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갈망'

이형선 2017. 11. 6. 10:49



-나의 주 하나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나는 보지 못합니다.

 이 길이 어디서 끝나는 지도 나는 확실히 모릅니다.

 나는 진실로 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갈망만큼은 실제로 당신을

 무척이나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하는 모든 일 안에서

 내가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그런 갈망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런 갈망에서

 우러나온 일이 아니면 그 무엇도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내가 바른 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죽음의 그늘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나 혼자서 위험과 싸우도록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20세기를 살다간,

트라피스트 수도사이자 저명한 작가이자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의 저 기도문을 다시금 묵상해봅니다.

사실 저를 포함한 인간 우리는 저 머튼의 고백처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길이 어디서 끝나는 지도모르고,

진실로 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심지어 내일 죽을 지도 모르는

나그네 인생인 내가 스스로 잘 믿는다고,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계를 살다가는 피조물인 인간 우리가 거룩하게 산다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얼마나 거룩하고, 우리가 성경이나 신학을 공부해서 박사가 되었다 쳐도 머리속의 그 학문 그 지식으로 우주 위의 하나님을 알면 또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산을 옮기는 믿음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고린도전서13:) 삶을 살았다 쳐도 만유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자랑할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폼 잡아봤자, 교만해봤자, 다 유치한 어린아이 같은 치기(稚氣)가 아닐 수 없습니다. ‘풀의 꽃이나 아침 안개같은 내로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하나님 앞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인 이유가 거기 있겠지요.

하나님 앞에서인간 자기의 정체성을 살피는 영성이 깊고 높아질수록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바로 내가 죄인의 괴수이자 작은 자 중의 작은 자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성령의 은혜 및 조명을 받아 그런 자기 정체성을 절감하며 크게 깨달은 사람들은 과연 그래서 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로 타락한 죄인인 인생 우리가 우리의 대속자(代贖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헌금이나 구제나 선행을 많이 했기 때문도 아니고, 거룩한 성자성녀가 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자녀로 받아주시고 친밀한 영적 소통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저 머튼의 고백처럼 나의 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나의 갈망그 자체 때문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을 바꾸자면, 내가 이미 효자가 되어서가 아니고,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때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지만’, 그래서 실수도 허물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 안에서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갈망을 가진 그 자체를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 중심까지도 훤히 통찰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8:29)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 상대방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자하는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진솔한 사랑이자 진짜사랑입니다. 거룩한 사랑, 아가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볼 것은, 그런 중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분명히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혼자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혹자처럼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땀이 피가 되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세 번이나 부르짖었지만 결국 혼자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하지 않았느냐?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은 그때 어디에 계셨느냐? ‘살아계신다는 하나님은 그때 지구가 아닌 금성이나 명왕성으로 외출하신 것이냐?

 


그러나 내일을 보고 내세를 보는 영안(靈眼)이 열린 사람들은 오늘이라는 현실적 모든 사건이나 고난에서 오래 참으며인내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과연 내일이자 내세인 사흘 후에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력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이 아니고 저주라고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쓴 잔이라는 고난을 정면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고난으로 고난을 이기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희생의 삶을 통해 사망 권세를 이긴 것입니다.

 


과연 간구나 기도에 대한 오늘의 ‘YES’달콤한 형통만이 사랑의 응답은 아닙니다. 사랑의 표현도 아닙니다. 외면도 침묵도 ‘NO’쓴 고난도 다 기도 응답입니다. 보다 심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초대교회 모든 사도들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뜻있게 살다간 성자들의 삶은 세상적 기복(祈福) 내지 축복의 기준이나 가치에서 보면 차라리 비참하도록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이나 고통을 되레 감사하며 찬양하며 의연하게 순교하거나 순교적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분들에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갈망이 있었고,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있었고, 죽음조차도 이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초월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고난의 그릇이 크면 영광의 그릇도 큽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그릇이 큰 사람에겐 고난의 그릇도 큰 것을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며,

제자들에게 부활세계 및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다가 승천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사명이자 당부이자 언약을

남기고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20)

 


실로 목자 잃은 양같은, ‘이리들 가운데 보내진 양같은

제자들에게 최고의 유산이나 자산이자 능력이자 배경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말씀그 자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그 말씀을 책임지고 실행하셨습니다. 어떻게 항상 함께 있었느냐고요? 승천 후 보내주신 성령(聖靈)’을 통해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왜 세상 끝날까지 변함없이 항상 함께 할 수 있었느냐? 그렇게 자문할 수도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 답은, 제자들 역시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제자들을 혼자 두지 아니하셨기때문입니다.

