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서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의하면,
동진(東晉)의 숙종은 지혜롭고 문무에도 능한
어진 임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숙종이 태자로 있던 어린 시절 어느 날.
장안(長安)에서 어떤 귀빈이 와있을 때,
아버지 원제(元帝)가 태자에게 화두를 던지 듯
이렇게 묻습니다.
“장안이 가까우냐? 태양이 가까우냐?”
태자의 대답인즉. “장안이 가깝습니다.”
원제가 그 연유를 묻습니다.
“장안에서는 사람이 와있어도 태양에서 온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니까요.“
태자의 재치 있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원제는 흐뭇해합니다.
그런 얼마 후.
여러 신하들과 한담을 나누던 자리에서
원제는 똑같은 질문을 다시 태자에게 던집니다.
“장안이 가까우냐? 태양이 가까우냐?”
그런데 이번엔 태자의 대답이 다릅니다.
“태양이 가까울 것입니다.”
의아한 원제가 그 연유를 묻자 태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 머리를 쳐들고 보니,
태양은 보이는데 장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태양이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 무렵, 권력과 왕의 자리까지 노리는 흑심과 탐심을 품고 있던 왕돈(王敦)은 그렇게 영특한 태자를 미리 제거하고자 갖은 모략을 획책하지만 그러나 성공하진 못합니다. 그러다 원제가 물러나고 태자가 숙종으로 즉위하자마자 그 과도기의 빈틈을 역용해서 왕돈은 거병하여 역모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숙종의 군사에게 패하고 왕돈은 결국 병들어 죽습니다. 그러자 숙종의 참모들이 왕돈의 형제와 그 일족을 이번 기회에 모조리 죽여 없애버려야 한다고 강권합니다.
그때, 내란으로 온통 혼란에 빠진 채 여야(與野)로 양분되어 분열과 대립을 일삼는 나라와 백성들의 화합과 평안을 회복 및 도모하고자 크게 고심하던 숙종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죄를 그렇게 확대시킬 필요는 없다. 그 일족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풀어보자면,
원수에 대한 “징벌이 가까우냐? 용서가 가까우냐?”라는
질문에 “용서가 가깝다”고 답변한 셈이 됩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속언이 있습니다만,
실인즉 인간 우리 모두는 감정이 우선하는 ‘동물’이지만 그러나 주먹보다 때론 법보다, 용서나 자비나 은혜가 가까울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보다 큰 가치 큰 평안 큰 화목 큰 세계를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나’를 희롱하고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저 무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사(赦)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23:34)
한편,
저 ‘장안’이 육신이나 이성(理性)이나 재물 같은 ‘보이는 세상’ 세계라면, 저 ‘태양’은 심령이나 신앙이나 생명 같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세계라고 풀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령이 열리면 ‘보이는 세상’만 현실 세계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도 현실 세계입니다. 되레 더 큰 현실 세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해봅시다. 명제나 화두는 다양할 수 있겠지요.
“세상이 가까우냐? 하늘이 가까우냐?”
“이념이 가까우냐? 존재가 가까우냐?”
“재물이 가까우냐? 하나님이 가까우냐?”
“사람의 일이 가까우냐? 하나님의 일이 가까우냐?”
“떡이 가까우냐? 말씀이 가까우냐?”
“원한이 가까우냐? 용서가 가까우냐?”
물론 세상 현실이나 육신이나 이성이나 떡도 경시해서는 안 되고, 사회정의와 질서를 위해 죄악에 대한 응분의 형벌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나 ‘태양’ 곧 큰마음이자 우주의 마음이자 공평한 세계이자 자비의 세계일 수 있는 ‘하늘나라’ 빛에서 멀어지면 ‘장안’도 세상도 인생도 그 운명도 절로 어두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상대적 경쟁과 불안 속에서 염려하며 괴로워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8:12)
정녕 그렇습니다.
‘태양’은 인격(人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세상의 빛'은 아닙니다. 인격만이 인격을 살릴 수 있고 세상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도 ‘임마누엘’ 사건을 통해 친히 인격(人間)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 아닙니까. 자기희생을 통해 ‘대속(代贖)의 빛’을 발산하는, ‘섬기는 인격’으로 말입니다. 과연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빛’이자 ‘존재의 빛’입니다.
생명이자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면, 천만금의 재산도 대단한 정치권력도 다 어둠 속의 거래이자 소유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결국이 헛되고 허무한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 “세상의 빛”이라고 스스로 선포하시고 십자가 희생의 삶과 부활(復活)의 생명으로 그것을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인생 우리들에게, 서로를 위해 하늘의 복이 있는 참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그의 나라와
그의 의(his righteousness)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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