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관포지교'와 '서로 섬기는' 관계

이형선 2018. 4. 23. 10:36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사학자들이 춘추전국시대에 환공을 도와 천하를

도모한 관중과 유비를 도와 천하를 도모한 제갈공명을

중국 2대 명재상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실물경제에 밝았던 실용주의자 관중은 그래서

중국 최초의 경제학자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으니까 비범했던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정약용 선생의 명저 목민심서(牧民心書)’목민

사상도 저 관중의 정치철학 내지 사상을 그의 제자들이

집대성한 책 관자(管子)1권에 나오는 목민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니까 관중이 후세나 동양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에는 이런 평가가 또한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는(天下不多管仲之賢),

 사람을 능히 알아보았던 포숙을

 더 칭찬하였다.(而多鮑叔能知人也)-

 


그런 의미에서 우리 동양역사에 나타난 관중과 포숙의 인간됨을 다시 좀 상고해봅시다. 집안이 미천하도록 가난했던 관중과 부요했던 포숙은 죽마고우입니다. 두 사람은 청년시절 함께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동업한 것입니다. 훗날 관중은 포숙의 인간됨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가난했을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했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나는 포숙을 위해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찍이 세 번 벼슬길로 나갔으나 세 번 다 군주에게 쫓겨났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모자라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다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시던 공자 규()가 왕권을 놓고 다투다 져서 죽었다. 나와 함께 그를 모시던 초홀(苕忽)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따라 죽었다. 그러나 죽지 못한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다. 포숙은 그런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작은 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에 이름을 알리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었다.”

 


우리는 과연 너무 자기 이욕만 챙긴다 싶거나, 실수나 실패를 해서 내게 어려움이나 손해를 끼쳤다거나, ‘세 번취직해서 세 번 다 쫓겨났다거나, ‘세 번싸움터에 나가 세 번 다 달아나는 등 차라리 무능하고 치사하고 비열하게 보이는 친구나 친지나 자녀나 이웃 등을 저런 포숙처럼 긍정적 내지 포용적으로 이해하며 배려하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큰 희망을 품고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아량이 있는 것일까요?

 


고난의 풀무에서 순금이 나오고, 조개의 고통에서 진주가 나오듯이, 저 모든 인생의 실패나 실수나 좌절이나 고통이나 치욕을 통해 관중은 되레 현실정치의 거목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포숙의 저 마음이나 인격의 지경은 한마디로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나 형편을 바꿔놓고 생각하는덕성의 경지이자 긴 안목의 인간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때론 ’(?)‘ 같은 지혜나 처세나 야심이나 권모술수마저 필요한 현실정치에 밝은 자는 관중이었지만,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사심 없는 덕성을 가진 자는 포숙이었습니다. 그렇게 천성 내지 성품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은 나라와 백성을 살리자는 대의(大義) 아래 뜻을 같이하고 한 몸처럼 산 경우일 수 있습니다.

그럴 것이 당대 제()나라 왕은 이공이었는데, 이공에게는 제아, , 소백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관중은 저들 중 둘째공자인 규의 스승으로, 포숙은 막내인 소백의 스승으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포숙은 정치권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그런 임명조차도 신병을 핑계 삼아 한사코 사양합니다. 그러자 관중이 그를 찾아가 설득합니다. 제나라를 짊어질 차기 왕재는 성정이 거칠고 무도한 첫째공자 제아가 아니고, 규와 소백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우리가 각각 두 공자를 모시고 있으면서 미래를 기약하자는 심중을 털어놓자 그 뜻에 공감한 포숙은 그제야 소백의 스승으로 나섭니다



그 후 이공이 죽고, 첫째 제아가 왕위를 이어 제나라의 14대 왕 양공(襄公)으로 즉위합니다만 그러나 무도한 행동을 일삼던 그는 이듬해 사촌인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피살당하고 맙니다. 그런 반란을 피해 왕자 규는 관중과 함께 노()나라로, 소백은 포숙과 함께 거()나라로 각각 망명합니다.

그 후 반년 만에 다시 반란이 일어나 공손무지 역시 피살당하고 맙니다. 그러자 공석이 된 제나라 왕좌를 둘러싸고 둘째 규 옹립세력과 셋째 소백 옹립세력이 서로 대립하게 됩니다.

