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인생의 '재앙'과 하나님의 '평안' 사이

이형선 2017. 3. 27. 10:28



조선 사회를 지배해온 유교적

통치이념의 후진성에 회의와 한계를

느끼고 현실개혁론을 주장한 선비들을

우리는 실학파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18세기 그 대표적 인물들로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을 꼽던데,

벼슬길이나 부귀영화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가난한 민초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이론이 아닌 실천적 삶으로

그것을 구현하고자 했다는 모범에서는

연암 선생이 다산 선생보다 되레 앞선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더군요.

 


여하간 중국 청나라 문물은 물론이고, 천주학이나 천문학 등 서학(西學)의 종교나 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고 선진적 세계를 배워야한다고 주장했던 조선의 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그의 청나라 여행견문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기록에 보면, 그는 강이 흐르는 물결소리에서 인생이 흐르는 깊은 소리를 듣고 있는데, ‘대통령 탄핵’, ‘대선정국’, 북한의 핵개발이나 남한의 사드, 중국의 사드 보복 등 하룻밤에도 아홉 번넘는 을 건너야하는 시대의 물결소리 때문인지 요즈음 그 일화를 다시금 음미해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두 산 사이에서 흐르는 강물의 물결 그 흐름을 눈이나 귀로 보고 들을 때, 그것이 때론 성난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론 물귀신과 하수(河水)의 귀신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엄포하는 듯두려운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암은 '눈이나 귀로 나타난 현상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강물 소리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에는 그것이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소리같이 들리고, ‘분노한 마음에는 그것이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들리지만 강물 그 속은 마냥 잔잔하다는 것입니다.

 


-,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마음이 평안한 자는 귀와 눈이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만 더욱 밝혀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옛적에 우()가 강을 건너는데, 누런 용()이 배를 등으로 들어 올려서 극한의 위경에 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조차 각오한 마음을 가지자 상대가 용이거나 지렁이이거나 혹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관계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정녕 그렇습니다.

극한의 위경이나 재앙에 처하면 누구나 무섭고 두렵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죽음조차 각오한 마음을 가지면 더 이상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상대가 이건 미꾸라지지렁이건 간에 말입니다. 가장 강한 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라고 했던가요? 부자나 재벌일수록 권력 앞에서 비위 혹은 비리를 맞추며 눈치를 많이 보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가장 강한 자는 실인즉 필요 이상의 욕심 부리지 않고 자족(自足)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여하간 죽음조차 각오한 마음에서 되레 강의 크고 작은 모든 풍파를 이기는 평안이 온다는 것을 깨달은 연암 선생은 그 자체를 인생의 ()’라고 정의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몸소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상에 올라,

그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 입장에선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고,

절망도 허무도 크기 마련이니까요.

그분이 로마제국치하에서 망국 이스라엘을 구원해서

다윗 왕 시대 같은 부국으로 인도할 정치적 메시야라고,

왕 내지 대통령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그럴 수밖에요.

게다가 제자들은 우리들도 잡혀서 주님처럼

처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어야했습니다.

사흘 만에 신비하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주신 첫 말씀에 주목해봅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았더니(locked)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20:19~21)

 


살기등등한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 잠가두었는데’, 마음의 문도 꼭 잠가두었는데’, 거기 제약을 받지 않고 막말로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두 차례나 반복,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성령(聖靈)’을 주시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평강곧 헬라어 에이레네평안, 평화, 화평등을 의미합니다. 볼 장 다 봤다, 끝장났다 싶은 그 극한의 절망이나 허무의 순간에도, 무섭고 두려운 재앙의 파도가 밀려오는 시간에도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설령 인생살이에 실패했어도, 죽을병에 걸렸어도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이렇게 초월적이자 현세적인 부활의 세계, 하늘나라 세계는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piece)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14:27)

 


진실로 그렇습니다.

인생과 인류를 살리는 진정한 평화나 평안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나 오늘의 미국의 평화중국의 평화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국주의나 위에서 군림하는 통치자의 정치권력에서 오는 평화가 결코 아니라는 것. 세상을 이기는, 너와 나를 살리는, 진정한 평화나 평안은 오직 아래서 섬기는 그리스도의 평화이자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29:11)

 


망국의 한을 안고 바벨론 포로 신세가 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재앙입니다. 그러나 그 재앙그 절망의 질곡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내지 안식은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와 희망을 주는평안이자 세상을 이기는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약시대 저 제자들에게 역시 치명적인 재앙입니다. 끝장 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앙그 절망의 질곡에도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내지 안식은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와 희망을 주는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聖靈)을 받은 후 비로소 그 초월적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을 이기는그리스도의 평안, 그 자체가 하나님의 평안이자 안식(安息)이고, 그것이 진정한 ()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그런 제자들 곧 더 큰 가치의 세계이자 영원한 세계를 친히 본 제자들은 절로 죽음조차 각오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가 가진 그런 마음과는 또 다릅니다. 이타적인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자 각오한 마음이자 순교하고자 각오한 마음이니까요. 과연 그렇게 죽음조차 각오한 마음은 용도 미꾸라지도 지렁이도 상관하거나 훼방하지 못합니다. 권력도 재물도 정욕도 세상 영광이나 인기도 시험하거나 미혹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되레 감당하지 못하기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브리서11:)

 


저런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앞에서 저 자신부터가 왠지 절로 부끄러워집니다. 이미 부자나 재벌이 된 영적(?) 지도자들이 물질주의나 세속화 신앙의 속물적 모범을 보이며 내로라 행세하는, 그래서 날이 갈수록 짠맛 잃은 소금이 되어가는 오늘의 기독교신앙풍토가 또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어떤 모범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까요? 잘 먹고 잘사는 이기적인 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이 중요한 것일까요, ‘이타적인 하나님을 위한 나의 삶이 중요한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죽음을 각오한 마음과 그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케노시스(비움과 낮아짐)의 삶', 그 참 신앙인격의 목적과 가치관을 , 부터 다시 배워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예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누가복음9: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