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이형선 2018. 3. 5. 11:58



조선후기의 성군이자

대왕으로 평가 받는 정조.

그가 어릴 때 뒤주에 갇힌 채

굶어죽은 아버지 사도(思悼) 세자

억울한 죽음을 한하며 두고두고

크게 애석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민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처참한

아버지의 죽음은 평생을 괴롭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같은 과거나

상처나 트라우마가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그 모든 불행한 기억이나 고난이나

상처나 트리우마 그 자체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고뇌나 고난을 통해 되레 대왕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사도 세자의 죽음조차도

가치 있게 승화시켰습니다.

과연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에서 내리는

모진 운명의 비바람조차 긍정적으로 수용 및 감사하며

액면대로 잘 맞을수록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하늘이 허락하신

고난의 미학을 살리지 못한 연산군은

사악한 폭군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성종의 사약을 받고 죽은 생모 곧 폐비 윤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같은 상처나 기억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원한을 품고 절치부심(切齒腐心)했던,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칼을 갈았던 연산군은

원수들에 대한 복수와 폐륜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돌보기는커녕 되레 폭정을 일삼다가

권좌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 역시

헛되고 무익하고 불행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죽음이 죽음 낳고, 불행이 불행을 낳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연산군 역시 그 운명적 사슬에 먹혀들고만 것입니다.

 


정조는 즉위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을 수원으로 옮기고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능 주위에 송충이가 들끓어 소나무들이

다 죽어간다는 소식을 접한 정조는 이런 어명을 내립니다.

그 중 큰놈을 잡아 올리도록 하라.”

 


이윽고 송충이들 중 큰놈이 올라오자 정조는 그 징그러운 송충이를 이빨로 깨물어버립니다. ‘지성이면 감천(感天)’이라더니, 그런 정조의 효심(孝心)에 하늘이 감동한 때문인지 곧 큰 비가 내리더니 이후 능 주위의 송충이들이 전멸되어버렸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정조는 지난날 성장기시절에도 자기를 괴롭히는 아버지 사도 세자의 죽음 그 악몽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같은, 송충이같은 기억이나 상처를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혹은 자기 입맛을 부인하며’, 고난이나 고뇌의 문제이자 상처의 근원인 송충이큰놈을 정면으로 그리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깨물어버리면서그 상처나 고뇌를 이겨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과연 백성들의 아픔과 상처를 살피는 큰마음을 가진 성군으로 성숙해지는 하늘의 은혜와 도우심은 자기나 자기감정을 부인하는 그런 마음 그런 효심을 가진 정조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악몽이나 송충이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같은, 고통스러운 혹은 서러운 혹은 억울한 혹은 불우한 상처나 과거가 있을지라도, 현재 역시 그럴지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악순환에 사로잡혀 부정적이거나 비뚤어진 인간형이 되어선 안 됩니다. 상대방이나 타인에 대한 보복이나 앙갚음을 다짐하며 분을 품고 절치부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과거나 상처나 고난을 통해 저 정조처럼 되레 자기를 성숙시키는 지혜와 각오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마음이나 인격을 키우는 지혜와 노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말을 좀 바꾸자면, 자기나 자기 입맛을 부인할 줄 아는 자는 분노를 품고 절치부심하다가 원수에게 친히 복수하는 용사보다 낫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했으니까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5:44)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하며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런 삶을 저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신약시대의 사도 바울 역시 설령 원수를 갚아야 할 대상이 있더라도 그것조차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기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12: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아래와 같은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출애굽기21:, 신명기19:)

 


사회 정의나 질서의 유지를 위해 아울러 보복의 악순환이나 약자들의 억울한 피해 방지를 위해 필요한 말씀입니다. 저런 유형이나 성질의 법은 오늘날에도 형법 민법 등 사회 실정법으로 익히 활용 및 통용되고 있습니다. ‘법의 심판을 통해 응분의 동해보복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동해보복법차원에서 머물거나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고 성경은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 혹은 보편 윤리' 혹은 값싼 은혜의 차원에서 머물거나 끝나서도 안 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친히 강조하신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구약성경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의 이런 말씀이 또한 명기되어 있으니까요.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내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출애굽기23:4~5)  

 

 


나아가,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한 저 모든 말씀의 실천적 의미와

그 복된 결과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별이자 성군이었던

다윗의 삶을 통해 익히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천한 목동 출신입니다.

진두지휘하던 사울 왕을 위시한 이스라엘 모든 군사들이

대적인 블레셋 거인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전선에서 적장 골리앗과 감히 맞선 소년 다윗’.

 


물론 골리앗을 위시한 블레셋군사 모두가 비웃는,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지만 그러나 소년 목동 다윗은 그가 돌보던 양들을 지키기 위해 때론 사자와 곰도 쳐서이겼던 그 담대함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골리앗 장군을 일격에 쓰러뜨리고 맙니다. 소년 다윗은 그때 어른들이나 군사들이 쓰던 칼이나 창으로 이긴 것도, 주먹으로 이긴 것도 아닙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의 힘 내지 그 배경으로 이긴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친히 벗어서 입혀준 왕의 갑옷조차도 부자연스럽다고 벗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모습 그대로에서 그나마 있는 것이자 장기인, 차라리 미천한 장난감(?) 같은 물매와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감히 나아가 맞섰습니다. 그리고 그 물맷돌을 날려 골리앗을 일격에 쓰러뜨리고만 것입니다. 물맷돌이 이마에 받혀버렸으니 거장인들 버틸 재간이 없었겠지요.

