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부(國父)’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인
마운트 바논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대통령이 된 아들이 집에 온다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도
미덕인 바, 고향 천하가 들썩이도록 한판
잔치를 벌여도 허물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싱턴의 어머니 메리 보울은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집안 분위기와 옷차림으로 집 앞에서 아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손에는 밀가루반죽투성이었습니다.
“조지, 정말 잘 왔다. 너에게 주려고 지금 맛있는 생과자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그렇게 아들을 맞이한 어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그런 분위기에 당황하는 쪽은 외려 워싱턴을 모시고 온 수행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은 어린아이처럼 싱글벙글 기뻐하며 수행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만드는 생과자를 좋아했지요. 함께 안으로 들어가 맛있게 먹읍시다.”
그런 후, 워싱턴은 어머니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합니다.
“어머니, 이제 이런 일은 직접 하시면 안 돼요. 이제 하인들에게 시키시고 그저 감독만 하세요.”
그때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받습니다.
“아니다. 대통령이 나온 마을이기에 더욱 가난한 사람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가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이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일해서 수입을 늘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생각이다. 만일 대통령인 내 아들이 나에게 일하기를 그만 두라고 한다면,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라는 신분 따위는 언제라도 사직할 것이다.”
과연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대통령’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던,
‘대통령의 어머니’라는 신분보다
‘청교도(Puritan))’라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을 더 사랑했던
어머니의 그 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자 당부이자
심오한 정치학 오리엔테이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개인의 성향이나 이념에 따라 호불호도 많고 시비도
많지만 오늘의 미국이 ‘위대한 미국’으로 존재하는
요인도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제자로 살고자하는,
저런 청교도적 메인스트림(mainstream)이
아직은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원수(enemies)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
예나 지금이나 과연 ‘사람의 원수’,
특히 정치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적’ 내지 ‘원수’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늘 대의(大義)를 그르칩니다.
‘대의멸친(大義滅親)’은 과연 동서양을 아우르는 금과옥조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 말년에 악속이라도 한 듯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은 죄다 그 아들들이나 형님 등의 가족들이 재물을 탐하는 권력형 비리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기 때문 아닙니까. ‘잘 나가던’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말년에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까지 더럽히며 망신시키는 것 역시 대개가 그 자녀들 때문입니다.
크게 성공한 ‘내 것, 내 소유, 내 기업’일수록 ‘내 자식, 내 혈육’에게 물려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야 차라리 당연한 인지상정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대의(大義)’라는 사회적 내지 국가적 비중이나 가치나 의미를 가지면 이미 ‘내 가족 간의 문제’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노블레스 오브리지’도, 대기업일수록 보다 큰 사회적 책임이 요구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하물며 ‘내 것, 내 기업’이 아닌, ‘헌금’이라는 ‘하나님의 돈’으로 일군 ‘하나님의 것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대형교회일수록 보다 크고 거룩한 사회적 책임과 모범이 요구되기 마련입니다. 보다 많은 헌금(獻金)으로 일군 교회일수록 보다 많은 헌신(獻身)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교회는 세속화와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양심이자 사회적 양심의 최후 보루이니까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자기 입맛'에 맞든 안 밎든 '말씀으로 말씀 되게'.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풀어봅시다. 지금은 구약시대도 '다윗 왕조' 시대도 아닌,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곧 하나님의 계시의 성취이자 완성인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중심의 가치관을 살고 있는 신약시대이니까요. 또한 그래야만 하니까요.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내 뜻’을 내세워 당장에 ‘내 뜻, 내 목숨‘은 얻었다 해도, ‘내 뜻, 내 일’은 잘 성사되었다 해도, ‘주의 뜻, 주의 일‘이 잘못되면 그 모든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저 말씀처럼 결국엔 ‘잃을 것’이 되고 만다는 필연성 거기 있을 것입니다. 