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비둘기'를 '파랑새'로 볼 수 있는 마음

이형선 2012. 8. 13. 08:58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벨기에 태생의 극작가 메테르링크가 쓴 희곡「파랑새」.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 남매인 찌르찌르와 미찌르는 파랑새를 찾고자 여행길에 나섭니다만,

   그것은 자기들이 누릴 희망과 행복의 파랑새를 찾고자 나선 것은 아닙니다.

   병들어 앓아누운 이웃집 소녀에게 줄 ‘파랑새’를 찾아 달라는 ‘요술할멈’의 부탁을 받고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찌르찌르와 미찌르 남매는 ‘밤의 궁전’ 그리고 ‘추억의 나라’ 그리고 ‘행복의 궁전’ 그리고 ‘미래의 나라’ 등을 두루 돌아다니지만 그 어디에서도 병든 이웃집 소녀에게 줄 수 있는 ‘파랑새’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낙담하는 찌르찌르에게 ‘빛’이 이런 말을 하며 위로를 합니다.

   “파랑새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새장에 넣으면 그 빛이 변해버리고 마는 거야.”

 

 

   그리고 마침내 남매는 ‘빛’이나 ‘불’, ‘물’, 그리고 서로 싸웠던 ‘밤의 부하’인 개나 고양이 등의 전송을 받으며 ‘요술문’을 나옵니다. 그렇게 일 년에 걸친 여행을 끝낸 것입니다.

   엄마의 목소리에 잠을 깬 남매는 그것이 하룻밤 꿈속에서의 여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러나 이웃집에 살고 있는 소녀가 병들어 앓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긴(?) 여행길에서 결국 빈손으로 돌아온 찌르찌르는 비로소 자기가 집에서 키우던 평범한 ‘비둘기’를 유의 깊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새가 바로 이웃집 소녀에게 줄 수 있는 희망과 행복의 ‘파랑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새를 이웃집 소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줍니다. 그 ‘파랑새’를 선물로 받은 소녀는 기뻐하며 그 후 병세가 빠르게 호전 되어 건강을 되찾습니다.

 

   그즈음, 이상하게도 그 ‘파랑새’는 소녀와 찌르찌르의 손에서 달아나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슬퍼하며 울음을 터뜨린 소녀에게 찌르찌르는 “또 잡아줄게”라고 말하며 위로 및 약속을 합니다만 그러나 찌르찌르는 알고 있습니다. 파랑새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새장에 넣으면 그 빛이 변해버린다는 것을. 때론 그 새가 아예 달아나버리고 만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다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행복을 꿈꾸며 삽니다. 건강한 몸,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집 등 끊임없이 이 세상의 ‘파랑새’를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설령 아주 이상적인 ‘파랑새를 잡았다’ 쳐도 그 새를 ‘나의 새장’에 일단 넣으면 그 후 그것은 더 이상 ‘파랑새’가 되지 못합니다.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면 그것에서 오는 감사도 행복도 다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더 좋은 다른 집이나 직장을 희구하거나, ‘서로 죽도록 사랑해서’ 하객들 앞에서 선남선녀로 백년해로를 서약했다가도 서로 미워져서 이혼해버리는 사례도 항다반사입니다.

   자족(自足)할 줄 모르고, 차라리 간사하도록 변화무쌍한 인간 우리의 마음. 왜 그렇습니까? 실로 인간 우리의 마음 자체가 죄악으로 인해 이미 타락해 있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그렇습니다. ‘생명의 근원’도, 우리 곁에 이미 있는 평범한 ‘비둘기’를 ‘파랑새’로 볼 수 있는 열린 시야도 우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선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럴 것이 병들어 앓고 있는 이웃집 소녀에게 희망과 격려와 행복을 주고 싶은 선한 마음을 가진 찌르찌르와 미찌르 남매에게 ‘빛’이 마음의 비밀 내지 파랑새의 비밀을 가르쳐준 것처럼 말입니다.

