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동기계 곧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도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창세기1:27) 지으신 ‘가장 고등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왜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애완견이나 소나 양처럼 순한 동물적 의지나 로봇처럼 기계적 복종 의지만 주었더라면 다루시기에 훨씬 더 편하고, 보시기에 훨씬 더 좋았지 않았을까요? 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거역하고 “먹지 말라”는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과 살상(殺傷) 같은 죄악조차도 예사로 자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을까요?
저명한 변증가이자 작가이기도 한 저 C. S. 루이스 교수는 그 이유를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웃과 연합하는데서 오는 행복”을 주기 위해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애완견과의 동물적 관계, 로봇과의 기계적 관계에서 오는 행복은 자발적 인격 관계에서 오는 ‘참 행복’과 결코 비견될 수 없습니다.
개인적 내지 사회적 관계에서 의무적이거나 법적이거나 강요되거나 동원된 사랑이나 애국이 참 사랑이나 애국은 아니듯이, 하나님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그 누구도 그런데서 참 행복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각종 보여주기식 선행이나 의례적인 봉사, 이벤트성 행사 등에서 때론 외려 역겨움이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과연 진정한 감동도 행복도 ‘자유의지’에 의해, 진정성이 있는 자발적 순종이나 사랑에서 발현됩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는’ 순수한 심령의 경지에서 발현됩니다.
고도로 계시적이고 상징적이고 문학적으로 기록된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 당시 사람을 위시한 사자나 늑대 등 ’땅의 모든 동물‘에게 ’식물‘을 ‘먹을거리(food)’로 주었습니다. 초식동물의 세계에서는 이웃의 피를 흘리는 악(惡)이나 살상은 자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공존이 늘 거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낙원’ 곧 ‘에덴’입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every green plant)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세기1:30)
인류가 그런 ‘에덴동산’의 세계를 잃은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교활하고 교만한 ‘뱀’ 곧 ‘사탄’ 곧 악령(惡靈)의 미혹을 받아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면서부터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스스로 신(神)이 되고자, 하나님이 친히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금단의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어버립니다. 인간은 부여받은 그 자유의지로 ‘먹을거리로 주신 푸른 풀’과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구별 및 성별할 수 있어야했습니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구별하기는커녕 되레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어버리는 불순종과 탐욕을 자행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이나 그 후손으로 오늘을 사는 인간 우리 모두에게나, ‘아버지 하나님’과의 신뢰관계이자 인격관계이자 부자관계 그 ‘영적(靈的)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울러 그 후손인 인간들은 하나님(聖靈)이 아닌 사탄(惡靈)의 주술에 사로잡힌 하수인들이 되어 이후 죄악과 살상을 예사로 자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 결과로 땅 위에 ‘노아의 홍수 심판’이 임했고, 심판으로 인해 땅의 태초의 질서가 파괴된 시대에 이유 있는 ‘육식(肉食)’(창세기9:3)이 허락됩니다.
따라서 한편으론 ‘동물의 피’ 혹은 ‘이웃의 피’를 흘리는 ‘인간의 탐욕’ 그 상징적 의미일 수도 있는 ‘육식’은 타락의 결과이자 심판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완악해진 시대’에 하나님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 ‘이혼(離婚)’을 허용하신 사례가 그런 것처럼, 본래적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허락된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식을 하셨고, 저도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간혹 육식을 합니다만, 사람에게도 짐승 상호간에게도 ‘육식’은 피를 흘리는 살상을 자행할 수밖에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나 생존경쟁의 논리가 허락된 비정상의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구약의 대선지자 이사야는 궁극적이자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이자 ‘평화의 나라’이자 ‘공존의 나라’에서 육식이나 그런 유형의 탐욕은 사라질 것이라고, 이렇게 예언 및 선포하고 있으니까요.
-(그때에)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straw)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땐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바다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11:7~9)
따라서 인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로 ‘먹어야할 육식(肉食)’과 ‘먹지 말아야할 육식’을 또한 현재적으로 구별 및 성별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명작 〈의사 지바고〉에서 유리 지바고가 “인간에겐 인간이 늑대”라는 독백을 합니다만, 그렇듯 인간이 인간을 짐승들이 ‘육식’하듯 이기적으로 수탈해서도 착취해서도 살상해서도 안 된다는 것. 사람다운 사람됨을 잃어버리고, 정치적이나 경제적이나 이념적인 동물 내지 짐승이 되어 이웃의 생명이나 인격을 함부로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래’만 보고 사는 동물이나 동물의 세계와는 달리, ‘위’에 계신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웃과 연합”할 수 있는 지고한 ‘아가페’의 사랑에 자발적으로 열려져야할 것입니다. ‘사람’ 곧 헬라어 ‘안드로포스’는 ‘위를 보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니까요. ‘하늘을 보는 존재’가 사람다운 사람 곧 ‘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참 사람’을 본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아가페)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3:18~19)
지고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저렇듯 ‘충만하게’ 체득한 사도 바울에게는, 거기서 생수처럼 솟아나는 기쁨이나 평안이나 영원한 생명이나 행복을 소유한 자에게는, 과연 저 루이스 교수의 표현처럼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에로스)조차도 물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그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유의지’로 이기적인 돈의 노예나 권력의 노예나 주색의 노예 등 각종 탐욕과 야심의 노예가 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허무한 그래서 불행한 사례가 얼마나 많던가요. 광화문 광장이나 시청 광장에서 “자유를 달라”고 외친다고 해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화’되었다고 해서 참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요.
그래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오늘도 ‘들을 귀’ 있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조용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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