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명군(名君)'과 '최악의 군주' 사이

이형선 2017. 10. 16. 10:18



어떤 사가가 조선왕조 최악의 군주 3으로

폭정을 일삼은 연산군’, ‘나라를 지키지 못한 고종’,

임진왜란을 통해 국가적 수모를 당한 선조라고

언급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편으론 선조가 조선의 명군(名君) 3급에 드는

군주인데 임진왜란 때문에 바보짓만 부각되었다

라는 사가의 주장도 또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조는 명군최악의 군주사이를

오가는 극적 인물인데, 선조가 명군 급일 수 있는 것은

세종시대나 정조시대에 비견될 만큼 선조시대 역시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인즉 이이, 이황,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윤두수, 이순신, 권율 등이 다 선조시대에

활약했던 인물들입니다. 저 이순신이나 권율 장군을

등용한 군주도 선조이고, 당시 명나라 유학출신 의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서민 출신인 허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어의로 중용하여 당대 및 후대의

명의로 키운 군주 역시 선조인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임진왜란을 당해 선조가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일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론 왕이 사로잡히면 나라가 끝나버리는 왕정시대에 망국의 한만은 면하기 위해 명나라 도움을 얻어내고자 몽진(蒙塵)’ 머리에 먼지를 둘러쓰고피난길에 오른 것을 전적으로 그르다고 비난만 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옹호론도 있더군요. 당시로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렇게 시간을 끌었기에 그 새 관군과 의병이 일어날 시간을 얻었고, 외교적 노력을 통해 명나라 원군의 도움을 얻어내어 마침내 침략한 왜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너나없이 누구나 야누스같은 두 얼굴 혹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선()과 악()의 두 얼굴을 가진 모순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사도 바울도 그런 모순적 정체성으로 인해 거룩한 고뇌를 하며 거룩한 탄식을 진솔하게 토로 및 고백(*로마서7:)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명군일 수도 있는 선조가 최악의 군주로 전락한 악수 내지 자충수는 어쩌면 국가적 위기에서 전쟁을 결정적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민심(民心)이자 천심(天心)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아니 선조는 천천이요, 이순신은 만만이라”, 그런 유형의 백성들의 칭송을 저 이스라엘 사울 왕처럼 선조 왕 역시 시기 질투하여 이순신을 파직 및 고문했던 작태 거기서 비롯되어 부각되었다 싶기도 합니다. 그것은 실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자의 자격지심에서 나온, 전혀 군주답지 못한 소인배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싶으니까요.

 


저 선조가 근대사의 학자이자 언론인인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이충무공순신기념비(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 새겼던 평가처럼 당대에 백성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며, 군신(君臣)의 관계나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 공을 높이 평가하며 거기서 보다 큰 관계의 미학이자 비밀을 배웠더라면, ‘이순신이나 의병으로 나서서 나라를 지킨 백성인 그대들이 몽진 길에 오른 나보다 더 훌륭한 애국자이자 충절이다라고 그 공을 높이 치하했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백성들의 용서와 신뢰를 되레 얻을 수 있었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럴 것이 선조실록에도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당대의 민심이 사관(史官)의 글을 통해 이렇게 대변되어 있으니까요.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한편,

구약성경 사무엘에 보면,

조선을 괴롭히던 저 왜적(倭敵)들처럼 당시

이스라엘을 자주 괴롭히던 블레셋이 거인 골리앗

장군을 앞세워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이스라엘은 초대 왕 사울의 지휘 하에 적군과의

사이에 골짜기가 있는 산에 진을 치고 대치하지만,

거인 골리앗과 그의 모욕적 언사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크게 두려워하며

낙심에 빠져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렇게 블레셋 군대와의 대치 국면은

‘40동안 곧 장기간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투에 출전한 형들에게 먹을 것을 좀 전해주면서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그 증표를 가져오라는 아버지 이새의 말씀을 받들어 심부름 온 집안의 막내이자 목동인 다윗이 전쟁터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조국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조롱하고 모욕하는 거인 골리앗 장군의 교만한 행태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청소년 다윗은 사울 왕이나 온 이스라엘 군대처럼 주눅이 들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되레 담대한 의분(義憤)이자 거룩한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런 소식을 전해들은 사울 왕은 목동 다윗을 부릅니다. 왕 앞에 선 다윗은 감히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 같이 되리이다.-(사무엘상17:)

 


그런 목동 다윗은 양떼를 지킬 때 사용하던

물매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가

감히 적장인 거인 골리앗 장군과 맞섭니다.

