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나 축복은 물질의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다시 말해서, 행복이나 축복은 피조물인
어떤 물질이나 역시 피조물인 인간의 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만 달려 있다.
이 말도 들어보라.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신 역사들과 놀라운 일들
‧‧‧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는 일까지도 그것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밖에서 맴돈다면,
절대로 나를 복되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하나님이 하나의 사건으로,
내면의 지식으로, 사랑으로, 그리고 느낌과 맛으로
내 안에 존재하는 그만큼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축복받은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누구도 불행하거나 버림받거나 저주받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행복이나 축복을 저 루터의 지적처럼 ‘피조물’인 세상의 어떤 ‘물질’이나 ‘인간들’이나 ‘나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는데 있다는 바로 거기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행복을 ‘피조물’인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심지어 역시 피조물인 특정 남녀를 ‘내 것, 내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상대적 소유의 성공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
그 누구도 진정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신하가 근세사의 영웅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폐하, 폐하께선 폐하의 생애 중 행복한 날이 얼마나 되시는지요?”
“전 생애에 걸쳐, 나의 행복했던 날은 채 일주일도 안 되지!”
그렇게 답변한 나폴레옹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뇌까렸다고 합니다.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세상에 오고간 사람들의 눈물이요,
육대주에 부는 바람소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숨소리로다!“
세상의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다 소유한 자일 수 있는
솔로몬 왕도 행복했다고 고백하지는 못했습니다.
되레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1:2~3)
과연 그렇습니다.
‘해 아래서’ 곧 ‘보이는 세상’이라는 ‘피조물의 세계’에서 우리가 구하고 찾는 모든 것은 남달리 많이 차지했어도, 남달리 노력해서 남달리 성공했어도 자만하거나 교만할 것은 없습니다. 그 결국이 ‘헛되고 헛되니까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가는 ‘피조물’이기에 그 결국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자 솔로몬은 인생후배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흙(肉)은 여전히 땅(*죽음)으로 돌아가고,
영(靈)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7~8)
말을 바꾸자면, 참 행복이나 축복은 피조물의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그것을 기억하라, 그것을 명심하라는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죽음’이라는, ‘초상집’이라는, 인생의 저 한계 저 숙제가 풀려지지 않으면 세상살이나 인생살이의 ‘모든 것’은 소유해도, 성공해도, 그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이자 탄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곧 영(靈)이신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에 계시 및 예언된 그대로 ‘육신을 입고(成肉身)’ 인간 예수가 되어 세상에 친히 오신 것도 참 구원과 행복과 축복의 삶은 어디서 오는가?, 그 인류의 영원한 숙제에 대한 해답을 친히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인생고(人生苦)는 물론이고 ‘죽음’의 세력조차 이기는 ‘부활’의 세계,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친히 보여주며 그 천국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대속의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나 사흘 후에 부활하여 그 신비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제자들에게 나타나 친히 보여주며 증언 및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난 자리에는 없었던 그래서 그 ‘복된 소식(福音)’을 간접적으로 듣기만 했던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오늘을 사는 우리처럼 이렇게 회의 및 불신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한복음21:25)
