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曹操)와 유비(劉備) 두 라이벌은
거의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감내한 후, 두 사람 다 각각
나라를 창업한 영웅적인 인간형들입니다.
천하의 패권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권모술수나 잔악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던 간웅(奸雄) 조조.
그는 일생을 통해 서른 번 정도의
전쟁을 치르는데, 승률이 8할이나 됩니다.
그러나 유비는 전쟁에서의 승률이 고작 2할입니다.
따라서 유비는 병법이나 정치적 자질에서 조조의
상대가 못되는 무능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유비를
큰 인물로 평가하며 경계했던 것은 유비에게는
남다른 자산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덕(德)입니다.
인격을 인격으로 대접할 줄 아는, 타인을
포용할 줄 아는 후덕(厚德)한 인간미 그것입니다.
조조는 능력 있는 인간만을 곁에 두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은 상대도 안했습니다.
‘강자철학’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늘이 허락하신 혹은 인연을 주신
이웃들을 늘 자비와 온정으로 대접합니다.
그런 ‘덕’, 그런 ‘대접’이 사람을 얻습니다.
그래서 유비는 사실상 자신의 능력이 아닌,
공명이나 관우, 장비 등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부하들의 충성에 의해 군주로 성공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7:12)
과연 말씀 중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황금률(golden rule)’
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사랑하고, 남에게 배려 받고자하는 대로 먼저 남을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 대접이나 사랑은 타산적이나 이기적인 그런 대접이나 사랑이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로마서12:10) 그런 섬기는 대접을 의미합니다.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그런 겸손하고 순수하고 거룩한 사랑(agape)이자 인격적인 대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남’ 곧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실인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접 내지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 내지 사랑해야 하고, 이웃에게 대접 내지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이웃을 네 몸처럼’ 대접 내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 과연 그것이 ‘율법이요 선지자’ 곧 구약성경 말씀의 요지이자 집약입니다.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접이나 사랑 역시 그렇습니다.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 많은 인생’인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의 비밀이자 영성(靈性)의 비밀이자
관계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그리스도)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마가복음8:38)
‘대접’이나 ‘상처’를 포함해서 우리가 남들과의 관계에서 때론 주고 때론 받았던 과거적 인생 체험을 통해 돌이켜봐도, 애틋한 기억으로 오래 남은 인간미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여는 요인이나 유인(誘因)은 과연 사무적이나 계산적이나 이기적이 아닌, 역지사지(易地思之) 내지 동병상련(同病相憐) 내지 이타적 배려나 은혜 같은 그런 ‘대접’을 받았을 때나 그런 ‘대접’을 베풀었을 때 나오는 그것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의 이타적 배려나 격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던 그런 분들의 인간미가 ‘그리스도의 향기’처럼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공자도 ‘덕은 외롭지 않다, 필히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고 말씀했던 것이겠지요. ‘덕’은 그것을 베푸는 자에게도 받는 자에게도 피차 ‘마음의 향기’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웃에게 얼마나
‘덕(德) 있는 사람’으로 살아왔고
또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보다는 되레
아집이나 교만이나 이기적인 사욕의 ‘악취’를
더 풍기며 살아왔고 또한 살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사람들은 대개가 돈이나 권력이나 사회적 신분 등을 가진 실세들 곧 현실적으로 힘이 있는 그래서 자기에게 돈벌이나 유익이나 배경이 되는 그런 강자나 높은 자들을 ‘대접’하는 데는 경쟁적으로 줄을 설 만큼 발이 빠릅니다. 그런 ‘대접’을 위한 머리회전 역시 치열하고 교활하도록 빠릅니다. 그래서 ‘당신들의 잔치’가 늘 그렇듯이 풍성한 향연이기 마련입니다. 때론 ‘룸살롱’까지 ‘알아서 모신다’면서요? 그런 대접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덕 있는 사람’들이라고 일컫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요?
저 조조도 유비에게 남다른 덕성(德性)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 평가할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덕성을 정작 자기 인격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지성과 인격 사이 그 안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 거기엔 늘 엄청난 괴리가 있습니다. 사마천이 '사기(史記)'에 '시덕자창 시력자망(恃德者昌 恃力者亡)‘ 곧 ’덕을 (믿고)의지하는 자는 흥하고, 힘을 (믿고)의지하는 자는 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사람은 과연 자기 인격의 됨됨이 그 그릇의 분량만큼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지가 대접을 품을 수도 없고, 냄비가 솥을 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물론 종지나 냄비도 다 필요한 그릇이지만, 그러나 ‘마음의 그릇’은 희생양이 되어 죄인이자 이웃인 우리 인생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 및 희생하신 ‘참 덕’이자 ‘영원한 덕’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믿고)본받아’ 크면 클수록 자신을 위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도 더욱 좋을 것입니다.
나아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 ‘자기 몸처럼’ 대접 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 ‘영생(永生)’이라는 하늘의 참 복을 진실로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확언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대접한 것이 곧 그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접한 것이자 ’그리스도‘께 대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또한 ’복음이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the righteous)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5:)
현실적 내지 역사적 추이를 살펴봐도, 특정 권력자나 정권이나 ‘좌파’ 혹은 ‘우파’라는 이념에게 ‘의인’ 대접을 받은 자가 과연 진정한 ‘의인’은 아닙니다. 그런 의인들은 대개가 ‘한 철’ 혹은 ‘한 정권’의 ‘메뚜기’ 같은 ‘의인들(?)’이기 십상입니다.
그럴 것이 특정 대통령이나 정권을 믿고 대접을 주고받으며 ’국정원장‘이나 ‘청와대 수석’ 등으로 이른바 ’충성‘했다가 정권이 바뀌자 곧장 ’영생‘이 아닌 형벌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차라리 허무한 희극 같은 작금의 세태를 자주 접하면서, 저런 유형의 ‘충성’이 참 충성도 아니고 저런 유형의 ‘의인’이 참 의인도 아니고 저런 세상의 권력이나 출세나 성공이 ‘참 복’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되니까요.
과연 사람은 한 시대의 정권이나 이념을 위해 사는 존재는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싶습니다. 진정한 ‘의인’은 과연 영원한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그 자체이자 ‘만유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인’ 대접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고 사는 자가 진실로 복이 있는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막말로, ‘대통령’이나 ‘부자’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대접한 자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며 대접함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접한 자에게 본인에게도 그 후손에게도 되레 더 크고 영원한 ‘하늘의 복’과 ‘하늘의 생명’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창세기1:27) 지어진 인간의 존엄성 그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을 진실로 믿고 이웃은 물론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선이나 자비나 긍휼 등의 대접을 베풀어 행한 자는 또한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영생(永生)의 복이자 하나님의 대접을 금세에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요셉’이나 ‘모세’나 ‘다니엘’ 같은 참 ’의인‘이기에, 설령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거나 고난을 당하거나 재앙을 당하여도 ’다시 일어나는‘ 비밀한 은혜와 평안과 능력이 하늘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또한 ‘율법이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대저 의인(a righteous man)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언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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