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경험적 초월을 모색하는 인간에게
혁명과 회심(回心)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과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별개의 과제가 아니고
십자가의 두 기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명백히 밝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혁명주의자셨지만 극단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사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H. M. Nouwen)-
*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상이나 지식이나 윤리도덕이나
종교의 도리나 교리를 주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을 주신 분’입니다. ‘아가페’라는
헌신과 희생과 사랑을 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이기도 합니다.
친히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
따라서 사상이나 지식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상한 사상이나 지식이나
윤리도덕이나 교리나 설교도 입이나 혀로
가르치는 것이나 머리로 배우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그것은 ‘진리(眞理)’가 아닙니다. 인격화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내주는 삶’이 되지 못하면 ‘진리’가 못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도’ 못합니다.
세상이나 종교계를 막론하고, 인간관계에서 발화되는
사회적 갈등이나 반목이나 대립은 되레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나 지도자들 곧 스스로 사상이나 지식이 많다는
유식한 사람들에 의해 야기되곤 합니다. 그 사상이니 지식이
이기적 혹은 독선적으로 유용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리스도가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진실로 ‘그분 자신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양’이라는 이타적 삶으로, 헌신적 사랑(*아가페)으로,
진리의 진리 됨을 정의의 정의됨을 말씀의 말씀됨을
증명해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
곧 ‘대속(代贖)의 죽음’을 통해 죄인인 인생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해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아무리 고상한 학문이나 사상이나 개념도, 심지어 종교의 율법이나 교리 같은 법리조차도 삶으로 사랑으로 증명 내지 확증되지 못하면, ‘완성’되지 못하면, 그것은 죄다 공허한 것들입니다. 허무한 것들입니다. 우리를 진실로 자유롭게 하지도, ‘불멸의 세계’로 인도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와 형극의 십자가에서, 이타적 절대 사랑의 십자가에서, 비로소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해서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되레 십자가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서 “다 이루었다”고 감히 선언하신 분입니다. 성공한 대통령의 권좌나 출세한 혹은 소원 성취한 어떤 영광의 자리에 앉아 “나를 본받으라”고,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차라리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그 저주와 고난의 현장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정녕 어렵습니다.
참 그리스도인들, 그 제자나 목회자들이 진실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도 ‘성공한’ 직업적 신분이나 대형제단이나 강단이 아니고, 이타적 삶의 자리인 십자가 현장이 되어야 할 절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몫의 사명을 자기 몫의 십자가 현장에서 ‘다 이루었다'거나 사도 바울처럼 '다 마쳤다'(디모데후서4:7)는 종언이자 말씀을 후세들에게 의연하게 남기고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진실로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생 자기에게 주신 소명 내지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살아왔다는 증언이자 죽음 이후의 역사와 섭리 또한 그분 곧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의미이자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23:46)
해가 져도 돌아갈 집이나 부모가 없는 ‘고아의 설움’을 아십니까? 설령 그 무엇이 째지도록 가난한 집이나 무능무력한 부모라 쳐도, 고아들은 그런 집이나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마냥 부럽기 마련입니다. 오막살이 집이나 부모가 있다는 그 자체만도 큰 행복이자 축복이자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크고 불행한 ‘고아의 설움’을 따로 있습니다. 종말적으로 해가 져도 돌아갈 ‘하늘나라’도 없고, 종말 이후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도 없는 ‘고아의 설움’은 그 이상으로 크고 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 여정에서 영안(靈眼)이 열려 ‘창조성의 원천인 불멸의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 인격화하지 못한 자의 생명은 실상인즉 무덤이자 음부에서 끝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어둡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인이 된 저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이 그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에 또한 서술한 이런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성의 원천은 바로 불멸의식(a sense of immortality)
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바라볼 수 없고,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시공을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창조의 욕구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이
인간이란 것에 대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성의 원천인 불멸의식’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간 자신의 ‘시공을 넘어서는’ 존재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창조적인 삶의 의욕도 욕구도 기쁨도, 참 소망도 참 사랑도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동물들처럼 짐승들처럼 끼리끼리, 이기적인 내지 집단이기적인 삶만을 영위하기 마련입니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여타 짐승 내지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창세기1;27)된 인생의 영혼은 죽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그 초월적 이해가 곧 ‘불멸의식’입니다. ‘영원한 생명(永生) 의식’이자 ‘부활생명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술가나 문학인들의 창조성도 다 고상한 것이지만, 세상에서 ‘부활’보다 더 고상하고 위대한 ‘창조성’은 없습니다.
과연 그 ‘불멸의식’을, 그 하나님의 비밀이자 초월적인 생명의 신비를 확실하게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저주와 죽음의 십자가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으로 받아들였고, 그 고난과 고통의 현장 한가운데서 되레 “다 이루었다”고 증명 및 선언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크고 작은 범사나 우리 몫의 고난이라는 ‘십자가’ 현장에서, 되레 “Why? Why me?”라고 부르짖으며 원망 불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정녕 살아 계신가? 신이 정녕 존재하는가?’, 그렇게 회의하거나 신앙허무주의 내지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죄다 ‘창조성의 원천인 불멸의식’을 잃었다는 반증입니다. 믿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우리 역시 ‘내 뜻’이 아닌, ‘내 뜻’과는 다른, 십자가에서의 죽음조차도 믿고 온전히 맡길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진실로 알고 있고 진실로 믿고 있다면, ‘내 뜻’대로 안 된 세상 그 어떤 일이나 사건 때문에 실망 좌절하거나 원망 불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불멸의식 곧 불멸의 생명관이나 가치관을 진실로 가진 자는 ‘내 뜻’대로 된 것은 그래서 감사하고, ‘내 뜻’대로 안 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셔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더 오래 참으라’는 보다 심오한 연단에의 섭리에도 감사하고, 심지어 십자가 현장에서조차도 ‘불멸의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범사 그 우여곡절로부터 되레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중심으로 사는 자는, 불멸의 가치와 생명 안에서 사는 자는, 그래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 곧 초월적인 구원의 은혜이자 비밀한 섭리 안에서 신령한 부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창조성의 원천’인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저 나무들도 겨울이 다가오면 무성했던 자기 뜻(?)이자 자기 잎사귀들을 죄다 부인하고, ‘겨울’이라는 십자가(?) 그 현장에 온전히 순응하더군요. 겨울이 없는 자에겐 봄도 없고, 죽음이 없는 자에겐 부활도 없다는 ‘불멸의 비밀’이자 ‘창조성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과연 한계를 살다가는 결국이 허무한 ‘내 뜻’을 부인하고, 불멸의 가치이자 생명인 ‘하나님의 뜻’ 중심으로 사는 삶이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참 복이 있는 삶이자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 당시 병들어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된 그래서 악취까지 풍기던 나사로의 시체를 다시 살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미’ 하셨던 말씀을 다시금 들어봅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는 우리네 인생 여정의 저 모든 ‘허무의식’을 이기는, ‘불멸의식’에 대한, 불멸의 가치와 생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 여부를 다시금 진솔하게 점검해보면서 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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