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가나안마을', 정자나무 아래서

이형선 2017. 10. 9. 09:26



심은 이는

있어도

주인은 없다.

나그네여도 좋단다.

탕자여도 좋단다.

현존(現存)이 주인일 뿐.

찾는 이에게

늘 열려있는 자리.

돌아온 이에게

늘 열려있는 안식.

 


거듭나면()

죽어도살리()

가나안마을’,

그 수문장처럼

그 십자가처럼

동구 밖에

여전하게 서있는

정자나무.

오랜만이구나.

늘어지도록

품이 더 커졌구나.

 


타향 나그네로

예까지 살아온,

지나온 광야 세월의

내 갈지()자 걸음.

훔치는 땀방울이

굵고 거칠수록

더욱 커 보이는

정자나무 아래.

돌베개를 베고 자던

베델에서의 체험,

그 하늘의 언약처럼

그 하늘의 은혜처럼

더욱 커 보이는

정자나무 아래.

 


이젠,

청록의 산하가

과거사처럼

한눈에 들어오고.

바람 한 자락에도

마음은 열려지고.

가을 잔골 단풍마저

내 이웃이 되고.

나와 한 몸이 되고.

 


세월아,

너무 재촉 마라.

너무 닦달 마라.

무서리 내리는 날,

미련 없이 떠나리라.

세상아,

너무 상관 마라.

너무 난 체 마라.

너보다 '말씀'이 더 좋아

'말씀'을 좀 더 먹다

빈손으로 떠나리라.

이젠,

하늘마을(天城)’을 향해

순례자로 떠나리라.

 

 

  

   *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삽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세기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