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소크라테스는 그의 고향이기도 한
아테네의 ‘악법(惡法)’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후, 독배(毒杯)를 마시고 죽습니다.
당대 그리스의 유물론적(唯物論的)인 기존의
자연철학과는 달리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 아래,
먼저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학습을 통해
도덕적 행위를 고양시키는 삶을 설파 및 추구했던
그는 그래서 나름대로 ‘영혼불멸’을 믿었습니다.
내세(來世)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평소부터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이해하며 그것을 준비하며 살았던 그는 그래서 스승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크게 슬퍼하는 제자나
회중들에게 태연자약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재앙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째로, 죽음이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일 경우 모든 감각이 없어지고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을 것인데,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로,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길과 같은 것이라면, 생전에 만났던 훌륭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나는 죽음을 통해 귀찮은 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깁니다. 따라서 나를 고소하거나 유죄로 투표한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사형을 받기 위해, 여러분들은 살기 위해 ··· .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느 쪽 앞에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신(神)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당시 지식인인 소피스트들은 청년들에게 학문이나 ‘진리’를 가르치면서 많은 돈을 받았기에 부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돈을 받지 않았기에 늘 가난했다고 합니다. ‘악처(惡妻)의 대명사’로 통하는 그의 아내 크산티페도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가난이 싫어서 남편이 ‘철학자’란 직업을 버리도록 고의적으로 구박을 했다는 일설도 있으니까 한편으론 그 아내의 현실적 고충을 이해할 법도 합니다.
여하간 저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예나 지금이나 ‘죽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과연 지금 누가 더 행복할까요? ‘하늘나라에 가있는’ 저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할까요? 육체의 각종 애환이나 욕심이나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하루라도 더 살고자 아등바등하며 ‘세상에 살아있는’ 우리가 더 행복할까요? 어느 쪽이 더 행복할지는 과연 “신(神)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각설하고,
제가 여기서 좀 상고해보고 싶은 것은 저 소크라테스가 남긴 명언 곧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라는 그 의미입니다. ‘바로 사는 것’을 위한 인간적 내지 철학적 화두가 또한 그가 역설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로 집약될 수 있다 싶으니까요. 그런 ‘소크라테스적 명제’의 의미를 성경속의 인물인 베드로의 경우를 통해서 좀 풀어봅시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를 누비며 살아온 숙련된 전업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한 ‘실패한 인생’으로 귀항해서 처량하게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배(船) 내지 그의 ‘배(腹)’에 말로만 듣던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찾아오십니다. 영적 잉태(靈的 孕胎)일 수 있습니다.
그 배에 앉아 해변에 모인 무리들을 가르치던 예수께선 말씀을 마치신 후, 금시초면인 시몬에게 불쑥 이렇게 지시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누가복음5:4)
전업어부이자 다혈질인 시몬의 자존심이 크게 상할 법도 합니다. 그물까지 이미 씻고 난 후입니다. 그렇잖아도 ‘빈 배 인생’인지라 고달프다 싶은데 다시 나가라니? 다시 시작하라니? 적어도 바다나 ‘바다 깊은 데는’ 어부인 내가 더 잘 안다 싶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무시해버렸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기존의 자기세계를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누가복음5:)
‘그물이 찢어지는’, 이 횡재! 이 기적!
우리가 정작 주목할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시몬은 그때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전혀 엉뚱한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罪人)이로소이다!-(5:8)
시몬은 ‘심히 많은 고기’ 그 소유 그 기적 자체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깊은 바다 속과 자기의 심령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그리스도의 초월성 및 신성(神性)에 주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비 그 비밀에 제대로 열리면 과연 인간 자기의 죄악성 및 자기 한계를 절로 실토 내지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득 제가 20대 청년시절이던 지난날, 저 전라도에 소재한 ‘기독교 동광원수도회’의 고(故) 정인세(鄭寅世) 당시 원장님이 저에게 하시던 말씀이 새삼스레 생각납니다. 서울 태생으로,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도피생활을 하느라 평양신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그분은 수피아 여고 교감, 광주YMCA총무 등으로 활동하다가 ‘빈손의 수도자‘가 되신 분입니다.
이후 소외된 고아나 과부나 장애인들을 돌보며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살다가 82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신 분인데, 제 신앙의 은사(恩師)이기도 한 그분은 60대이던 당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방이 깨끗하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는데,
햇빛이 쫙 들어올 때마다
티끌과 먼지까지 절로 보여 지저분하기 짝이 없더라고.
나이 든 지금도 여전히 그래.
과연 죄인인 인간 내가 나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야!“
진실로 그렇습니다.
‘참 빛’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의 더러운 죄악이나 허물투성이가 절로 보이고 그래서 절로 ‘죄인(罪人)’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 빛’이 들어올수록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죄인의 괴수”가 됩니다.
‘겸손’이라는 미덕이나 인격도 오직 그 깨달음의 크고 작음에 비례해서 옵니다. 상대적으로 ‘죄인’이라는 인간 우리의 태생적으로 타락한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금세 ‘교만한 바리새인’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에 대한 선험적(先驗的) 해답이자 신학적 해답은 곧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절절한 고백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한 해답도 오직 거기서 나옵니다. 철학을 한다고 해서, 봉사나 선행을 한다고 해서, 수도나 수행 정진을 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죄인인 인간 내가 나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불학무식한 시몬 베드로는 그래서 성인(聖人)이자 대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한평생 고뇌하며 구해왔지만 그러나 확신이나 신앙의 세계 내지 ‘천국의 세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너 자신을 알라’는 삶의 참 의미를 깨닫고 그 후 ‘모든 것을 버려두고’(5:11) 예수를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태생적으로 본성이 타락한 ‘죄인’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 구원의 해답을, 바로 뒤이은 ‘나병환자’나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을 통해 제시합니다. 비참한 ‘나병환자’나 ‘중풍병자’의 모습은 또한 타락한 그래서 이기적인 타성이나 죄악성에 사로잡힌 인간 우리의 영혼 곧 ‘속사람’의 은유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 ‘중풍병자’는 이렇게 구원 및 회복을 얻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누가복음5:24~25)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난 ‘기적’ 그 자체가 정작 중요한 목적은 아닙니다. 그 후 그는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그 역시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운명 아래 결국은 죽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나 가치는 초월적 기적 사건이나 기복 및 축복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내지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명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녕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느냐? 정녕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조물주 하나님만 가능한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생 우리가 ‘바로 사는 것’ 그 삶을 위하여 먼저 구해야 할 절대 명제이자 숙제이자 화두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느냐? 못 믿느냐? 그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신비’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을 믿을 수 있는 자는,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천국(天國)의 생명이자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는, 그래서 또한 ‘여자가 낳은 자’인 저 철학자 소크라테스나 저 선지자 세례 요한보다 되레 더 크고 더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in the kingdom of heaven)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태복음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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