   나아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성(靈性)의 비밀’을 이렇게 관계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7)

 

 

   고통 받는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곧 그 이웃을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작은 이웃 내지 사회적 약자와의 관계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로 승화된다는 것입니다. 땅의 관계가 하늘의 관계로, 금세의 관계가 내세의 관계로 승화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축복이자 영원한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들어봅시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25:34-)

 

 

   따라서 현재 자기의 삶이나 자기의 집이나 직장이나 배우자 등과의 관계에 부정적이거나, 불화나 불만이나 원망이 많은 사람일수록, 우울증이나 절망감에 빠진 사람일수록,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찾아가서 봉사생활을 해보는 것이 복된 구원의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에서 버려진 중증장애인들의 복지시설이나 고통 속에서 단 하루의 삶조차도 기적처럼 연명하는 암병동(癌病棟) 같은 요양원에 가서 섬기는 마음 내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과 뒹굴며 한세월 살다보면,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똥오줌까지도 기꺼이 치워주는 봉사생활을 한세월 하다보면, 거기서 되레 인생을 참으로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긍휼을 저절로 얻게 됩니다.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되레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비밀을 배우고 또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저의 젊은 날 체험담이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그런 삶 속에서 오히려 곤고한 인간 내지 비참한 인간 우리 및 자기의 한계와 정체성을 알고, 자기의 허영이나 교만에서 나온 원망이나 불평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깨달은 사람은 삶이나 감사에 대한 가치관부터가 저절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웃사이더 계층인 미천한 병자들이나 죄인들 속에서 살다 가신 그 마음이나 그 이유를 보다 진솔하고 보다 가깝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죄인인 인간 우리 모두는 다 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필요한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라는 형제의식이나 인간애에 열려져서, 베푸는 동정의 차원이 아닌 동병상련(同病相憐) 내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차원에 열려져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마음의 세계가 커지면 커질수록 복이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지 못한 ‘봉사’라면 그런 봉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섬기는 봉사’가 아니었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13:3)

 

 

   그렇습니다. ‘사랑’ 곧 ‘아가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긍휼(矜恤)입니다. 타락해서 가출한 ‘죄악의 자식’일수록, ‘지극히 작은 자’인 자식일수록 회개하고 어서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육신의 어버이도 잘난 자식보다는 못난 자식, 병든 자식에게 관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가는 것 아니던가요? 그런 마음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버이가 못난 새끼나 병든 새끼는 차라리 죽도록 내버려두기도 합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이자 적자생존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그런 ‘짐승의 형상’이나 마음을 닮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는 결국 자기도 짐승 대접을 받으며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염소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심판 때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마태복음27:41)

 

 

   따라서 ‘양의 마음’을 가진 저 찌르찌르와 미찌르는 종말적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을 받는’ 미래의 심판은 차치하더라도,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복을 받은 남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세상에서의 희망과 행복의 ‘파랑새’의 의미와 그 가치를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볼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진실로 그렇습니다. 희망도 행복도 ‘파랑새’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파랑새’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낙원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희망이나 행복은 볼품 없는(?) ‘비둘기’를 ‘파랑새’로 볼 수 있는 우리의 마음 자체에 있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처럼 ‘작은 이웃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볼 수 있는 우리의 마음 자체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의 심령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within you) 있느니라 … 하시니라.-

                                                                        (누가복음17:20-)

 

 

   한편, 그것은 ‘내 모습 이대로’에서 그나마 내게 있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긍정적인 마음에서 또한 하나님의 창의적인 마음이 나온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손도 발도 전혀 못쓰는 중중장애인인 구족화가가 그래도 쓸 수 있는 입이 있음을 감사하며, 그 입으로 창조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갓난아이 때 실명한 이후 맹인으로 살아왔지만 그러나 “내가 맹인이 된 것을 감사하게 하소서”라고 늘 기도하며,「예수 나를 위하여」등 수많은 신실한 찬송시를 세상에 남기고 간 화니 제인 크로스비 여사처럼 말입니다.

   저 역시 오늘도 그런 ‘마음’을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