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사람에게 있는 '두 가지 병'과 '괴이한 일'

이형선 2017. 10. 2. 11:50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그 전쟁을 앞서 예견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하여 ‘10만 양병설(養兵說)’

적극 주창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

그것은 당시 후진적 안일에 빠져있던 조국과

민족을 향해 깨어있어야 한다!”

선지자적 외침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의 권력이나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던 당대의 임금도 조정도 사대부들도

율곡 선생의 저 선견지명을 입 모아 비난하며

무시해버렸고, 정작 전쟁이 터진 후에야 다들

가슴을 치고 한탄하며 후회했습니다.

 


기실 인생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개개인의 경우에도 국가 차원의 경우에도

때론 원치 않는 전쟁같은 불행한 사건은 종종

터지기 마련이니까, ‘깨어있어늘 준비하는

종말론적마음과 자세는 늘 필요하고

그 자체가 복된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선지 그분은 오천원권 지폐를 통해

또한 그분을 키운 어머니 신사임당은 오만원권

지폐를 통해 오늘도 우리와 늘 대면하고 있는

사표(師表)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율곡 선생에게 어느 날,

생질 곧 누이의 아들인 홍석윤이 찾아와서

이런 내용의 부탁을 드렸다고 합니다.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경계될만한 말씀을 좀 주십시오.”

그래서 외숙인 율곡 선생이 조카에게 써주었다는

증홍생석윤(贈洪甥錫胤)’ 중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는데, 하나는 혈기(血氣)의 병이요 하나는 지기(志氣)의 병이다. 혈기의 병은 의원에게 묻고 약을 구하여 외물(外物)로 치료할 수 있고, 지기의 병은 자각하고 자수(自修)하여 마음으로 치료할 수 있다. 외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그 권한이 남에게 있고, 마음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그 권한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권한이 남에게 있는 혈기의 병은 치료하려고 애쓰면서, 그 권한이 나에게 있는 지기의 병은 조금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

 


그러니까 율곡 선생이 말한 사람에게 있는 두 가지 병은 곧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이 되겠습니다. 실인즉 우리는 육신이 병들면 서둘러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하려고 애쓰지만, 자기 마음 내지 정신이 병들면 조금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연 괴이한 일입니다.

 


당시 저 조카 홍석윤은 시쳇말로 이른바 ‘3D업종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직업은 기피하며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긴 설령 그런 젊은이다 쳐도 그런 마음의 병을 직설적으로 꾸짖으면 그것도 큰 스트레스가 될 테니까, ‘경계될만한 말씀을 줄 때도 저 율곡 선생처럼 우회적으로 배려하는 지혜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필요하다 싶습니다. 그럴 것이 어른들이나 윗사람들에게서 받는 각종 스트레스 같은 마음의 병도 결국엔 육신의 병이 된다고 하니까요.

 


굳이 임상적인 발병 상태나 사례가 아니더라도, 실인즉 우리 인간의 애증 탐욕 원망 불평 시기 대립 반목 등은 다 마음에 비롯됩니다. 걱정 근심 불안 낙심 절망 등도 다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며 섬기며 살리기보다는 상대방을 무조건 이기고 그래서 지배하고 싶고, 내 자존심이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은 옳은 말이다 쳐도 듣기 싫어하고 되레 반항 내지 반격하는 행태 역시 다 자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때론 가해자로 때론 피해자로 살아갑니다.