재물을 잃은 것도 명예나 명분을 잃은 것도 큰 문제이지만, ‘생명’ 자체를 잃는 것은 현재적으로도 종말적으로도 치명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으니까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모범을 본받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사도 바울이 자주 언급한 모범을 본받아 먼저 “주의 일을 염려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에 힘써야 할 필연성도 다 거기 있을 것입니다. ‘속물’인 ‘세습 선배’를 본받아 ‘세습’을 일삼을수록 그 특정교회는 물론이고 전체 한국교회 역시 ‘잃을 것’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니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다면, 아비의 권력이나 배경을 내세우지 않아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자식’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함께 하사 아비보다 더 ‘큰 종’이자 더 ‘큰 지도자’도 세우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빈털터리 천한 목동 출신이었지만, ‘사울 왕’이 죽이려고 별의별 수단과 음모를 획책 및 시도해도 결코 죽지 않았던 ‘다윗’처럼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아버지가 아무리 포장 내지 과장을 해도 ‘내 자식’이 ‘성령의 능력’ 곧 ‘하늘의 능력’을 받지 못해 무능하다면 그 아버지도 그 아들도 결국엔 다 오욕의 구렁텅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해서 이기적인 ‘내 뜻’이나 ‘아담의 멍에’ 내지 가족이기주의적인 ‘불명예의 족쇄’를 물려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이타적이자 희생적인 ‘주의 뜻’이나 ‘주의 멍에’나 ‘하나님의 자유’를 물려줄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삶은 육신인 부모가 한시적인 세상의 복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삶이지만, 후자의 삶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영원한 하늘의 복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삶이니까요.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실상인즉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제자’는 더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14:)
신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저 ‘제자’ 곧 헬라어 ‘마데테스’의 기본어는 ‘배우다’입니다. 따라서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 및 그리스도 중심의 뜻이나 사랑보다 ‘내 부모나 내 형제나 내 자식’ 중심의 뜻이나 사랑 중심의 가족이기주의를 ‘배운 자’나 ‘자기 십자가가 없는 신앙’을 ‘배운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더더욱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겠지요.’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며’ 이웃을 섬기는 ‘케노시스의 삶’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삶’(빌립보서2:5)을 ‘배운 자’이자 고난이자 고생이라는 ‘십자가의 삶’을 먼저 ‘배운 자’입니다. 이기적인 혈육을 배우면 되레 혈육의 한계와 함께 죽고, 이타적인 예수를 배우면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역설인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말씀을 잘 ‘가르치고’ 잘 ‘배워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자고로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그랬지요? 실로 어르신들의 옳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같은 맥락에서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마마보이’나 ‘캥거루족’ 같은 온상족(溫床族)이나 ‘룸살롱족’으로 키울 것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사회 밑바닥에서 직접 고생하며 인생의 쓴맛도 보고 땀의 가치도 알고 그래서 남의 애로나 설움이나 아픔도 이해할 줄 아는 자녀로 그래서 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공존의 삶을 스스로 일궈나가는 강인한 개척정신을 가진 자녀로 키울 필연성도 거기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남들보다 자기가 먼저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할 줄 아는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자녀로 키울 필연성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고기를 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이자 더 크고 영원한 생존에의 지혜이자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자녀들이자 제자들을 친히 그렇게 가르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누가복음5:4)
오늘 우리는, 한국교회는,
과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고 있는‘ 것일까요?
성숙 및 성화(聖化)의 깊이와 구별이 있는
그런 ‘깊은 데’가 아닌, 세상과 양다리 걸치는
그런 ‘얕은 데’서 이른바 다수의 ‘치어(穉魚)나 ‘송사리들’이나
‘골빈족’들만 잡고 있거나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4:)
그렇습니다.
‘장성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또한 ‘장성한’ 그리스도의 제자를 낳아야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피차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이 바로 설 터이니까요. 인간 우리는 죄다 궁극적 내지 종말론적으로 저 워싱턴의 어머니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을 준비해야 할 행인과 나그네들이니까요.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조지 워싱턴 역시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을 늘 준비하며 아래의 말씀처럼 ‘섬기는 대통령’으로서의 삶을 살다갔고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국부(國父)’로써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으니까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20:)
‘존경할 수 있는’ 어버이나 스승은 물론이고
‘존경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를 많이 가진 국민들은
그 자체가 영원한 자산이자 행복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세상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성공을 이긴 자'는 의외로 드뭅니다.
"고난을 이긴 자는 많다. 그러나 성공을 이긴 자는 드물다"는
영국 사학자 토마스 카알라일의 갈파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나라 작금의 역사 또한 그렇습니다.
유교적 내지 혈통적 인습이 강해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아무쪼록 '성공신화'의 주인공인 부모도 그 자녀들도 차라리 불행했던
우리의 오욕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끝까지 훌륭한 그래서 진실로
‘존경할 수 있는’ 어버이나 스승은 물론이고 대통령이나
목사님 등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신앙풍토 및 사회풍토 및 양심풍토의
가치관의 성숙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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