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

이형선 2017. 2. 20. 10:52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serenity),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courage),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wisdom),

저에게 주시옵소서.-

 

                

                              -라인홀드 니버-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의 성격이나 감정이나 습관 등에 얽힌 대내적 문제나

인간관계나 정치 경제 사회 등 시국과 얽힌 대외적 문제에 늘 직면하고 삽니다.

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크고 작은 그 모든 문제를

내가 바꿀 수 있는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와 변화시킬 수 없는 문제로 양분하고 있습니다.

 


경쟁사회를 사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에게 경쟁은 있기 마련이지만, ‘하면 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이웃이라는 인간의 생명이나 존엄성이나 공익(公益)을 해치는 이기적인 탐심이나 야심이 꿈이나 비전은 결코 아니니까요. 인내해야 할 때 용감하게저항해서는 안 되고, 저항해야 할 때 인종만을 강조해서도 안 되니까요.

물론 인내나 인종은 미덕이지만, 때론 건전한 비판이나 저항이 그 미덕보다 더 큰 가치인 사회적 공의이자 정의이자 공동선일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매사에서 (yes)’아니오(no)’의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가 먼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해야 할 때 아니오하고, ‘아니오해야 할 때 하는 것은 결코 지혜가 아니니까요. 되레 악()일 수 있으니까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Yes),

 아니라 아니라(No)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태복음5:37)

 


옳다하거나 하면 거기 평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오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저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과연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웃이나 사회나 국가를 고치고 변화시키는 것보다 자기를 고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늘 더 어렵다는 그것입니다. 먼저 아니오라고 자기를 부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용기와 결단력을 가진 자이고, 그런 자가 나아가 정의와 공동선을 헌신적으로 구현할 수 있고 그래서 사회와 국가를 고치고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above all else)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언4:23-) 

 


따라서 우리가 더욱힘써야 할 숙제이자 먼저구해야 할 숙제는 과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서 바르고 선하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참 지혜, 올바른 지혜, 그것이 내 머리’, ‘내 판단력으로만 가능하던가요?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를 두는 경우가 외려 많지 않던가요? 



저 라인홀드 니버는 해박한 학자이자 교수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머리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자기의 실존적 한계를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먼저 하나님께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솔로몬보다 더 큰 자인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늘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통해 필요한 지혜이자 참 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곧 ()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화입니다. 따라서 기도이자 대화는 '거룩한 산'에서도, 골방에서도, 거리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사회 현장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그 지혜가 이 땅, 이 사회 곳곳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편,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의 주인공인 덴마크 왕자 햄릿은

운명적 곤경 내지 딜레마에 빠졌을 때,

주관적인 내 머리, 내 판단력, 내 감정에 의지하여 이렇게 고뇌하며 갈등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화살이 꽂혀도 죽은 듯 참는 것이 장한 일인가.

 아니면 창칼을 들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 세대를 본받아’, 이 세대의 복수혈전적 앙갚음이나 촛불이냐 태극기냐식의 정치적 내지 정파적 좌우이념이나 패권투쟁논리를 본받아(?), 후자를 택한 햄릿.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지혜도 아니고, 진정한 용기도 결단력도 아니었습니다. ‘는 피를 불러오고, ‘은 칼을 불러오고, 패권은 패권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그 결국은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아도, 비리와 불의와 불륜을 공모 및 자행한 왕도 왕비도, 햄릿 자신도 죄다 죽음으로 끝나는 살벌한 비극의 장 그것이었습니다. ‘이 세대의 지혜’, 그것의 결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햄릿도 저 라인홀드 니버처럼 먼저 겸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더라면, 서로 진솔하게 회개하고 용서하고 화합해서 서로 복되게 사는 구원의 장이 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크고 작은 일상적 사건 앞에서, 지금 우리가 구하고 행하는 지혜는 과연 어느 쪽의 것일까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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