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나의 희망은'

이형선 2017. 2. 13. 10:28



-나의 희망은 

 사람의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나로 하여금 내 손으로

 쥘 수 있는 것을 신뢰하지 말게 하소서.

 죽음이 손아귀를 풀어버리면

 나의 헛된 희망은 곧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나의 신뢰를 나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에 두게 하소서.

 나의 희망을 건강이나 힘이나 능력이나

 인간적 재산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두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신뢰하면 모든 것이 내게 힘이 되고,

 건강이 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하늘로 인도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신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나를 파멸로 인도할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삽니다. 그러나 그 희망도 희망 나름입니다. 프랑스 태생의 트라피스트 수도사이자 20세기 걸출한 영성가였던 토마스 머튼의 저 언급처럼 헛된 희망은 곧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그 누구에게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애욕(愛慾)을 먹고 마시고 싶은 욕심이나 욕망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만족하는 욕심은 세상에 없습니다. 만족하는 욕망도 세상에 없습니다. 욕심은 더 큰 욕심으로 인도하고,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인도해서 과연 그 모든 것이 나를 파멸로 인도합니다.’ 종말이 허무한 세상으로, 칠흑 같은 무덤으로 인도합니다

상대적으로 나의 희망, 나의 신뢰를 저렇듯 하나님,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사랑에 둔 사람은 그래서 그것에 먼저 주목(注目)하고 그것을 먼저 구한 사람은 진실로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늘 보다 크고 넓은 하늘의 세계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운명적 한계를 살다가기 마련인 세상에 계신 우리 어버이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 그 영성(靈性)의 비밀이자 그 '보이지 않는 손'의 비밀에 열린 선지자이기도 했던 다윗은 그래서 이렇게 시가를 읊기도 했습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편27:)

 


하나님의 사랑이나 식견이나 베풂이 세상 내 부모의 그것보다 더 작고 좁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형상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자녀들을, ‘아바 아버지를 경외하며 열심히 사는 자녀들을 세상에서 필요한모든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 살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미술이나 음악 등 창조적인 예술의 세계도 그 분야에 대해 보는 눈이나 들을 귀가 열려야만 보이고 들려지듯이, 영안(靈眼)은 그 어떤 육안(肉眼)보다도 더 크고 넓은 희망과 창조적인 세계 곧 하늘나라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눈입니다.

 


필요 이상의희망이나 잘못된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야망이자 야심입니다. 탐욕이자 탐심입니다. ‘세상나라에서 바벨탑 같은 자기 아성을 세우고 내로라 부귀영화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자가 진정한 부자는 결코 아닙니다. 내로라 부유함을 자랑하던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이 그런 것처럼 영안(靈眼) 속사람의 눈에 비친 그것의 진면목은 되레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요한계시록3:17) 자의 모습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듯 “(작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서, ‘필요 이상의소유나 의식주는 축복이 아니라 사치이자 허영이자 낭비입니다. 그래서 ()’가 됩니다. 그것은 장차 복 받을 자들‘(마태복음25:34)’의 삶이 아니라 되레 저주 받을 자들’(25:41)염소의 삶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가치이자 진리입니다.

 


거룩한 분별력을 가지고, 이 세대 내지 그런 부류 인간들의 세상적 성공을 선망해서는 안 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우리를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도해서 불안이나 불만이나 원망, 낙심이나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도 실인즉 사람의 손에 만져지는 희망이나 내 손으로 쥘 수 있는 신뢰를 먼저 구하고 찾는, 그런 왜곡된 가치관에의 선망이나 지향이나 파행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니까요.

 


세상 중심의 돈이나 권력이나 이념 내지 사상 같은 그 모든 역학관계를 사도 바울은 보이는 세계(what is seen)’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이는 것’, 그것들을 악착같이 남보다 먼저 챙기고 더 많이 차지하는 삶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속 있는 처세이자 행세이자 큰 능력 같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눈 곧 영안(靈眼)이나 긴 안목에 열려지면 세상 중심의 그 모든 것이 되레 잠깐(temporary)’이라는 임시적이자 일시적인 미혹이나 미망(迷妄)의 삶 그 덫으로 인도하는 허무한 가치관이자 인생관이자 세계관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작 참 희망이자 큰 능력일 수는 없겠지요?

 


보다 큰 것에 열려지면 작은 것은 절로 시시해지기 마련입니다. 영원한 것에 열려지면 일시적이자 한시적인 것은 절로 시시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나 한시적인 그것을 양보할 수도 있고 배설물처럼아예 버릴 수도 있는 미덕이나 여유를 절로 가지게 됩니다.

제가 그런 삶을 살았던 토마스 머튼이나 사도 바울이 주목하는희망 앞에서 절로 작아지는 것도 여전히 보이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대적 자괴감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주목(注目)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