규의 스승이던 관중은 셋째공자 소백을 제거하고자 직접 화살을 날립니다. 화살이 명중하자 소백이 죽은 것으로 알았던 관중은 집권을 서두르지 않고 망명지인 노나라에서 지체합니다. 그러나 혁대를 맞고 천만다행으로 살아난 소백은 규 세력의 그 빈틈을 역이용해서 선수를 칩니다. 서둘러 제나라에 입성해서 왕좌를 차지한 것. 그가 바로 환공(桓公)입니다.

 


환공이 즉위한 이후 왕자 규는 살해당합니다. 관중과 함께 규를 모시던 초홀(苕忽)은 자결합니다. 그러나 관중은 그렇게 죽지 않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굴욕스러운 몸으로 살아남아 감옥에 갇힙니다. 물론 환공은 자기에게 활을 쏘았던 관중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포숙이 나서 환공에게 이렇게 진언 및 간청합니다.

() 한 나라만 통치하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죽여도 좋으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관중을 중용해야 합니다.”

자기를 보좌해온 포숙의 안목이나 인간됨을 잘 알고 있었던 환공은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마침내 관중을 재상으로 세웁니다.

 


관중은 그 후 과연 40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창고가 풍족해야 백성이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예의와 치욕을 안다는 실용주의 경제정책의 기조 아래 각종 개혁을 추진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합니다. 아울러 군대를 튼튼히 하여 제나라와 환공의 위세를 천하에 떨치도록 하는, 패왕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습니다

 


기원전 645, 관중은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그래서 죽게 되는데 그때 환공이 문병 겸 차기 재상감을 의논하고자 그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이윽고 환공이 후사를 염려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포숙아(鮑叔牙)가 어떻겠소?”

관중의 대답인즉 이렇습니다.

포숙은 군자입니다. 천승의 나라라도 도()에 어긋나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정치를 담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심하기 때문에 한 가지 악한 일을 보면 쉽게 잊지를 못합니다.”

 


막말로 포숙은 재상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자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중은 전적으로 포숙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재상까지 된 사람 아닙니까?! 죽을 때가 되니까 망령이 들었나? 자기 우월감이나 교만이나 독선에서 나온 배타적 편견인가? 생명의 은인이자 친구의 출세 길을 막다니? 괘씸한 사람이로고!?

 


다 아닐 것입니다. 미래의 정세를 미리 헤아리는 통찰력이 있었던 관중은 사심이 없고 늘 먼저 도()를 구하고 중시하는 포숙이 진흙탕 같은 혹은 살벌한 투전판 같은 정치 격랑에 본의 아니게 휩쓸려 남은 생애가 불행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우정과 충정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포숙도 그렇게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포숙의 토로인즉 이렇습니다.

역시 관중이로다. 그는 사사로운 인연으로 대업(大業)을 망치지 않는 사람이로다!”

 


관중이 죽은 후,

환공은 관중이 곁에 두지 말라고 유언처럼 간곡히 당부했던 간신들곧 환공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여자들을 알아서 바쳤던 내시 수조(竪刁), 환공에게 권력을 얻고자 자기 어린 자식까지 죽여서 바친 역아(易牙), 역시 권력을 위해 제 부모조차도 외면해버린 개방(開方) 등을 일시 멀리 합니다만 그러나 곧 저들을 다시 불러들여 곁에 둡니다.

관중이 없는 정치판은 저 간신들의 독무대가 되고 저들로 말미암아 개판이 됩니다. 해서 불과 1년 만에 나라는 저 간신들이 각각 일으킨 반란에 의해 토막토막 나고, 노년의 환공 역시 골방에 갇힌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미래의 정세를 미리 읽은 관중의 통찰력은 옳았습니다. 그래서 또한 재상으로의 깊숙한 정치참여를 배제시킨 포숙에 대한 그의 배은망덕한(?) 우정 및 충정 역시 옳았습니다.



관자4권에, 관중의 이런 사상이 나옵니다.

 


-존귀한 사람이 존귀할 수 있는 까닭은

 존귀함으로 천한 사람을 섬겼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이 현명할 수 있는 까닭은 현명함으로

 현명하지 못한 사람을 섬겼기 때문이다.

