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그의 파란만장했던
일대기가 잘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별’ 다윗 왕.
‘미천한 목동(牧童)’이던 그는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어, 수많은 환난과 ‘사망의 골짜기’를
다 이기고 마침내 통일왕국의 왕이 되어
막강한 위력을 근동 국내외에 떨치던 영웅입니다.
뛰어난 장군이자 시인이자 음악가이기도 했고,
선지자적 영성(靈性)의 은사도 받은
참으로 다재다능한 위인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인 ‘첫째 아담’의 후예들
곧 타락한 죄악성(罪惡性)을 가진 인간 우리에게는,
저를 포함해서,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선과 악’이라는 ‘두 얼굴’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난 자들에게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혹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모순적인
‘두 얼굴’이자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가 ‘둘째 아담’이자 ‘세상에 친히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그 안에서 늘
깨어 살아야 할 참 구원에의 필연성도 거기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두 얼굴’이 있는 것도 그 상대적 이유이자 견제 때문입니다.
‘신앙영웅’ 다윗 왕에 대한 기록 역시 믿음과 선과
큰 성공 그 ‘한쪽 얼굴’에서 끝났더라면 후세들에게
더 큰 귀감이 되고 롤 모델이 될 수 있어 더 좋았을 텐데,
성경은 이상하게도(?) 섭섭하게도(?)
다윗 왕은 물론이고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나 하나님의 큰 종이자
선지자인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 등을 막론하고, 그 어느 특정인간도 미화시키거나
의인화시키지 않습니다. 영웅화시키거나
우상화시키거나 신격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믿음의 조상’이든 ‘왕’이든 ‘사사’든
‘신앙영웅’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 그의 죄악이나
허물, 실수조차도 액면 그대로 기록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분의 징벌 역시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의 별’이자 ‘영웅’인 다윗 왕의 의롭고 선하고
좋은 점이나 신실하고 위대한 점만 기록했으면,
그래서 신앙영웅화 내지 우상화 내지 신격화시켰으면
후세들에게 되레 더 좋은 신앙모본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인생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크게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사다가
잘 죽었다’는 스토리만 기록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왜 성경은 백성들에게 ‘신앙영웅’으로 추앙받던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많은 여인을 아내로 거느리고
살았던 그가,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그녀가 임신을 하자, 권력을 남용하여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암몬과의 전쟁터에 나가있던 우리아 장군을 그 전쟁
최일선으로 보내도록 ‘은밀히’ 사주해서 ‘칼’에 맞아 죽게
만든 사실까지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시쳇말로 ‘믿기만 하면 다 용서 받는다’,
권력이나 성공한 신분을 남용해서 간통을 하든,
성폭행을 하든, 탐욕을 부리든, 사기 및 사취 행각을 하든,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다 용서 받는다’는 식으로만
기록했더라면 후세들이 신이 나서(?) ‘좋으신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더 잘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복(福)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이나 출세나 만사형통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복 주시는 하나님’만 기록했으면,
‘값싼 은혜’나 ‘기복신앙’만 선포했으면, 선교나 전도가
되레 더 잘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카알라일의 명언 그대로 과연
‘고난을 이긴 자는 많지만 성공을 이긴 자는 드뭅니다.‘
따라서 ’잘 나가는 때‘, ’배가 부를 때‘, 성공이나 기득권을
누리는 때일수록 더욱더 조심해야 될 때이고, 더욱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 왕의 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응분의 징벌 역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꾸짖은
말씀이자 예언을 직접, 다시, 들어봅시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도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calamity)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사무엘하12:9~12)
추상같은 질책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징벌입니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니?!
‘악을 행한’ 다윗이 차라리 세상 실정법에 따라 일정기간 ‘교도소’에 들어가서 살다나오는 형벌이 더 가벼울 수 있습니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는’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운명적 악순환’이자 ‘숙명적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 후 참회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살아남았지만 그러나 이미 선고된 저 징벌이자 예언은 다윗 왕의 생애에서 가정적이자 국가적인 ‘재앙’인 불행이나 고난을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다윗 왕의 장남이자 왕자인 암논이 이복동생이자 공주인 다말을 성폭행하고, 그에 앙심을 품은 다말의 동복오빠인 압살롬이 저 형 암논을 ‘칼’로 죽이는 등 왕실이자 가족 간의 근친상간과 형제살인을 시작으로 해서 그 재앙이자 불행은 국가적으로 비화됩니다.
‘암살롬의 반역사건’이나 ‘세바의 반란사건’ 등 다윗왕국 최대의 반역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다윗은 왕궁까지 비우고 피난길에 오르고, 그 와중에 ‘다윗의 아내들이 백주에’ 성폭행을 당하는 등 차라리 처절하게 비화됩니다.
