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졸고 있는
새가 아니다.
명산유곡에서
놀고 있는
새도 아니다.
‘공중 나는 새’.
그래서 외려
배는 더 고프다.
날개를 접어라.
겸손하게
날개를 접어라.
네 육신의 양식은
땅에 있다.
지극히 낮은
땅에 있다.
네 육신이
흙이 아니더냐.
네 한계도
땅이 아니더냐.
잘 날기 위해
살 것인가.
잘 먹고
잘 마시기 위해
살 것인가.
하늘을 나는
새가 될 것인가.
땅에서 안주하는
닭이 될 것인가.
아서라.
아서라.
날개는 사명이다.
한 입,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한 후,
욕심도 사심도
내일의 염려도
죄다 털어버리고
훌훌 털어버리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
‘공중의 새’.
미련은 없다.
공중 나는 새는,
하늘에
쟁기질하는 새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지 못한다.
자기를 지으신,
자기에게
사명의 날개를 주신,
하나님을 믿는
단순한 믿음 있어
단순하게 솟아오른다.
날개의 자유는
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값싸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자존심의 골수조차
스스로 부인하며
스스로 절제하며
휑하도록 비워버리고,
자존심보다 더 높은
하늘을 훨훨 나는 새.
가난한 날개는 복이 있어라.
되레 자유가 되고.
되레 비상(飛翔)이 되고.
먹고 마시는 것도
굶주림도 병고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제 몫의 사명처럼
눈 서너 번 깜빡거리다,
제 몫의 순리처럼
밤 서너 번 깜빡거리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새.
너무 머리 굴리지 말자.
영악한 것은 축복이 아니다.
믿음은 그렇게 단순한 것을.
너무 욕심 챙기지 말자.
비대한 것은 축복이 아니다.
가난한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단순한 게 있더냐.
삶은 일상이 된 죽음이고
죽음은 일상이 된 삶이어라.
삶은 죽음에의 준비이고
죽음은 삶에의 준비여라.
두 세계가 기실 하나인 것을.
날마다 잘 비우기에
날마다 잘 나는
‘공중의 새’.
날마다 잘 죽기에
날마다 잘 사는
‘공중의 새’.
깨어 있는 새.
단순한 믿음보다
더 강한 날개는 없어라.
단순한 순응보다
더 높은 자유는 없어라.
스스로 유식한
호모 사피엔스,
스스로 복잡한
호모 사피엔스.
인간 우리는 왜?
새처럼 날지 못할까?
인생 우리는 왜?
새처럼 살지 못할까?
저 하늘처럼
우리의 영혼도 현실이고,
이 땅처럼
우리의 육신도 현실인 것을.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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