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저도 인상 깊게 읽었던,
1979년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0년대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난장이’와 ‘거인’이라는 빈부(貧富) 두 계층 간의
갈등과 모순 및 도시화되어 갈수록 되레 더 변방으로
밀려나는 도시빈민들의 차라리 비참한 삶의 애환과
고뇌를 잘 그려낸 저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철거민촌에 사는 ‘난장이’네 다섯 식구의 참담하고 일그러진 삶을 통해 오히려 인간 생존의 가치 및 깊이 그 휴머니티를 치열하게 극대화시켜주는 역작인데, 청년시절 저는 저 소설을 읽으면서 제 속에도 조상이나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운명적인 사슬이나 악순환 같은 타성 내지 유전자가 피처럼 짙게 배어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구원’이라는 명제를 놓고 고뇌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럴 것이 거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형도 아버지가 든 술병을 빼앗아버리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마지막 눈을 감는 날의 일을 생각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언덕 위 교회의 목사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숭고함 • 고통 • 구원을 말했다. 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생을 시작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만 있었다.-
남들 보기엔 무능한 ‘난쟁이’였지만 그래도 ‘다섯 식구의 목숨’이었던, 소설의 내레이터인 ‘나’의 ‘키 작은’ 아버지가 남긴 것은 오직 ‘가난과 술병(甁)들’뿐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이 애비는 비록 이렇게 비참하게 죽더라도 그러나 가난은 결코 끝이 아니고, 고생도 죽음도 끝이 아니라는 구원의 세계를 언약하지도 못하고, 그런 복된 소식(福音)을 전해주지도 남겨주지도 못한 채 그냥 죽습니다. 다만 비참한 가난을 운명의 사슬처럼 대물려 남긴 채 말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소설의 세계에 처절한 인간의 실존은 있으되 미래적 비전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하게 ‘나의 아버지’인 ‘난장이’ 혹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아들’의 그 죄와 저주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는 왜곡된 운명의 굴레나 멍에 내지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허무한 운명의 전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역시 그것을 운명적으로 대물림합니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우리는 난장이의 아들이었다. 형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풀섶으로 나갔다. 나는 돌멩이를 집어 방죽을 향해 던졌다. 소리 없이 물방울만 올랐다. 마당에서 나는 계속 돌멩이를 던졌다.-
저 ‘돌멩이’는 불운한 자기 운명에 대한 원망이자 불만이자 부정이자 저항 등이 혼재된 복합심리에서 우러나온 산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그러진 자기 운명을 향해 계속 ‘돌멩이’를 던진다고 해서, 혹은 ‘뒷발질’을 한다고 해서 그 ‘운명’이 변화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럴수록 자기만 더 ‘인생고(人生苦)’라는 그 ‘고생’의 사슬에 매일 뿐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예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사도행전26:14)
물론 저 말씀은 차라리 완악하리만큼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던 ‘사울’이 초대교회 ‘예수쟁이들’을 죄다 잡아 죽이기 위해 가던 길인 ‘다메섹 도상’에서,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비추는‘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 신비체험을 간증하고 있는 대목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타의적인 ’운명‘ 혹은 ’사명‘은 다 하늘로부터 주어진다는 맥락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다 싶습니다.
실인즉 그렇습니다. 설령 그것이 기구한 운명이든 형극의 사명이든, 하늘이 허락하신 자기 모습, 자기 처지, 자기 형편을 향해 ’돌멩이‘를 던진다거나 ’발길질‘을 한다고 해서 자기 삶이 변화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정할수록 되레, 더욱, “네게 고생이라”는 것입니다.
부활 및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그 신비체험이자 초월세계의 실재를 직접 체험한 저 ‘사울’은 그 후 결정적으로 회개(悔改)합니다. ‘난장이의 아들인 나’와는 달리, 더 이상 돌멩이를 던지지도 않고 가시채를 뒷발질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운명을 운명으로, 사명을 사명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수용 및 순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되어,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담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
타락한 육(肉)의 혈통을 대물림한 ‘아담의 자손’이 아닌, ‘난장이’의 자손도 아닌, ‘영(靈)이신 하나님’의 혈통인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 새 운명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태인 ‘어머니 안에서’ 피와 살을 먹고 마시며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며 세상에 다시 태어난,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인간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내지 중생(重生)한 ‘새로운 인간 바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언덕 위 교회의 목사’도 달랐던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언덕 위 교회의 목사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숭고함 • 고통 • 구원을 말했다. 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생을 시작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만 있었다.-
그렇습니다.
