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들

이형선 2018. 4. 2. 10:25



-만일 기적이 없었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

 

 


죽은 자의 부활이 정녕 가능할까요?

부활하신 예수사건은 사실이자 진실일까요?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사역했던 직계 제자들부터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들 역시 죽은 자의 부활

실로 이해하기도 믿기도 어려운 사건입니다.

인간 우리의 상식이나 이성으로는 해명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진화론은 물론이고, 그것에 기초를 둔 현대의

첨단과학이나 의학으로는 더더욱 증명이 될 수 없는 난제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의심 많던 제자 도마의 솔직한

고백이 되레 더 진솔하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한복음20:25)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분명히 목격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이 당연히 믿기지 않았겠지요. 설령 뭔가를 보았더라도, 상심이 너무 크고 너무 그리워 헛것인 환영(幻影)이나 유령을 본 것이려니 싶었겠지요.

그러나 그 후 여드레가 지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제자들이 있던 집 안에 나타나십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문들을 굳게 닫아두었는데도 정말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사십일동안에 걸쳐 그렇게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일이 여러 차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의 몸은 이전의 몸과는 분명 다른 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그런 몸을 신령한(spiritual) 또는 영화롭게 된(glorified)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20:)

 


도마는 그의 손가락으로 주님의 손의 못 자국이나 옆구리의 창 자국을 직접 확인합니다. 부활에의 확인이자 현존(現存)의 체험입니다. 신령한 체험이자 신비 체험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금언처럼, 하나의 체험은 백의 상식이나 이성이나 지식을 이깁니다. 뛰어넘습니다. 도마가 절로 외마디 탄성을 토로합니다. '믿음의 고백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

 


그런 도마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선 믿음의 문제이자 차원임을 다시금 강조하시며, 아울러 보지 못하고 믿는후세들 곧 오늘의 우리들을 위해서도 그것을 이렇게 환기 및 주지시켜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20:29)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의 상식이나 이성이나 지성의 문제도 아니고 그 차원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문제이자 그 차원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 중의 기적이자 지고의 신비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것을 믿는 자가 되어 보는 눈, 들을 귀, 깨닫는 마음이 열려져야만 비로소 이해가 되고 체험이 되고 믿어지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이자 창조주이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신령한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영혼 불멸이나 육신의 신령한 부활을 믿지 못했던 당대의 유대교나 전자는 믿었으나 후자는 믿지 않았던 헬라 철학이나 문화 등의 영향을 받아 저 도마처럼 회의심(懷疑心)이 강했던 고린도교회교우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부활을 직접 목격한 당대의 증인들을 애써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적대자)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15:)

 


말씀은 유식한 이나 과는 다릅니다. ‘말씀은 오직 믿음을 가진 믿는 자의 몫이자 복입니다. 진솔한 신앙양심이자 신앙인격을 가진 자의 몫이자 복이자 지혜라는 것입니다. 순교까지 기꺼이 감수했던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한 것처럼 서로 입을 맞추어 날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거짓 증인들을 애써 저렇게 열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처럼 미진한 신앙양심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하물며 성령 충만했던 사도들이랴!

 


저들이 서로 입을 맞추어 조작했다면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에의 증언기사부터가 되레 판에 박은 듯 동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사건에 대한 묘사나 진술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일테면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이나 수자가 다르고, 그 여인들이 만났다는 천사가 요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두 명인데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한 명이라고 되어있어 다르고, 저 여인들이 전한 말을 듣고 달려가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한 사도가 누가복음에는 베드로한 사람인데 요한복음에는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요한)’ 두 사람이라고 되어있는 등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래서 부활 자체의 진정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되레 신뢰성이 증대됩니다. 그럴 것이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지론이 그렇듯이 특정 형사사건도 그 사건에 대한 목격자들의 이후 진술은 서로 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심리적 충격이 더 크기 마련인 초자연적 신비사건을 접한 목격자들의 진술이나 증언은 그 이상으로 서로 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 기록 역시 필자의 강조점에 따라 생략 혹은 부가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각설하고,

당대의 타락한 문명의 도시 고린도에 사는, 그리고 오늘의 타락한 세상의 도시 고린도에 사는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의 목격자이자 증인들을 저렇게 애써 열거해보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이유 역시 주님이 도마에게 친히 하신 저 말씀처럼 한마디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의미이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는 그 의미에 대한 재삼재사의 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부활, 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같은 유형의 그런 사랑의 부활이 아닙니다. 귀족계급인 네홀류도프가 혈기와 치기만만하던 청년시절 불장난처럼 사랑했고 그래서 임신까지 시켰던 하층계급의 여인 마슬로바(카츄사). 그러나 이후 버림받고 잊힌 그녀가 낳은 아이는 죽고, 그렇게 점차 망가져 창녀로까지 전락한 그녀가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된 것을 뒤늦게 알고 양심의 큰 가책을 느끼며 그런 마슬로바를 다시 헌신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네훌류도프.

