉히등의 의미도 함께 가집니다. ‘그 생명을더 풍성히, 더 힘 있게, 더 넉넉히 얻게 하려는 선한목자의 마음이자 바람인 것입니다.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힘 있게 이기는 () 무리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부자는 물질적 소유 개념입니다. ‘부요는 심령적 생명 개념이자 존재 개념입니다. 진실로 부요한 자생명을 얻고 더 풍성이 얻은신앙인격 그 최선의 모범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예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6:10)      

 


사도 바울은 과연 세상 소유가 많은 부자이기도 했던 솔로몬보다 더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더 풍성한사람이자 더 풍요한사람이자 더 넉넉한사람이자 더 힘 있는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천국(天國) 생명의 비밀이자 현재적 능력입니다.  

따라서 저 솔로몬의 아가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가 먼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이되어야 할 절대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인생여정에서 너무 늦기 전에 회개(悔改)하고, ‘베데르 산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은혹은 어린아이 같은순수한 심령을 회복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응분의 돈이나 물질이 필요한 건 불문가지이지만, 그러나 감사(感謝) 내지 자족(自足)할 줄 아는 참 행복의 비결이자 여유는 부자의 돈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天國)의 생명에서 옵니다. ‘부자의 돈그 커넥션에서 정경(政經)유착을 위시한 사회적 각종 비리나 부정부패, 형제지간의 불화나 반목이나 소송이 빈발하지 않던가요? 심지어 부부지간에도 보험금이라는 돈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상이 예사로 자행되지 않던가요? 먹고 사는데 곧 일용할 양식에 걱정 없는 부자나 전문직 혹은 기득권 신분이 될수록 이상하게도(?) 욕심이나 사심이나 야심은 되레 더 커지고 그래서 더 이기적인 인간형이 되지 않던가요?

 


과연 인생 우리를 망하게 하고,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를 망하게 하는 오랑캐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늘 우리 안에 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가치이자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주색 등에 대한 탐욕과 집착, 거기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개개인을 중독과 불행으로 인도하는 오랑캐는 과연 누구일까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 한국사회를 혼란과 대립으로 인도하는 오랑캐는 과연 누구일까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세속화와 그 어둠으로 인도하는 오랑캐는 과연 누구일까요? 무엇일까요?

 


사람이 돈이나 권력이나 주색이나 도박이나 야심을 먹고 마시고’, 그것들에 취해서 그것들을 더 먹고 마시고’, 그래서 그것들이 거꾸로 사람을 먹고 마셔버리면그 중독 그 악순환의 끝은 늘 파멸이자 멸망이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자 오늘도 세상이 주고 있는 뉴스(news)의 교훈입니다.

그런 세상의 가치관에 너무 목매지 맙시다. ‘거룩한 분별력을 구하며 사는 겸허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자족의 세계를 모른 채 몸도 마음도 세상 각종 탐욕에 이미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을 되레 자랑하며 유세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들을 너무 부러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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