 


당시 소년 다윗이 담대할 수 있었던

용맹의 근원은 실인즉 저 물매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활용하는 병기이자 매체일 뿐이었습니다.

다윗의 절대 힘이자 용맹이자 능력의 근원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고백을 다시 들어봅시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사무엘상17:45)        

 


적장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한 후 미천한 목동 다윗은 일약 구국의 영웅으로 부상합니다. 백성들에게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칭송을 받는 왕재(王才)로 부상한 것입니다.

사울은 이 말에 심히 불쾌하여 노합니다.‘(사무엘상18:8). 절치부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시기와 암살 음모로 나타납니다. 정적(政敵)으로 부상한 다윗을 죽이기로 작심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후 집요하게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국내외의 광야를 정처 없이 떠돌며 도망 다니는 방랑자의 신세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시인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묘사했지만, 다윗을 이스라엘 민족의 선한 목자이자 성군으로 키운 건 팔 할이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그 긴 고난의 세월 속에서, 그의 시편고백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세월 속에서, 음침한불운이나 불행에 사로잡혀 부정적 인간이나 심성이 비뚤어진 인간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 되지는 않습니다. ‘폭군 연산군같은 인간은 더더욱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되레 그 고난이나 불운의 세월을 통해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자 왕 위의 왕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오묘한 섭리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신앙영웅으로 성장 및 성숙합니다

 


한순간에 천재와 인재 등으로

부유한 재산도 자녀도 다 잃고,

몸마저 중한 병에 걸려 잿더미 위에 앉아 신음하던

동방의 의인(義人)’이자 고난의 대명사’.

그는 자기 생일을 저주하기에 이른‘(욥기3:1) 지경의

음침한고난, 그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형극의 십자가 같은 고난의 와중에서도

이런 소망 이런 고백을 간직하고 오래 참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as gold) 나오리라.-(욥기23:10)

 


세상사람 다 나를 몰라줘도,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세상이 다 나를 비난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직 그분은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아시고 내가 아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인생여정의 이 모든 고난의 세월은 금세와 내세의 영원한 생명과 복된 생존을 위한 순금으로의 성숙 및 성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듯 정녕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정녕 살아 계신가?’, 그런 회의가 들 수밖에 없는 처참한 지경이자 난해한 고난의 와중에서도 오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에, 재산도 자식도 건강도 다 잃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신뢰만은 잃지 않았기에 그 고난 그 십자가조차도 단련의 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약을 시키자면,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이자 신령한 부활로 최종 완성 및 증명되는 그런 부활 생명에의 도정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과연 그 믿음 그대로 순금으로 부활했습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친히 뵌' 신령한 체험 이후,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신’(욥기42:) 생애를 살다간 것입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고난 역시 저 의인 욥의 고난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이유 있는 연단의 도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순금으로 부활합니다. 그 고난의 세월 속에서 되레 더 바르고 더 선한 신앙인격으로 성숙합니다. 저 욥이나 저 다윗이 그럴 수 있었던 절대요인은 과연 저들이 하늘나라의 신령한 비밀이자 왕 중 왕의 세계에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이루어지도록역사 및 섭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소불위한 세상의 왕이자 권력이 를 죽이려고 하는데 세상에서 내가 의지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누구 있겠습니까? 그 사면초가, 그 딜레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그 역경 그 절망의 와중에서 다윗은 세상이 아닌 하늘의 비밀이자 오직 믿음의 비밀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론 이해할 수 없고 때론 인내하기 어려운 그 모든 고난의 사건이나 여정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이유와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맡기고, 오래 참으며 액면 그대로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조차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원수일 수 있는 사울 왕을 지척에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수차례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손으로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그것조차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섭리 및 심판에 맡깁니다그렇게 국가나 인류는 물론이고 인간 개개인의 생사화복 등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 주인이자 왕 위의 왕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신앙인격으로 키워진 것입니다.

 


과연 다윗에게 주어진 긴 고난의 세월은 되레 하늘의 복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이자 연단의 세월이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의 영혼과 육신을 인도하며 살피는 선한 목자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자 성군으로 성장 및 성숙되는 세월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다윗을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절치부심했던 사울왕은 그 아들들과 함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적군에 의해 다 죽고 말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같은 과거적 혹은 현재적 인생의 각종 고난이나

상처나 불행에 반응하는 오늘 우리의 자세나 삶은 어느 쪽일까요?

연산군? 정조? 아니면 왕 위의 왕의 나라 곧 영원한 주인()이자 생명이자

비전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열려진 신앙영웅다윗?

 


다윗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별이 되게 한 나의 주, 나의 목자(牧者)’

관한 고백을 다시 들어봅시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애송했고,

저도 예나 지금이나 즐겨 애송하는 명 시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자족의 여유와 영혼의 평화가

푸른 초장처럼 생수의 강처럼 흐르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자 비밀이

과연 지금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23,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