그나마 저 반역 내지 반란사건들은 그 후 진압이 되어 다윗 왕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와 그의 왕위를 유지하긴 합니다만, 그러나 아들 솔로몬에게 이어진 다윗의 통일왕국은 그 후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북왕국은 앗시리아의 ‘칼’에, 남왕국은 B.C. 586년에 바벨론의 ‘칼’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당하고 맙니다. 400여년에 걸친 이스라엘 다윗왕국이 그렇게 망하고 이후 베벨론 포로시대와 로마 강점기시대인 ‘신구약 중간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라기’ 이후 선지자가 없었던 곧 이스라엘왕국 멸망 이후 하나님이 침묵하셨던 저 ‘신구약 중간기’는 인간 및 인류의 진정한 구원은 ‘아담’으로는 안 된다, ‘다윗 왕국’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친히 세상에 오셔야만 한다, ‘메시아’가 오셔야만 한다, 그것을 온 몸 온 역사로 절감하고 대망하던 시대이자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아담이나 다윗을 위시한 인간 우리의 저 모든 죄악으로 인한 저주와 고난과 불행과 멸망 및 죽음에 이르는 ‘운명적 악순환’ 내지 ‘숙명적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代贖)의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어 내 대신 우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 왕국’이자 ‘세상 왕국’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왕국’이자 ‘하나님의 나라(天國)’ 중심의 진정한 구원이자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열려진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제 일성을 다시 들어봅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4:17)
아울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씀도 들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your righteousness)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5:20)
저 ‘결코 ‧‧‧ 들어가지 못하리라’ 곧 헬라어 ‘우 메 에이셀데테’는 이중부정문입니다. ‘우(no)’도 ‘메(not)’도 부정어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강한 부정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는 어법입니다. 그렇듯 강한 부정도 부정이지만, 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당시 ‘하늘의 별’(?) 같은 신분이자 존재들인지라 실로 난감하고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처럼 ‘별 볼일 없는’ 평민이나 서민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요원한 일이겠구나?!
그도 그럴 것이 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당대의 지식인인 율법학자이자 의롭고 경건하다고 자타가 자부 및 공인하던 대표적 신분이자 성공한 사회적 지도자들입니다. 금식도 잘 하고, 헌금도 잘 내고, 겉보기엔 나름대로 거룩하게 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선 저들이 그런 율법 내지 성경 지식과 공적(功績)으로 인해 스스로 교만과 독선에 빠져 세리나 창기나 작은 이웃 등 하층빈민들을 스스로 의인 행세를 하며 하나님이라도 되는 양 함부로 심판하며 가르치려고만 들었기에, 속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한 “독사의 새끼들아!”라고까지 그 외식(外飾) 신앙을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과연 인간을 교만이나 독선으로 인도하는 지식이나 의나 경건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되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선 친히 당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the way of righteousness)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21:)
따라서 아담도, 다윗도, 그 후예들인 저나 우리도 진정으로 ‘뉘우치며’ 회개해야 할 이유이자 필연 역시 거기 있습니다. ‘천국’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이나 세상 왕국 중심이나 그 부귀나 정치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색욕 중심의 가치관에 연연해서 그것을 선망하며 그 성공과 출세를 구하며 사는 중심 자체를 회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에 빠져있는 심령 자체부터가 지극히 이기적인 교만이자 독선이자 탐욕일 수 있으니까요.
‘천국’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이타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 ‘천국’ 중심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꿀 때 비로소 우리 서로에게 참 구원의 삶, 참 평안과 행복의 삶, 영원한 생명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세상에 와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부터 ‘현재적 천국’을 통해 ‘종말적 천국’이자 ‘내세적 천국’을 미리 ‘맛보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진정으로 ‘새 것’, ‘새 부대’라는 가치관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다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가치관은 여전히 ‘헌 것’인 그것 아닐까요? 인류의 조상 아담이나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국의 부귀영화조차도 다 ‘헌 것’, ‘헌 부대’의 것입니다. 솔로몬의 토설 그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전도서1:2)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차라리 '배설물'입니다.
그 가치관의 차이를 확실하게 구별 및 성별하며 사는 삶이 곧 성경에서 강조하는 진실로 ‘거룩한’ 삶이자 ‘경건한’ 삶입니다. ‘천국’ 중심의 가치관을 확실하게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야할 절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천국’은 세상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색욕을 얻기 위해 헌신짝처럼 버려도 좋을 그런 나라도 아니고 가치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천국’의 절대가치를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사도 바울도 또한 그렇게 살았습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느니라.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마태복음19:120)
‘칼이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고통과 불행을 끊임없이 앓고 있던 다윗 왕이 예수 그리스도의 저 말씀을 들었으면 뭐라고 토설했을까요?
성폭행이나 살상(殺傷)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또한 뭐라고 토설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역시 저 ‘말을 받은 만한’ 각자의 몫으로 남겨둡시다.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교도소’에 보내는 세상 실정법보다 외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公義)’라는 것입니다. 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는’ 행위가 곧 무서운 재앙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임을 ‘두렵고 떨리도록’ 절감하게 됩니다. 과연 ‘여호와를 경외(fear)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언9:10)입니다.
성경에 ‘신앙위인’이나 ‘신앙영웅’의 죄악이나 허물이나 그 징벌까지도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타산지석 및 반면교사로 삼아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이자 정의(正義)를 '두렵고 떨리도록’ 명심하라는 의미, 그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만 강조하면서 ‘반쪽복음’만 가르치거나 배워서는 안 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만 알고 ‘이웃’을 모르는 신앙은 ‘반쪽신앙’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고 ‘사랑’만 아는 신앙도 반쪽신앙입니다. ‘개인구원’만 알고 ‘사회구원’을 모르는 신앙도 반쪽신앙입니다. 공동체 사회에서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없는 신앙은 실상인즉 이기적이자 외식적인 반쪽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진실로 복되게 살리는 '참 왕'이자 ‘왕 중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보다 의롭고(義) 보다 선한 사랑(愛)의 삶, 보다 ‘온전한’ 신앙 양심의 삶을 살 수 있는 저나 당신이 될 수 있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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