 


그것은 반어적 내지 역설적 의미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오늘 이 시대의 우리 교회나 목사들과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도들이나 제자들이나 이 시대 목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고 심령 중심까지도 훤히 통찰하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 몫의 소명이자 사명을 치열하게 살다 기꺼이 순교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그의 온 몸 온 삶 그 전체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며살았던, 그래서 모진 고난의 역정이나 죽음조차도 넉넉히 이긴그의 담대한염원이자 갈망이자 신앙고백을 다시금 묵상해봅시다. 믿을 바엔 이 정도, 이 가치, 이 갈망, 이 초월적 비전 중심으로 믿는 게 진짜 믿음이고, 그런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일 터이니까요.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5:)

 


한국개신교회 신앙풍토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대형교회당 등의 소유나 입신출세가 곧 하나님의 축복이자 성공이라는 도식의 우선 듣기에 달콤한 기복신앙내지 번영신학위주의 세속화에 경쟁적으로 빠져들면서, 반비례하여 본질적인 거룩함과 생명력을 잃더니 이제는 아예 침체 내지 하강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불과 한국선교 133년'인 올해인데, 벌써부터 왜 그럴까요? 일부 '대형교회'만 살아남으면, '내 교회, 우리 교회'만 살아남으면 상관없는 것일까요? 500년 전 당시, 세속화의 늪에 빠져 극도로 타락했던 가톨릭 교권에 맞선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천하를 뒤흔든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던 역사적 교훈이나 구교나 신교의 차이, 개신교 교파나 교리나 유식한 이즘(ism)이나 말()잔치 같은 지식이나 논리 등을 몰라서일까요?

 


홍수가 나서 마실 물이 없는 이 시대에 분명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지 아니하므로오늘 우리의 교회나 제자나 목사들을 혼자 두었기때문일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되어가고, ‘사람이 주인이 된 교회이자 당신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잠재욕구나 본능적 욕망을 자극시키며 일깨우는 그래서 우선 듣기엔 은혜가 된다는 달콤한 복음일수록 돌아서면 거울에 비쳤던 내 얼굴처럼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것이 참 복음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과 양심과 이타적 인격을 자극시키며 일깨우는 그래서 성숙 및 성화시키는 십자가 복음이 참 복음이더라는 것입니다. ‘들을 귀를 가지고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 이 시대에 다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할 곳은, 상대적으로 사회신뢰도가 몇 배나 더 높은 가톨릭이 아니라 외려 개신교라는 목소리가 기독교 내외에서 공공연하게 표출되고 있는 실정 아니겠습니까. 저 자신부터도 경청해야 할 목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가톨릭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있고, 개신교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해서 독신으로 사는 형님이나 결혼해서 사는 아우처럼 서로 이해하며, 피차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궁극적이자 종말적으로 그리스도 심판대앞에서의 구원은 오늘의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종교지도자들이나 거기 속한 신부나 목사나 신학자의 소관도 권한도 아니니까요.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소관이자 권한이니까요. 피차 유치한 독선이나 교만에 빠지지 않고 더욱 겸손해야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야고보서3:1)

 


따라서 자기나 자기네를 기쁘게 하고자’, 차라리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자기합리화나 아전인수에 힘쓰며 남의 탓이나 남의 종교나 교파를 '무례하게' 비판 내지 비방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오직 말씀자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우리가 아니 내가 먼저, 조용히,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그런 갈망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리에서, ‘세상의 빛은 스스로 나서 체하거나 들레지 않아도 절로 빛으로 증명되는 법이니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은 조용히 섬기는 삶이나 맛 그 자체를 통해 절로 소금으로 인증되는 법이니까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또 어떻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겐 되레 사후 그리스도의 심판대앞에서 받을 종말론적 평가와 영원한 생명이 최대축복이자 절대가치인 것을! 그래서 저주의 현장에서 순교하시는 분도 있고, 외진 오지에서 한평생 조용히 헌신하시는 분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의 우리들 역시 서둘러 가슴을 찢으며 충심으로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구별된 삶을 살았던 저 1세기 초대교회 사도 바울처럼, 20세기 토마스 머튼처럼 오직,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갈망을 심령 중심에 가지고,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온 몸과 온 삶으로 구현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그래서 친히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 및 섭리해주시는 하늘의 참 축복과 영원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내 몫의 십자가라면 거기서 또한 의연하게 죽을 수도 있는, 세상도 죽음조차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자 그 자체가 '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게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