하긴 죽어서 무덤에 장사까지 치른 분을 누군가가 “부활했다”고 말하면 의심하는 게 차라리 이성적이자 상식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환상을 보거나 헛것을 본 것이겠지? 그래서 스스로 형성한 허구의 세계이자 종교적 교리 내지 주관적 도그마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나 신앙의 세계는 이성(理性)의 세계나 상식의 세계를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과 그 성령과 말씀의 비밀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다 세상이나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는, 비현실적 비전이나 가치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초월적 세계의 신비를 현세적으로 체험하고, 세상보다 크고 영원한 행복이자 축복이자 가치인 그 하늘나라 그 초월적 세계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여드레’가 지나서, ‘제자들이 집안에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역시 문이 꼭 잠겨있었는데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렇게 체험적이자 인격적으로 신비한 예수 체험 및 성령 체험을 한 도마, 그렇게 부활하신 그래서 오늘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확인한 도마는 그제야 절로 탄성을 지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조차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이자 참 행복과 축복의 세계 그 실재를 확인 및 확신한 자의 탄성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21:)
이성적이나 과학적이나 진화론적이나 유물론적인 견해에 의하면, ‘본고로 믿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행복한 사람이자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고 믿는’ 모든 것은 또한 ‘보고 믿는’ 모든 것 그 형상 그 성전(건물) 그 한계에 갇히고 맙니다. 따라서 말을 바꾸자면, ‘보이는’ 물질의 세계나 이성(理性)의 세계에 사는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계시 및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보이지 않는’ 성령(聖靈)의 세계나 신앙의 세계에 사는 자가 “복되도다”, 그런 의미일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4:18)
정녕 그렇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겉사람’의 세계는, 다 ‘잠깐’입니다. 흐르는 저 강물처럼 저 구름처럼 다 '잠깐'입니다. 죽음에서, 초상집에서, 죄다 끝나버리는 ‘잠깐’이자 한계입니다. 그래서 현자 솔로몬이나 영웅 나폴레옹의 저 고백이나 탄식처럼 죄다 허망하고 허무한 것들뿐입니다.
상대적으로, 그러면 그럴수록 ‘부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의 비밀이자 금세와 내세로 통하는 ‘영원한 천국’의 비밀한 문제는 인간 내지 인류의 절대 숙제이자 숙원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영원한 천국’의 비밀에 체험적으로 열린 사도 바울은 그래서 저 ‘보이지 않는 것’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 곧 세상의 ‘선악과’ 등을 먼저 구하며 거기 연연하다가 결국 불행과 저주와 죽음의 길을 간 인류의 조상 ‘첫째아담’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것’을 늘 먼저 구하며 살다가 부활 및 승천하신 ‘둘째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가서 계신 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어서 죽어(?)’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고백할 만큼, ‘주목하고 있는’ 종말적 천국 그 집 그 푯대 그 실재에 대해 확신(確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린도후서8~9)
사도 바울은 과연 세상을 이기는, 보이는 것을 이기는, 인생의 참 행복이나 축복의 세계 및 그 기쁨의 가치를 알았고 아울러 그런 삶을 치열하게 살다간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참 제자입니다.
상대적으로 오늘의 우리가 세상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천국의 비밀, 그 ‘보이지 않는’ 성령의 세계 및 ‘속사람’의 비밀을 저 사도 바울이나 제자들처럼 확신(確信)하고 있는 것일까요?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자족하며, 이웃을 섬기는 헌신의 삶은 물론이고 처참한 순교조차도 ‘담대하게, 기쁘시게’ 자원할 만큼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 ‘거룩한 확신’이 있다면 삶으로 또한 ‘거룩한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겠지요? '거룩한 확신'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및 행복이나 축복의 관계, 그 관계의 뿌리이자 반석이니까요.
오늘의 개신교(改新敎)가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저 솔로몬 왕이나 영웅 나폴레옹 유형의 성공이나 번영이나 부귀영화 같은 ‘잠깐의 열매’ 그것을 누리며 사는 삶이 곧 하늘의 참 행복이나 축복의 삶인 양 설파하며 그 모범을 보이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세속화된’ 모습이자 타락된 상태입니다. 그것은 ‘첫째아담’이나 저 유럽교회들의 전철 곧 허무한 불행이나 퇴락이나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자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신교가 다시 개혁(개신)되어야한다”는 목소리나 필요성이 안팎에서 고조되는 오늘의 시대를 살면서, 제가 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고백을 다시 곱씹어보는 것은, 그런 시대적 요구도 또한 개인적 참 행복이나 축복도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밖에서 맴돈다면’ 역시 아무 소용없다는 데 대한 공감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啓示)하는 일까지도 그것들이
내 안(*속사람)에서 일어나지 않고 밖에서
맴돈다면, 절대로 나를 복되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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