그런 인간애의 부활곧 남녀 혹은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삶이나 그런 휴머니즘도 고귀한 미덕이자 가치이지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정치인이나 명사들이 재기에 성공해서 얻는 그런 유형의 명예의 부활은 더더구나 아니고,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살아나는 풀이나 나무, 땅 속에서 썩었던 씨앗이 벼나 밀로 다시 살아나는 그런 유형의 자연의 부활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저 자연의 부활이 그나마 최선의 비유적 설명이나 은유적 사례가 될 수는 있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연의 부활을 예로 들어 그 이치를 설명한 후 그 요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a natural body)으로 심고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린도전서15:42~44)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한 알의 밀의 죽음으로 비유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는 세상이나 남들이 다 끝났다‘, ’볼 장 다 봤다고 조롱하며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는 때가 아닌가요? 그런데 그 가 되레 진실로 영광을 얻을 때라니? 과연 참 믿는 자의 경지는 속물인 우리의 이해나 가치나 상식 그것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습니다.

 


실인즉 한 알의 밀의 길이자 삶 그 당연한 그래서 무심했던 자연의 이치도 보는 눈, 들을 귀, 깨닫는 마음이 열리거나 그렇게 심령이 거듭나면전혀 새롭게 보이고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죽을병에 걸렸다 구사일생으로 거듭나면당연처럼 예사처럼 주어진 하루라는 가 전혀 새롭고, 하루의 생명이 감사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들이 다르게 보이고, 하찮은 미물조차 새롭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령한 부활을 신령한 부활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신령한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오직 믿음의 문제이기에, 먼저 믿는 자거듭난 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복음3:)

 


거듭나다(born-again)’ 곧 헬라어 게네데 아노덴위로부터 다시 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는 난해한 말씀은 곧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에서 온 자이자 타락한 육신의 혈통인 아담의 후예가 아닌, 하늘 곧 위에서 온 자이자 ()이신 하나님의 혈통그리스도의 후예로 거듭난 생명이자 존재가 되는 삶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적으로 거듭나는생명자체부터가 세상 표현으로 기적이고, 종말적인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역시 기적입니다. 이성적 지식이나 이론으로 규명되거나 정의되는 일이 아니고, 오직 물과 성령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해되지도 믿어지지도 아니하는 초월적 신령한 생명이자 신비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막론하고, 성경에서 기적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창조주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나라도, 부활의 생명이나 몸도 다 초자연적 세계의 존재이자 의 세계의 구현이니까요. 파스칼은 그래서 그의 유작 팡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설교를

 ‘성서나 예언에 의해 증명하지 않고

 기적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자기가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을 통해 증명해주었다.-

 


하나님의 고유권한인 저 죄인을 용서하는권한이나 그 기적은 곧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가복음2:),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대로 성취하신 기적의 치유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그것이 하늘이 아닌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였고, 나아가 십자가에서 버릴 권세로 죄인인 인생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 우리 대신 아니 내 대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27:46), 그렇게 대속(代贖)의 절규대속의 죽음을 대신 치루고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래서 또한 다시 얻을 권세사흘 후에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자기가 메시아임을 확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누가 과연 무한한 창의성이나 꿈이나 비전을 가진 행복한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나 초자연적 기적이나 부활의 신비나 비밀을 믿는 자’? 아니면 부활이나 기적을 믿지 않는 지극히 세상 내지 현실 중심적인 냉철한 지식인이나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나 유물론자?

그 답은 물론 각자의 몫이 되겠지요.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다’(데살로니가3:2)는 것입니다. 진실로 믿어지는 믿음그 자체가 하나님이 내려주신 큰 은혜이자 긍휼이자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20세기 일본의 탁월한 신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 선생은 그 신령한 기쁨이나 행복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부활을 믿고서 우주와 인생을 한 번 보라.

 그리하면 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인생이란 얼마나

 기뻐할 수 있는 것인가를 깨달을 것이다.

 

 ‘보라 내가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린도전서15:)

 

 저런 신앙이 있을 때 비로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세상에서 무서운 일도,

 슬픈 일들도 다 없어져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