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처럼 우리도 영적인 존재다.
우리의 영(靈)은 죽지 않고,
우리의 몸이 사라져도 영은 남을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분’
(요한복음14:9)이라고 말하고 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로새서1:15, 고린도후서4:4)
이라고, ‘그 본체의 완전한 묘사’(히브리서1:13-NIV)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가족이 서로 닮은 모습을 표현할 때
‘부전자전’이라는 말을 쓴다. 사람들은 내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모습을 발견하면 기뻐하듯이,
하나님 역시 당신의 자녀들이 자신의 형상과 모습을
닮아가기를 바라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4:24)
이것만은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고,
어떤 신(神)도 될 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교만으로 인한 거짓말이고, 지금까지 사탄이
가장 오래 사용하고 있는 유혹이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세기3:5)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많은 종교와 뉴에이지 철학은
우리가 신성을 지닐 수 있다든지, 아니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그 오래된 거짓말을 여전히 하고 있다.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이 욕구는 우리가 우리의 상황,
미래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할 때 나타난다.
하지만 피조물인 우리는 절대로 창조주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가 신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으신다.-
-릭 워렌(Rick Warren)-
*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태생적으로 타락한
그래서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품 내지
성정을 가진 인간 우리가 신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신이 될 수도 없습니다.
신은커녕 참 의인이 될 수조차 없습니다.
한계를 살다가는 피조물인 인간이 여타 종교를 막론하고,
사탄의 미혹을 받거나 수행 도통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신(神)처럼 되어’, 남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지시하거나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삶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무서운 교만입니다. 무신론(無神論) 역시 같은 욕망에서
비롯된, 인간 자기가 곧 ‘신’이라는 교만이자 자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3: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고행 및 수행해서 ‘신이 되었다’거나,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해서 목사나 신부나 신학박사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바리새인’이 되었다 해서, 자신을 남들과 차별화시키며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될 절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성경은, 그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은, 인간 우리가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겸손하게 ‘본받는 사람’ 그래서 ‘닮아가는 사람’ 그래서 ‘아가페(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별난 고행을 하면서 그리스도보다 더 거룩하고 잘 믿는 양 행세하는 기인이나, 스스로를 신격화시키거나 추종자들이 신격화시켜 군림하고 지배하는 ‘신’이나 ‘그리스도’나 ‘교주’ 행세를 하는 그 자체 모두가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큰 악령(사탄)의 미혹이자 교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It is enough).-(마태복음10:24~25)
그렇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족하도다’의 수준에 이르도록 성장 및 성숙한 인격이 되어야 할 절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세상을 이기는 참 평안과 기쁨과 자유에의 길이자 진리가 있고, 죽음조차도 이기는 영원한 부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장이 더딘 미숙아나 지진아는 자신들도 불편하지만 그 어버이의 마음은 더더욱 애타고 안타깝기 마련입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겉사람’이나 교회건물이나 외형이나 연륜은 이미 ‘성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젖’이나 ‘떡’이나 ‘돈’만을 달라고 떼쓰며 투정을 부리는 혹은 이기적인 '내 뜻'의 축복이나 욕망의 성취만을 구하는 영적 미숙아나 유치한 지진아의 수준에 머물러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신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있는 성숙한 모습일까요? ‘그리스도의 삶’ 곧 이타적 섬김과 헌신과 희생의 삶을 조금이라도 닮아있는 모습일까요?
‘험악한 세상’을 아등바등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그것을 닮고 그것에 찌들어, 세상의 성품이나 성정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인생인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세상 ‘생로병사’와 함께 육신도 영혼도 실상인즉 다 끝나버리는 ‘허무한 인생’인 것은 아닐까요?
‘고난주간’이 목전에 이르렀습니다.
인생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는 있고,
그래서 ‘고난주간’ 역시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구별 및 성별되어야 할 정작의 문제는,
그 고난이 세상과 함께 ‘허무한 인생’ 그것으로 끝나버리느냐,
신령한 부활생명을 낳는 그래서 ‘하늘나라 시민권’을 얻거나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는’ 새로운 시작이 되느냐, 그것입니다.
같은 고통을 앓는 ‘고난주간’이지만, 서둘러 수술해야만
살 수 있는 급성맹장염의 차라리 허무한 그것과 해산하는
여인의 산고는 그 결말이 전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몫의 ‘고난주간’은 어디쯤 이르렀을까요?
내 몫의 고난주간은 어디쯤 와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보다 절실하게 우리 자신을, 제 자신을, 살펴봐야할 이유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내일’이면 너무 늦을 수도 있으니까요.
과연 우리에게선 아니 내게선 거듭난 ‘새사람의 향기’이자 ‘속사람의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2:15)가 조금이라도 나는 것일까? 여전히 ‘옛사람의 악취'가 나는 것은 아닐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때론 차라리 완악하고 비뚤어진 혈기나 성정이나 성깔의 악취를 여전하게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天國)로 이사를 가는’ 인생인데, 그럴 수 있어야만 한세상 헛되게 살지 않았다는 영원한 결실(結實)이자 보람이 되는데, 내게서 여전히 악취가 나고 있다면 그런 심령으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저 스스로 부끄러워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요. ‘빛의 잔치’에 ‘어둠’은 스스로 부끄러워 도망가고 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나 우리의 크고 작은 말이나 생각이나 삶에서 정작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바르고 선한 양심의 향기가 난다면, 그 ‘새사람의 향기’ 내지 ‘속사람의 향기’가 퍼져서 우리는 ‘세상의 향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산 소망과 부푼 기대를 가지고 되레 기뻐하며 ‘하늘나라’로 이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평소부터 하늘나라를 준비한 인생은 그래서 진실로 복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하늘나라의 생명과 평안과 기쁨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땀과 피를 흘리며 준비하지 않은 자는 ‘올림픽 제전(祭典)’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광스러운 메달을 딸 수는 더더구나 없는 일이더군요. 진실로 복이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보다 더 큰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그것이 되레 당연하고 바른 양심의 소리이자 말씀의 소리가 아닐 수 없겠지요?
우리는 지금도 알게 모르게 세상 포토라인에 선, 혹은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인가를 ‘본받으며’ 사는 인생들인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긴 세월 ‘현실’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고, 그렇게 그것을 선망하는 가치관으로 이미 세뇌 및 각인되어있는 인생들인 것은 아닐까요?
결코 허무하지 않은 참 존재와 참 가치를 '본받으며' 사는, 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인생이자 인격이 될 수 있는 저나 당신이 될 수 있기를!
그런 인생이자 인격의 모본일 수 있는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그러나 신령하도록 성령 충만했던 ‘성 바울(Saint Paul)’은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하나님처럼, 신처럼, 신격화하거나 과장하지도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는 ‘교주’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되레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 중의 작은 자’라고,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심지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디모데전서1:15)라고까지 공공연하게 토설했습니다.
과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본받는 자’, 그래서 ‘닮아가는 자’의 진솔한 모습이자 겸손한 자세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처음마음, 처음 사랑’을 잃지 않고 시종여일했던 ‘참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주의 종’으로 한세상 사역하거나, 신령한 은사나 능력을 행사하거나, 대형 목회에 성공했다 해서 스스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자기가 ‘신’이나 ‘주인’처럼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상대적 의미에서 말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사도 바울 같은 ‘참 지도자’가 많이 나올 수 있게 되기를 함께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씀에 다시 ‘들을 귀’를 기울여봅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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