골리앗이 어이없다 듯 비웃으며 야유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

다윗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담대하게 응수합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런 설전 끝에 맞붙는 전투에서의 승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목동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처박힌 순간

거인이 고목처럼 곰처럼 그대로 쓰러져버리고만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려지니라.-(사무엘상17:)

 


다윗은 그렇게 쓰러진 골리앗에게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 칼로 골리앗의 목을 벱니다. 그러자 블레셋군인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가버립니다. 그렇게 전투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목동 다윗에게는 장난감처럼 하찮은 물매가 있었을 뿐 은 없었습니다. ‘이 없어도 다윗은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다윗에겐 이상의 위력이자 능력인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저 골리앗은 자기의 교만한 에 되레 자기가 죽었습니다. 자기가 과시했던 그 교만한 에 되레 자기가 죽은 것입니다.

 


적국 블레셋과의 전투는 승리로 끝났습니다. ‘외환(外患)’은 일단 그렇게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국 내지 조국 내에서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아닌 내우내환(內憂內患)’은 되레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아들 벌밖에 되지 않는 청소년 다윗에 대한 사울 왕의 시기 질투 및 정치적 독선(獨善)과 독점욕(獨占慾)에서 비롯됩니다.

 


-무리가 돌아올 때에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이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사무엘상18:)

 


물론 천천의 그릇인 사울 왕으로선 만만의 그릇인 다윗이 당연히 시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 민심(民心)은 곧 섭리적 천심(天心)일 수 있었기에 자기의 왕권이 위태로운 것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자하는 왕좌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이후 사울 왕은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공작을 꾸밉니다. 사울 왕은 그러나 대단한 정치권력이나 공작이나 교활한 음모의 힘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그래서 훗날 명군(名君)’이자 성군(聖君)’이 되는 다윗을 죽이지 못합니다. 결국엔 사울 왕과 그 아들들이 되레 블레셋군과의 전투에서 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저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 및 견제 및 암살하려는 음모를 회개하고, 당대의 백성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저 정인보 선생의 평가처럼 다윗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며 그 공을 높이 샀더라면, 나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나서 거인 골리앗과 맞선 목동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낙심만하고 있었던 나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충절이자 애국자이다라고 그 공을 높이 평가하며 이타적이자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윗을 친히 인재 내지 제자로 키웠더라면, 그런 인격 됨됨이에 의해 백성들의 신임과 존경을 되레 더 얻을 수 있었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래서 사울도 명군(名君)’이 될 수 있었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실상인즉 우매한 자기 주관을 고집하다가 결국 오명(汚名)과 함께 비참하게 죽고만 것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이 내버려 둔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인위적 권력의 몰락을 이렇게 짧게 명기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사무엘상31:6)



과연 천하 권력을 다 가진 왕이나

천하 재물을 다 가진 재벌왕국이라 해도

그런 성공 자체로 명군이나 성군이 될 수는 없습니다.

되레 자기중심의 지극히 이기적인 권력욕이나 재물욕이나 성욕 등의 탐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만큼 배타적인 각종 시기심이나 견제심도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내 것혹은 우리 편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한 배타적인 각종 시기질투심(envy)이나

적개심이 강하게 표출되기 마련인 그 자체가 인간 우리의 성정이 이미 더럽게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정체성의 존재라는 그 자체의 반증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중심의 이기적 내지 독선적 성정이나 교만한 감정을 절제 및 극복하거나 뛰어넘어, 이웃은 물론이고 경쟁자정적이나 내 원수까지도 개관적 내지 하나님의 시각에서 평가할 줄 알고 나아가 사랑하며 살릴 줄 아는, 사회적 내지 국가적 내지 국제적 인재나 제자로 키울 줄 아는 그런 인격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자 성자(聖者)’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의 마음 됨의 수준 내지 인격 됨의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명군(名君)’이나 성자(聖者)’의 수준은 못 된다쳐도,

너나없이 우리 각자의 생애가 더러운수준 그래서 종말론적으로

더러운 사람이라는 거기서 끝나선 결코 안 되겠지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envy)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함이니라.-(마가복음7: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