‘먼저 구해야 할’ 선결의 문제 곧 ‘영(靈)이신 하나님’ 그 영성의 비밀에 열려지지 못하면, 저 사도 바울이나 ‘언덕 위 교회 목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으면’ 자기가 되레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인생에게는 내일도 없고 내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죽음’ 곧 ‘십자가’는 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원죄’와 ‘자범죄’라는 조상대대로와 ‘나’의 운명적이자 이기적이자 자기중심적인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거듭나는 ‘대속(代贖) 안에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라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금세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죽음(십자가)’을 통해 늘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이타적 헌신 및 자기희생을 통해 이 땅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중심의 공의와 사랑을 구현하기 위한 삶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내세 곧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세에서도 살고 내세에서도 사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성(靈性)의 비밀이자 영원한 희망의 비밀이자 영원한 생명의 비밀이자 영원한 하늘의 복(福)의 비밀인 것입니다.
과연 진실로 복(福)이 있는 구원은 세상 중심으로 ‘먹고 마시는’ 빵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나 쾌락 등의 문제,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화에 성공해서 ‘오천년의 가난’에서 해방되었고, 민주화에 성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이라는 문화의 꽃도 피우고 있다는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들은 과연 진실로 행복한 것일까요?
최근의 기사를 읽어봐도 자살률, 이혼증가율, 낙태율, 성형수술률 등은 여전히 OECD 국가들 중 1위이고, 국민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최하위수준이더군요. 심지어 ‘헬(Hell) 조선’이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지 않던가요?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라니? 21세기인 오늘에도 ‘난장이의 아들인 나’는 여전히 그래서 또한 그렇게 ‘방죽을 향해 돌멩이를 계속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그런 사회문제나 그렇게 뿌리 깊은 타성의 병폐를 확인할수록 인간 우리의 참 구원을 위해 ‘먼저 구해야 할’ 절대 명제는 과연 ‘산업화’도 ‘민주화’도 아닌, 심령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문제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혹은 자기중심적인 ‘휴머니즘’ 그 이상의 가치나 진리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실인즉 거듭난다는 중생(重生)의 문제는 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받은 사울의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아니한’(사도행전9:9) 것처럼, 그렇게 자기나 세상 중심적이었던 기존의 가치관에 대해 ‘눈이 멀어버리는’ 죽음의 분수령이 필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사울이 아니 사도이자 섬기는 종으로 거듭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15:31), 그렇게 고백했던 것처럼 치열한 자기 죽음이 필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은 고통도 불행도 아닙니다. 되레 현재적으로 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과 평안과 기쁨 안에 사는, 늘 행복하고 감사한 죽음이자 은혜이니까요.
실상인즉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명언이 그런 것처럼,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알의 세계’를 철저하게 파괴하지 못하면 그 어떤 생명도 ‘하늘나라’를 나는 ‘새’로 거듭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습니다. ‘알(卵)’이라는 껍질이나 세상의 가치관, 허무하게 깨지는 그것이 축복이자 행복인양 그대로 간작한 채 ‘공중 나는 새’로 거듭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자 ‘거짓선지자’입니다. 진실로 거듭난 자는 알의 세계가 철저하게 파괴된 자입니다. 기존의 세상이나 그 가치관에서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알은 곧 하나의 세계’일 수 있지만, 하나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 내지 한계상황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自己)’라는 그 한계상황을 깨뜨리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이성(理性)의 한계를 벗어나는 ‘신령한 체험’을 하지는 못해 그것까지 믿지는 못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여하간 사도 바울처럼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그냥 죽지는 않습니다. 그냥 죽어서도 안 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는 설령 ‘난쟁이’로 죽더라도, ‘바벨론 포로’로 죽더라도, ‘죄인 중의 괴수’로 죽더라도, 자기 자식들을 물론이고 미래의 세대를 위해 구약시대의 역대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신약시대의 모든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아울러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그 참 소망과 구원의 복된 소식(福音)을 세상에 치열하게 남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비’인 내가 비참하게 죽더라도, ‘어미’인 내가 처참하게 죽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信仰)을 남겨주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남겨주는 것, 인간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남겨주는 것, 그것 이상으로 가치 있고 복이 있는 유산이나 자산이 달리 있을까요?
‘가난과 술병’, 이기적인 자기의 탐욕이나 교만, ‘헬 조선’ 등의 ‘돌멩이’를 남겨서도 안 되고 던져서도 안 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웃을 향해서도, ‘자기’라는 ‘방죽’을 향해서도, ‘돌멩이’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억만금의 돈도 재물도 영원한 재산은 아닙니다. 무엇이 영원한 재산인가를 우리도 철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자기는 물론이고 자기 후손 내지 후대들의 영원한 재산이자 가치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운명도 세상도 죽음도 다 ‘넉넉히 이기는’ 하늘의 평안과 행복이 있고 아울러 ‘우리’라는 공존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진 등 천재지변이나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자주 접할수록, ‘거짓선지지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수록’(마태복음24:),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면 거룩하지 아니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수록’(디모데후서3:),
더욱 겸손하게 자기 언행(言行)을 살피며 ‘깨어있어야’ 할 이유도 그리고 영원한 미래와 희망을 ‘준비해야 할’ 필연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른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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