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사슴'을 살려준 사람이 받은 '하늘의 복'

이형선 2018. 4. 9. 10:45



신라왕조 말기와 고려왕조

초기시대를 살다간 서신일(徐神逸).

그는 신라조정에서 6두품의 으뜸벼슬인

아간까지 역임했으나 노년에는 한적한 시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경작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고려사세종실록등에도 기재된 인물이자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묘역이 지금도

향토유적으로 보존되고 있으니 실존인물인

것은 분명한데, 그가 사슴을 살려준 설화 내지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고려시대 이제현이 기록한 역옹패설에 의하면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서신일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몸에 화살이 꽂힌 사슴 한 마리가

 뛰어 들어와, 화살을 뽑아주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夢一神人謝曰),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 은혜로 죽지 않았으니,

 그대 자손이 대대로 벼슬길에 오르게 하리라 하였다.

 신일의 나이 80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필(),

 필의 아들이 희(), 희의 아들이 눌()이라.

 과연 신인의 말과 같이 태사(太師)가 되고

 내사령(內史令)이 되어 다 고려 종묘에 배향되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난 당시,

이미 80 노인인 서신일에겐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니까 알 수 없지만 아내 역시 노년의 나이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따라서 그대 자손운운하는 것 자체부터가 허황한 말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저 서신일은 과연 그 후 하늘의 복을 받아 기적처럼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아가 신인의 말 그대로 서신일의 자손이 다 벼슬길에 오릅니다. 저 삼대가 다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살리는 재상이 된 것입니다.

 


물론 저 신인(神人)‘은 당대문화가 그랬던 것처럼 민속적이자 토속적인 혹은 불교적인 신앙의 의미를 가진 표현이겠지만, 비약해서 성서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천사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저는 저 사경(死境)에 처한 사슴역시 인격화시켜볼 수도 있고 그래서 저 서신일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채 버려진 낯선 사람을 정성껏 돌보아 살려준 선한 사마리아인’(누가복음10:)과 같은 경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갈급한지경에 처한 사슴혹은 사슴 같은한 신앙인격의 시편을 묵상해봅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편42:1~3)

 


내킨 김에 여기서 노천명의 명시 사슴도 다시금 음미해봅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과연 사슴은 초식동물이지만 그래도 모가지가 깁니다.’ ‘향기로운 관까지 쓰고 있습니다. 풀을 먹고 살아도 타고난 기품이 무척 높은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사자나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이 지배하는 험난한 세상 내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약한 자의 고고한 기품은 외려 슬픈모습일 수 있습니다. 모가지를 길게 내밀고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은 곧 외로움이기에 역시 슬픈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슴이 탐욕스러운 맹수나 금수처럼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설령 자기의 무척 높은그 고고한 꿈이나 이상이나 비전이 험악한 세상현실에서 이미 잃어버린 전설이 되었다 쳐도 그래도 사슴은 자기 몫의 길을 갑니다. 또한 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타고난 자기 몫의 운명이자 길이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추구하는 궁극적 이상향이자 가치는 현실이라는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데 산내지 산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 성경 시편시인의 말씀을 빌려 표현하자면,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 여류시인 노천명의 사슴도 그래서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것이겠지요.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해서말입니다. ‘내 영혼의 진정한 고향의 모음이자 그 나라의 안식은 오직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찾는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고산삼림지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뛰면서 살지만 그래서 또한 목이 마른 사슴은, 목이 타는 사슴은, 그때 물을 마시지 못하면 기진해서 쓰러져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냇물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갈급함은 곧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자 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슴의 처절한 갈급함이자 갈망을, 사람은 물론이고 공중의 새굴 속의 여우등 그 모든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한사코 외면만하실까요?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어 먹고 마시게 하시며,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론 계시를 통해서, 때론 침묵을 통해서, 때론 성육신(成肉身)’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답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신라시대에도 고려시대에도 창조주 하나님은 살아계셨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요.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때도 저 사슴을 저 서신일을 통해 구원하셨고, 신인혹은 천사들을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선한 서선일을 축복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의 문제이자 숙제는,

세상의 시냇물이나 율법이나 사람의 선행이나 그 구원으로 사슴의 목마름그 궁극적 갈급함이나 갈망이 해갈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보다 근원적이자 온전한 구원, 영원한 구원에의 이자 말씀이자 생명이자 해법이자 답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참 신인(神人)' 곧 '참 신'이자 '참 인간'이신 '메시아'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현존의 말씀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계를 사는 인류 및 구약성경의 숙제이자 염원이었고, 점진적이자 체험적으로 그것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끝에 마침내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이르자 '육신을 입고(Incarnation)‘ 친히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메시아가 있었으니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해서 인생 및 인류의 숙제에 답변하신, 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마른 모든 사슴들에게 친히 답변하신 참 구원에의 해법을 직접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답변하여 이르시되,

 이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4:13~14)




한편,

구약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어느 날 낯선 나그네 세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도 나그네 설움을 많이 겪으며 살아왔던

아브라함은 그들을 모른 척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인을 섬기는 겸손한 종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세 나그네를 극진하게 영접 및 대접합니다.

한마디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것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my lord)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창세기18:)

 


아브라함이 성의껏 마련해서 가져온 떡과 고기 등의 음식을 먹은그들 세 사람은 예사 나그네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두 천사를 대동하고 사람의 모습 곧 인격으로 나타나신 형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선한 마음 선한 인격으로 길가는 낯선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었지만 의외로 그것은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한 것이었습니다. ‘인격 시험에 합격한 때문일까요. 식사를 마친 그들이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입을 엽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 가 단수로 나서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더라.-(창세기18:)

 


아브라함의 나이 이미 99세입니다. 아내 사라는 89세입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 임신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니? 그 말을 들은 사라부터가 너무 황당하다 싶었는지 속으로 웃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우리가 숨어서 속으로 웃고 우는 것조차 통찰하시는 분입니다. 인간 우리의 아직은 부족한 믿음도, 죄나 허물이나 완악함도 다 통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자 초자연적 하나님은 '아들'이자 '소망'을 주신다는 '구원에의 언약'을 취소해버리지 않고 그대로 실행 및 성취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 '은혜'가 되고 '긍휼'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세기18:13~14)

 


저 계시 저 말씀 그대로 사라는 하늘의 복을 받아 이듬해 아들을 낳습니다. 사라가 크게 웃습니다. 처음엔 너무 어이가 없어 웃었지만, 이제는 너무 기뻐서 웃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삭입니다. 쓴웃음이나 실소가 일 년 후에 함박웃음이 된 것입니다. ‘말씀이 성취되어 영원한 기쁨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니까요.

 


과연 알버트 슈바이쩌 박사의 생명경외(敬畏)사상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물론이고 짐승의 생명도 초목의 생명도 다 소중한 것입니다. 자연의 생명을 함부로, 필요 없이, 살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 거칠고 사나운 맹수들조차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마치 금기의 계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용할 양식이상의 탐욕을 부리지 않고, 무모한 살상이나 행악을 자행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생태계나 환경의 파괴로 인해 자연이 병들고 죽어 가면 결국 사람도 병들고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럴수록 공존(共存)을 기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자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자연의 마음을 본받아 운명의 화살을 맞은 사슴이나 인생 나그네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태복음25:40) 등을 긍휼히 여기며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리는, 생명경외사상이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가진 자는 그래서 그 선한 마음, 선한 인격으로 인해 되레 자기가 하늘의 복, 하늘의 긍휼을 받게 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