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연산군의 폭정 시절.
정오품 벼슬인 교리(校理)를 지냈던 이장곤(李長坤)은 거제도로 귀양을 갑니다.
연산군은 그래도 이장곤이 반란을 일으킬 것만 같아 마음이 영 불안합니다.
그래서 아예 잡아 죽이라고 어명을 내립니다.
그런 소식을 전해들은 이장곤은 개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다 싶어
거제도를 탈출, 함경도 쪽으로 도망을 갑니다.
추적하여 죽이라는, 분노한 연산군의 엄명을 받은 포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이장곤은 정처 없이 도망가다가 너무 지쳐서 여름날 어느 정자나무 아래서 잠이 들고 맙니다. 그때 그를 추적하던 포졸들이 들이닥칩니다. 체구가 큰 이장곤의 자고 있는 모습을 살피던 포졸들은 그의 너무 큰 발을 보고 고개를 흔듭니다. 그의 발이 ‘산도둑놈발’이었기 때문입니다. 포졸들은 못생긴 그의 발을 보고 ‘글 배운 선비’는 아니라고 단정한 후 그냥 지나쳐 가버립니다.
그렇게 ‘못생긴 발’ 때문에 되레 구원받은 이장곤은 그 후 함흥으로 가서 신분을 감추고, 천한 신분인 어느 고리백장의 데릴사위가 되어 버들고리를 만들어 연명하며 한세월을 숨어삽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장곤은 조정으로 들어가 국사를 살피며 우찬성까지 지냅니다. 그렇지만 어려울 때 아내로 맞이했던 ‘천한 신분’인 고리백장의 딸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해로함으로써 그의 명망이 더욱 높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시대는 이미 성형수술이 보편화되고 대중화되어 얼굴이나 신체의 ‘못생긴’ 부분을 고치는 것이 예사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외모 내지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몸매를 가꾸고자 하는 희구나 열심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이 또한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나 사람은 운명이 기구하거나 수명이 짧은 경우가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따라서 성형수술까지 해서 인위적으로 가꾼 ‘아름다운 외모’가 긴 안목으로 보면 복이 되기는커녕 되레 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겸손하게 유념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진실로 복되게 살리는 것은 외모에서 풍기는 향기가 아니고, ‘속사람’에서 풍기는 향기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저 이장곤의 경우처럼 타고난 우리 모습 그대로의 ‘못생긴 발’이 되레 복이 되어 우리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실인즉 이장곤의 발처럼 우리의 발 역시 매일 역한 냄새를 풍기는 ‘산도둑놈발’입니다. 영적으로 ‘더러운 발’이자 ‘죄인의 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발을 씻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땀에 전 그래서 고린내 나는 ‘육신의 발’은 우리 스스로 씻을 수 있지만, ‘영혼의 발’은 죄인인 우리 스스로 씻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죄인의 발’을 가진 우리가 우리의 못난 발 때문에 되레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러운 발’이자 ‘죄인의 발’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영(靈)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 및 기도드리며 사는 영적인 교제이자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 내 발이 왜 ‘죄인의 발’이냐? 나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 같은 흉악한 죄를 저지른 적도 없고 그래서 감옥이나 경찰서는 모르고 한세상 의롭게 살아왔다? 나는 종교인으로 한세상 수행하며 거룩하고 선량하게 살아왔다? 내가 왜 더럽냐? 나는 내 스스로의 학문이나 수행이나 선행이나 덕행으로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수행이나 득도 곧 깨달음은 인간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그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인간 자기의 무력한 그리고 허무한 한계를 진솔하게 깨닫는 그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런 영성의 비밀에 열려지지 않으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 우리는 누구도 진정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발’을 내밀지는 않습니다. 내밀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세리나 창녀’ 등의 육신적인 타락이나 음행 등의 죄악보다 더 무서운 ‘영적 교만’이라는 죄악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사회적으로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등의 신분 여부를 막론하고 인간 우리는 모두 영혼이 죽을 병에 걸린 비참한 죄인이라는 정체성의 진면목을 절감하지 못한 그래서 스스로 건강하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같은 그런 사람은 의사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래서 결코 몸도 발도 내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한복음13:8)
인간 구원의 문제입니다. 영혼 구원의 문제입니다. 물론 제자인 베드로는 주님께 더러운 발을 내미는 것은 무례이자 결례이다라는 의미에서 ‘절대로’ 내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겸양도 아니고 겸손도 아닙니다. ‘내 발은 내가 씻을 수 있다’는 그것은 무서운 교만이자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인 신성(神性)에 열리고, 그것에 대한 구별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인이 되신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 원로목사님이 남한산성 쪽에서 거처하시던 노년에, 그분을 찾아뵌 후배 목사님들에게 아이러니컬하게도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유언(?)처럼 당부하셨다는 일화도 그런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그것은 곧 목사, 신부 아니 수제자 베드로라 쳐도,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라 쳐도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회적인 역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교회’가 많아지고,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진다는 의미에서의 염려이자 당부가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베드로는 적극적으로 주님께 발을 내밉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요한복음13:9-)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곧 이미 ‘목욕한 자’ 곧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만, 또한 세상 끝날까지 너 스스로 주인 혹은 성자 혹은 의인 행세를 하지 말고 겸손하게 내게 발을 내밀어 계속 씻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영적 관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의 몸에서 곧 ‘여인의 몸’에서 육신을 입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신만의 동물은 아닙니다.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태어남 곧 거듭남이 또한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갈파하신 바처럼, 태초적 내지 태생적으로 이미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 우리의 악한 유전적 죄성(罪性) 혹은 운명(mortality)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요한복음3:5) 곧 ‘회개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참된 복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및 그의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는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인의 몸 안에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일수록 더욱 더 현재적인 일상의 삶을 통해 ‘더러워진 발’을 늘 어린아이처럼 겸허하게 주님께 내밀어 계속해서 씻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세상에서 ‘고린내’가 아닌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처럼, 곧 '작은 예수'처럼 성숙한 모습으로 이웃의 발을 또한 씻겨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 ‘일만 달란트’라는 태산보다 더 큰 운명의 빚을 용서 및 탕감해주셔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및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가, 그래서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그 ‘생명의 은인’이 말씀하신 대로 다른 사람의 ‘더러운 발’을 용서하고 섬기고 씻기는 삶은 오히려 당연한 양심이자 의무이자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한복음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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