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인생은 '사명을 수행하는' 여정인 것을

이형선 2017. 4. 10. 10:35



-우리의 인생을 사명(mission)으로 생각하고

 살면 우리는 우리에게 떠나온 집이 있으며,

 그리고 그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사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한동안

 먼 나라에 와 있는 우리 자신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가 전달되고, 사업이 완수되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수행한 사명을

 설명하고 고된 일에서 벗어나 안식하기를 원합니다.

 가장 중요한 영적 훈련의 하나는

 우리의 삶의 시간들이 사명을 수행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점점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인생은 분명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길입니다. 그러나 나그네도 나그네 나름입니다. 목적지가 있는 행복한 나그네가 있고, 그것이 허황하거나 허무한 그래서 불행한 나그네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나그네 생활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인생 우리의 모습 자체가 그런 것처럼 고생스럽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온 집내지 돌아갈 집내지 본향(本鄕)’의 실재를 알고 있는 나그네는 목적과 목적지가 있는 여행을 하는 순례자(巡禮者)의 여정처럼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떠나온 집내지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은 고아나 노숙자의 삶처럼 불행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목적과 목적지가 없는 방황의 삶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허무한 여정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문득 전후 시대의 마지막 순수시인이자 기인으로 통했던 고() 천상병 시인이 다시 떠오릅니다. 인생 여정을 소풍길이라고 노래했던 그분은 일찍부터 시와 문학평론 등을 통해 남다른 기지를 발휘했던 분입니다. 그러나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억울한 죄목으로 중앙정보부에서 6개월간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룬 후 폐인처럼 되어 석방됩니다. 이후 그는 가난과 주벽(酒癖)을 앓으며 노숙자처럼 떠돌다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가톨릭신자가 되어 절대자 하느님의 실존을 믿었던 그분은 일찍부터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신심을 간직하고 있었던 탓인지 여하간 저를 포함한 우리가 오늘도 애송하는 명시 귀천을 남겼습니다. ‘천상병 전집원문에는 이 시에 ‘-주일(主日)’이라는 부제도 붙어있다는 걸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시 문학에 그치지 않고, 시인의 신앙고백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세상적인 상식이나 가치기준에서 보자면,

시인 천상병은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그러나 저 시, ‘-주의 날(主日)’ 고백 앞에서 누가 감히 저 시인을 불행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말할 수 있는 하늘 본향과 절대자 하나님을 알고 믿었던 그는 되레 하늘의 복이 있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저 시인 천상병을 고문했던 중앙정부부장도, ‘절대권력이라던 대통령도 다 빈손으로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이 영원한 권력자는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늘에 계신영원한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돌아갈 본향인 하늘의 나라와 그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그 진리 그 계시 그 가치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이 곧 저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이 언급한 인생을 사명(使命)으로 생각하고 사는삶 그 자체이니까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인 예수께서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잔뜩 진채 나그네의 길을 가는 인생 곧 태생적으로 이미 타락한 그래서 허무한 죄인의 길이자 죽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거듭난 인생이 되어 돌아갈 인생의 참 목적과 목적지를 알고, ‘나그네의 길이 아닌 사명의 길을 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11:)

 


섬김을 받는세상 정치권력의 교만한 마음을 배운 자에게 마음의 쉼이 있던가요? 재벌에게 축재와 행세를 배운 자에게 마음의 평안이 있던가요? 한마디로, 대통령과 청와대 안팎의 실세들이 줄줄이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는 오늘의 상황이 그에 대한 답변의 압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섬기는그리스도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이 마음의 쉼(安息)을 얻는 복된 인생의 길입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성현도 위인도 많지만 참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만나는 일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은 그래서 과연 선결의 과제이자 지고의 숙제입니다.

 


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한마디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자기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아이와 어른을 막론하고, 우리가 고난과 고통 가운데 빠질 때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르는 것도 거기 마음의 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성애의 마음엔 자녀의 대소변 같은 오물이나 배설물조차도 전혀 더럽거나 역겹지 않습니다. 자녀를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뼈 빠지도록 일하는노동이나 고역도 전혀 어렵고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도, 어머니도, 기꺼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말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으면, 어머니의 모성애를 받으면, 그렇게 섬김의 사랑이 절로 다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배우면 우리 몫의 인생에도 있을 수밖에 없는 고난지경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숙되면 사명(使命)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명으로 귀결됩니다. 마더 테레사도 그렇게 고백했고, 저 헨리 나우웬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인생은 그렇게 사명을 수행하는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명이 사명되려면, ‘어머니의 마음이나 어머니의 사랑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거기서 분별됩니다. ‘내 자녀, 내 혈육만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사랑그 사명 그 편협한 한계를 벗어나는 그것이 인류적이자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이자 그리스도의 사명이니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우리의 이웃을 포함한 모든 인생이 다 내 형상이자 내 자녀들이니까요.

 


가출한 탕자탕녀처럼 제멋대도 살던, 그런 인생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선 대속(代贖)의 멍에인 십자가를 지고 거기 못 박혀 내 대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내 자식이 탕자탕녀 된 것도 다 어미인 내 탓이요,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제발 내 자식은 살려주시오!’, 그렇게 재판장에게 애원하는 어머니처럼 대속의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대속물희생양이 된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명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예수 그리스도께선 저 예언이자 말씀을 입으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낮은 곳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리이자 저주받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선 대속의 십자가 그 현장에서 다 이루었다고 지극히 행복한 선언 및 선포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19:30)

 


다 이루었다곧 헬라어 테텔레스타이는 구약에 계시 및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대속의 죗값을 다 치렀다는 의미입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서의 사명(mission)‘을 다 이룬 것입니다. 죽어야 마땅한 내 죄악의 빚, 내 운명의 빚을 내 대신 다 치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시대적 사명입니다. ‘자기 십자가곧 우리 몫의 십자가 그 사명이 숙제이자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명을 진실로 깨달은 자는, ‘일만 달란트라는 생명의 빚 내지 은혜의 (debts)’을 진 자는, 더 이상 값싼 은혜나 이기적 내지 기복적인 '반쪽복음'만을 운위하거나 간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울러 세상 앞에서, 크든 작든 우리 각자 몫의 사명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행복하게죽을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스스로 큰 자혹은 큰 종행세만 하다가 되레 장차 ‘() 많이 맞을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되겠지요?     

 


-주인의 뜻(*사명)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12:4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