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창조적 소수'와 '지배적 소수'의 차이

이형선 2012. 8. 6. 09:08

 

   저명한 20세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는「역사의 연구」라는 그의 방대한 저서를 그렇게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 인식의 프레임을 통해 조명을 했습니다만,

   실인즉 세상의 문화나 문명을 위시한 크고 작은 모든 역사는

   수많은 도전과 응전 및 실패와 성공의 반복을 통해 진행됩니다.

 

 

   그리고 과학 예술 경제 정치 종교 등 우리가 존경하는 각계의 성공한 위인(偉人)들일수록

   대다수가 남들보다 어려운 역경과 고난과 실패를 더 많이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남다른 역경과 고난과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거기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면서

   끈기 있게 ‘응전(應戰)했던 창조적 소수’라는 점이 또한 역사의 발전을 견인한 위인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 내지 시대의 새로운 도전은 변화를 거듭하며 계속되기 마련인데,

   그 새로운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문명이나 문화, 집단이나 위인들은 쇠퇴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ies)’가 이미 이룬 성공과 거기서 주어지는 기득권에 안주하여 자기도취 및 안일에 빠지거나 자만 내지 오만해지면 그때부터 쇠퇴하여 다만 행세하는 집단인 ‘지배적 소수(Dominant Minorities)’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 그래서 결국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해보고 싶은 포인트는, ‘창조적 소수’가 다만 행세하는 ‘지배적 소수’로 전락 및 쇠퇴하는 과정의 그 요인과 차이입니다. 그 요인을 역사학자 토인비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內的)인 것으로 정의하며, 그것을 ‘휴브리스(Hubris)’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연유된 저 ‘휴브리스’라는 명사에 대한 영한사전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자신, 과잉 따위에 의한) 오만, 자만.:

   (그리스의 비극) 신(神)들에 대한 불손.-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敬畏)할 줄 모르고 곧 공경하며 두려워할 줄 모르고, 스스로 성공했다는 인간적인 자기 과신이나 오만이나 자만, 안일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존경받던 ‘창조적 소수’는 다만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정치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경제 등의 분야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염원에서 오늘의 기독교 신앙 풍토의 모습을 조명해보고 싶습니다. 이른바 성공했다는 ‘창조적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 분들이 이미 ‘휴브리스’에 빠져서 다만 세상에서 행세하는 그래서 세상의 거센 비난과 비판까지 받고 있는 ‘지배적 소수’로 전락해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받을 상’이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다 받고 다 누려야 한다는 모범을 보이는 탐욕적인 그런 ‘지배적 소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神)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뿐이요 신이 아니라. 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에스겔28:2-)

 

 

   지중해를 무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저 ‘두로 왕’은 역사학자 토인비의 용어를 빌리자면 ‘휴브리스’에 빠져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신(神)이라고까지 행세하는 오만한 ‘지배자’로 군림하다가 결국엔 하나님의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 그대로 멸망을 당했던 왕이자 나라입니다.

   딱히 “내가 신이다”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이기적인 인간 자기중심의 오만이나 독선에 빠져서 남을 지배하는 자의 모습 그것이 바로 스스로 신 행세를 하고 있는 행태입니다.

 

   따라서 ‘창조적 소수’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우리들 모두도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 등을 비롯한 공동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부장적인 지배자의 모습이 역시 그렇듯이 크고 작은 ‘휴브리스’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오만하게 군림하는 지도자 내지 지배자도 아울러 그 휘하의 피지배집단 내지 사회도 결국엔 피차 모두가 불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율법선생)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23:8-)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인간 자기 분수에 대한 구별과 한계를 확실하게 할 줄 알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랍비’나 ‘땅에 있는 아버지’나 ‘지도자’가 스스로 신(神)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특정 종교지도자를 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두고 신처럼 추앙해서도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 됩니다.

 

 

   우리의 ‘한 분이신 지도자’이자 스스로 ‘희생양’이 되신 그래서 대속(代贖)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경이 증언하고 있듯이, 죽은 자도 살리시고, 풍랑 사나운 바다 위도 걸으신 분입니다. ‘창조적 소수’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가 ‘한 분이신 창조성’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9:23)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등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풍랑 사나운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도전에 대해, 사탄 곧 악령(惡靈)의 크고 작은 모든 도전에 대해 응전(應戰)하지 못할 시험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이란 이성적(理性的)인 한계 곧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밀한 영의 세계’의 능력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를 살리거나 바다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자주 일어나면 그런 사회엔 오히려 혼란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 같은 자연성(自然性)이나 상식성도 창조주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의 질서이자 일반은총의 영역인데 그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땅에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섭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이자 자연성이자 ‘일반은총’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그랬던 것처럼, 대낮인 12시부터 3시까지 해가 사라지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한’(마태복음27:45)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자 ‘특별은총’의 역사입니다. 물론 그것을 과학도는 ‘일식(日蝕) 현상’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의 거센 풍랑조차 ‘말씀’ 한 마디로 잔잔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있다면, 부활도 승천도 성령잉태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은총’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런 ‘특별은총’의 능력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물론 미신적인 믿음이나 허황한 믿음, 이기적이고 기복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공생애(共生涯)를 통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등의 초자연적인 다양한 이적을 많이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기도 및 간구에는 늘 다음과 같은 절대 원칙이자 겸손한 원칙이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런 비밀한 영의 세계에 관심과 믿음을 가지고, 먼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친 파도와 같은 세상의 모든 도전(挑戰)에 담대하게 맞서서 용감하게 응전(應戰)을 하고, 그래서 성공 및 승리를 하는 신실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더욱 많아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많은 이웃들을 자기 몸처럼, 자기 가족처럼 함께 살리는 사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존경할 수 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어른들이 더욱 많아지는 우리의 신앙 풍토 및 사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백주에 불을 밝히고 ‘사람다운 사람’을 찾아다녀야만 하는 사회는 피차 불행한 사회일테니까요.

 

 

   성현(聖賢)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지요.

   -우리가 존중해야 할 것은 성공한 삶이 아니라 올바른 삶이다.-

   그렇습니다. ‘섬기는 자’로 세상에 와서 또한 ‘섬기는 자’로 끝마칠 수 있는 올바른 사람. ‘창조적 소수’로 성공해서 또한 사심 없이 ‘창조적 소수’로 끝마칠 수 있는 올바른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종’의 진정한 모습은 그렇게 시종여일(始終如一)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남달리 성공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피나는 노력과 능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섬기는 종’이 성공했다고 해서 스스로 ‘주인’ 내지 ‘신’ 행세를 하는 그런 ‘휴브리스’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불행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과연 심오한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17:10)