 


나아가 개개인 간은 물론이고, 좌우 이념 간에도, 정치권력 간에도, 남북 민족 간에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받아치는 주먹이나 실정법, 무력이나 병력으로의 응징이 당장의 정의가 되고 복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실상인즉 돌아서면 그런 마음의 세계에선 쌍방에게 진정한 평안이나 평화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오리를 억지로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5:38~42)

 


물론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기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성정이나 이성에 의하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타락한 우리의 심령이나 이성의 뿌리는 악한 자원수를 대적해서 쳐부수고 죽여야한다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악한 자원수가 바로 자기혈육인 내 친자식이나 내 친형제자매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마음의 시야가 열리거나 바뀌면, 입장은 절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식이나 불효자식이라 해도 그런 내 자식을 주먹이나 실정법으로 다스려서 교도소에 집어넣거나 대적해서 쳐부수고 죽여 버리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안에서 악한 자원수은혜를 모르는 자지극히 작은 자를 포함한 모든 인생 내지 이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의 자녀이자 형제자매로 보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큰마음내지 하나님의 마음에서 보면, 저런 자발적 굴욕이나 자발적 손해나 자발적 불편이나 자발적 선행의 감수가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서 자발적인 희생양이 되어 대속(代贖)의 십자가까지 짊어지신 것이겠지요.

 


상대적으로 지금 우리의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 될까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마음을 본받으며 산다고 입으로 고백은 하면서도 실상인즉 여전히 밴댕이 소갈머리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여전히 이기적인 삶이자 교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인생을 살아볼수록 우리는 체험을 통해 진리의 진리 됨을 또한 후회하듯 절감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안이나 안식은 자기를 부인하며 자존심(自尊心)을 낮추고 주존심(主尊心)을 높일 때, 그 말씀을 말씀되게 실천할 때, 되레 오더라는 역설 그 진리 됨을 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힌두교인이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며살았던

인도의 성자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삶의 철학의 대변일 수도 있다 싶습니다.

 


-삶은 죽음에서 생긴다.

 보리가 싹트기 위해서는

 씨앗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

 


보리는 겨울 꽁꽁 언 땅에서도

죽지 않고 부활하는 작물입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씨앗이 죽으면마침내

봄은 오고 부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3D업종을 포함해서 직업이나 신분이나 학문의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진정한 삶을 얻고 그 열매와 보람을 얻으려면, 내가 한 알의 밀처럼 보리처럼 죽어야만 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되는 일이 없습니다. 과연 자기 십자가가 없으면 삶도 보람도 영광도 없습니다. ‘내가 죽겠다는 그런 이타적(利他的) 내지 공익적(公益的) 섬김과 희생과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런 의지 그런 각오로 살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그 땅에서 마침내 삶의 열매와 보람과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23~24) 



저 역시 저런 마음 저런 의지 저런 각오를 오직 본받으며세상 끝날까지 깨어 살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싶습니다. 현실의 장애나 벽 앞에서 늘 쉽게 낙심하며 주저앉거나 무너지기 십상인, ‘질그릇같은 저 자신의 유약함을 절감할수록 더욱 그런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진실로 그렇습니다.

생명의 근원, 의욕의 근원도, 이해와 사랑의 근원도, 평화와 공존의 근원도 다 사람의 마음에 나옵니다. 진정한 힘과 위대한 능력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식의 응징 보복적인 주먹이나 실정법이나 무력이나 병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처럼 보리처럼 자기가 사심 없이 죽는 데서 나옵니다. 그런 마음을 지키는데서 나옵니다. ‘성을 빼앗는대단한 정치가나 장군 이상의 지도력도 오직 거기서 나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저 율곡 선생의 말씀처럼,

오늘도 우리는 그리고 좌우(左右) 이데올로기라는

이념이나 사상이나 정파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 권한이 나에게 있는 마음(志氣)의 병은 조금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 싶습니다.

 


그럼 우리는 정작 어떻게 마음을 고치고, 지키고, 다스려야할까요?

저 "네 마음을 지키라"의 지키다곧 히브리어 나차르금하다, 베풀다, 준행하다는 의미도 함께 가집니다. 세상의 이념이나 사상이나 그 가치관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치관 중심으로 금할 건 금하고’, 베풀 건 베풀며’, 말씀을 말씀대로 준행하는삶이 개개인 서로는 물론이고 나아가 민족의 평화에 관한 일도, 공존에 관한 일도 올바르고 복되게 살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누가복음19:4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