 추함은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탕이고,

 천함은 존귀함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탕이고,

 미천함은 고귀함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탕이다.-

 


물론 저 말은 '목양' 내지 '목민'을 위해 백성을 섬기는관중의 통치이념이자 지향이념일 수 있겠지만, 또한 포숙과 관중의 지교 그 관계를 바탕에 깔고 있는 이런 의미로 이해 및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포숙이 존귀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존귀함으로 천한 나 관중을 섬겼기 때문이다. 포숙이 현명할 수 있는 까닭은 그 현명함으로 현명하지 못한 나 관중을 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큰 의미에서 보자면, 관중과 포숙은 서로 섬기는관계였습니다. 포숙은 물론이고, 관중 역시 포숙을 진정으로 아끼고 섬겼기에 그가 재상이 되어 실세인 간신들이 설쳐대는 현실정치 전면에 나섰다가 개죽음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공해라! 출세해라! 권력을 가져라! 부자가 되라! 숭어가 뛰니 망둥이 너도 뛰어라! 쟤가 재상 되었으니 너도 재상 되어라! 그렇게 아무에게나 싸구려(?)이나 축복을 파는 작태가 과연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은 아닙니다. 동기부여도 아니고, 섬기는 미덕도 아닙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행태도 아닙니다. 그것은 되레 다툼과 허영을 부추기는 작태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종여일하게 섬기는 자로 사신,

인간됨의 참 ()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목양' 내지 '목민'을 위한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자체이자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20:)

 


역시 섬기는 자로 살았던

사도 바울의 말씀도 함께 들어봅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2:3~5)

 


과연 다툼과 허영하나님이 주신자기 몫의 사명도 분수도 모르고, 소신도 없는 사람들이 벌리는 작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 마음앞에서는, 저 관중보다 포숙이 되레 더 큰 자일 수 있다 싶습니다. 실인즉 포숙이 없었으면 나라와 백성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인도했던 관중 역시 재상은커녕 권력투쟁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즉 개죽음당하고 말았을 분수이니까요.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는, 사람을 능히 알아보았던 포숙을 더 칭찬하였다는 저 사마천의 평가가 보다 설득력 있고 공감 있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포지션은 포숙일까요? ‘관중일까요? 인간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섬기는그래서 서로 살리는 포숙이나 관중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섬기는 자포숙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관중은 그 은혜 그 을 나라와 백성을 섬기는 자로 살면서 갚았습니다. 그렇듯 하늘의 도움을 받아 치명적인 위기나 병 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체험을 해본 사람들은 이후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섬기는 삶을 통해 하늘의 그 은혜 그 빚을 이웃들에게 갚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영성(靈性)과 이해는 저 하늘의 도움이라는 막연한 이해가 책 중의 책, 성경(聖經)’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확실한 이해이자 믿음으로 성숙 및 성화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삶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그 성령(聖靈)의 섭리를 아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삶이란 곧 이타적 사랑의 삶이자 헌신의 삶을 의미합니다. 남녀의 사랑(*에로스), 혈육의 사랑(*스톨게), 친구의 사랑(*필리오)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이자 거룩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사랑이자 섬기는 사랑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성애 내지 부성애는 내 자식, 내 가족이라는 한계를 차라리 철저하도록 벗어나지 못합니다. 따라서 혈육의 사랑이나 저 관포지교라는 친구의 사랑으로 진정한 대업(大業)이나 대의(大義)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진정으로 살려야 할 대업이나 대의는 환공 당대에 망해버린 제나라의 패권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식, 내 가족내지 내 친구가 그 세상 나라에서 재상으로 입신출세하는 그것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진정한 대업이자 대의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나라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天國)’를 알고 그 나라 그 의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이기적이자 자기중심적인 한계에 갇힌 죄인인 인간 우리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속물(ransom)’희생양이 되어 우리의 죄악과 한계를 대속(代贖)하시고, 극복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섬기는 사랑의 비밀과 초월적 능력을 알고, 믿고, 본받아야 할 필연성도 거기 있습니다. ‘하늘을 보지 못하고 우물 안에서 스스로 행세하다가 죽은 개구리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내로라 행세하다가 죽은 세상의 임금이나 집권자들이나 고관들이 진실로 큰 자도 아니고 행복한 자도 아니니까요.



섬기는 자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 앞에서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인이 일만 달란트라는 그 은혜 그 을 저 관중과 포숙 이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자로 살면서 갚아야 할 필연성 또한 거기 있습니다.

운명적이자 치명적인 재난이나 병 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결정적 구원의 체험, 신령한 은혜의 체험을 한 사람은 결코 이기적인 복이나 안일만을 구하는 신앙이나 직업적 신앙의 범주 내지 한계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절로 소명감도 책임감도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절로 섬기는 사랑을 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 절로 맺히는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고제자 됨을 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심오한 의미도 다 거기 있을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13: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